소설리스트

환관무제-499화 (499/648)

499장: 죽은 사람만이 말이 없고 二

밤이 짙어졌다.

영설 공주는 침상에 누워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이곳은 두변과 첫날밤을 보냈던 곳인지라, 심지어 붉은 ‘희’자가 곳곳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영설 공주는 두변과 혼례를 올리던 때를 회상하면서 마음이 저며왔다.

그녀는 의협심이 넘치면서도 천진난만한 성정이었다. 천윤제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설 공주는 무척이나 총명하면서도 사람이나 어떤 일을 대할 때 직감을 믿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왕 영리한 사람도 짐작하지 못하는 것에 실마리를 풀곤 했다.

‘황형이 뭔가 이상해. 아주 이상해.

내가 회임하지 못하도록 분향에 탁몽 정석 분말을 섞다니. 내가 아이를 낳는다 해도 황형에겐 아무런 위협이 안 될 텐데.’

이때, 영설 공주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누군가가 영설 공주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비밀스러운 대종사급 강자이자, 영설 공주가 처음 보는 무도 강자였다.

영설 공주가 곧바로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비밀스러운 대종사가 입을 열었다.

“쓸모없는 짓입니다. 공주 전하, 괜히 힘 빼지 마십시오. 저와 전하의 무도 수준은 천지의 차이입니다. 반항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 비밀스러운 대종사의 날카로운 검날이 영설 공주의 이마를 겨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실 겁니다. 꼭 잠드는 것처럼 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전하께서 자결하신 것으로 알 겁니다.”

비밀스러운 대종사가 검 끝에 살짝 힘을 주자, 영설 공주는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놀랍게도 그녀의 이마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대종사가 장갑을 끼고 영설 공주의 입을 벌리더니 독약 한 알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옆에 있던 찻물을 먹여서 독약이 영설 공주의 위장까지 내려가도록 했다.

대종사는 영설 공주의 필적과 똑같은 유서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유서에 쓰인 내용은 간단했다.

‘두변 부군, 군대를 철수하세요. 난신적자가 되지 말아요. 땅속에 계신 선황께서 안식을 취하게 해줘요. 나는 당신의 아이를 가졌지만, 이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운명이에요.

영설이 죽음으로써 간언합니다.’

영설 공주는 회임하지 않았지만, 비극의 극대화를 위해서, 두변의 죄악을 더 악질로 만들기 위해서 위조된 유서에는 영설이 두변의 아이를 가졌다고 적혀 있었다.

비밀스러운 대종사는 모든 작업을 마치고 중얼거렸다.

“공주 전하,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반 시진만 기다리시면, 칠규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잠든 것처럼 편안하게 세상을 뜨실 겁니다.”

비밀스러운 대종사는 흔적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잠시 뒤, 매혹적인 미인이 영설 공주의 방 안에 나타났다.

그녀는 영설 공주의 입을 벌린 뒤, 단약 두 알을 차례로 먹였다.

“몇 날 며칠 정도 푹 잠만 잘 겁니다. 꼭 죽은 사람처럼요.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땐, 최근 며칠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음, 어쩌면 후유증이 좀 생길 수도 있고요.”

그 미인이 영설 공주의 칠규에서 피가 난 모습으로 꾸며놨다.

“공주 전하, 곧 부군을 뵙게 되실 겁니다.”

해가 뜰 무렵, 황궁 안.

황제가 효심을 다해 태후를 모시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침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소박했다.

“모후, 영설을 좀 설득해주십시오. 영설은 두변과 깔끔하게 갈라서야 합니다.”

황제의 말에 태후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정말로 두변과 이 지경이 되도록 싸워야겠느냐.”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모후, 저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만약 두변을 난신적자로 만들지 않는다면, 제가 더 살아갈 수가 없어요. 설마 모후께서 아들의 신세가 망하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요.”

태후가 울먹였다.

“하지만 두변도 내 반쪽짜리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모후, 제가 모후의 친자식입니다. 두변이 여진 제국을 없앴으니, 연왕은 제위에 오를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제 방계 전체가 저를 지지하고 있다고요. 모후께서는 선황께서 어떻게 지내오셨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방탁과 두회는 저를…….”

“그만 말하거라. 그만!”

태후가 흥분한 기색으로 황제의 말을 끊었다.

“알겠어요. 그 얘긴 그만하겠습니다. 모후, 저와 두변, 둘 중에 한 명만 선택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모후께서 두변을 포용하신다면, 이 아들은 아주 처참하게 죽게 될 것입니다.”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알았다. 내가 가서 영설을 좀 설득해보마.”

이때, 환관 한 명이 뛰어 들어오면서 외쳤다.

“태후마마, 폐하. 큰일 났습니다. 영설 공주께서 자결하셨습니다.”

태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혼절했다.

영덕제는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떨구면서 눈물을 흘렸다.

“짐의 누이가, 짐의 유일한 누이가, 아이고, 가엾은 짐의 누이가…….”

황제가 태후를 품에 안은 채 통곡했다.

잠시 후, 태후는 의식을 되찾고 천천히 눈을 떴다.

황제가 영설 공주의 ‘유서’를 태후에게 건네면서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보 같은 누이, 왜 이렇게 가야만 했느냐. 두변이 너를 위해서 군대를 철수하겠느냐.”

태후는 영설의 유서를 보고는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었다.

“내 딸아, 다 이 어미의 잘못이다. 네가 두변과 일찍이 갈라서게 해야 했는데. 네가 이렇게 억울하게 만인의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놔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다 어미의 잘못이다!”

그런데 수차례 유서를 읽던 태후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영설은 회임할 수 없는 몸인데, 어찌 두변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지?’

태의 몇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했다.

“가엾은 공주 전하, 전하께서 회임하신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이리 허망하게 가시다니요. 황가에선 핏줄을 둘이나 잃으신 겁니다.”

태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종오가 불과 얼마 전에 영설 공주의 몸에 탁몽 기운이 있어서 회임할 수 없다고 태후에게 고했었다. 영종오가 비밀리에 다녀간 지 몇 시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태후는 영종오의 말을 듣는 순간, 아들 영덕제를 의심했다. 그래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황제에게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던 차였다.

태후는 극도로 끔찍한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안색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됐다. 애가(哀家: 태후가 본인을 칭하는 호칭)가 너무 지쳤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모두 물러가거라.”

태후의 말에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물러났다.

영덕제가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아신(儿臣), 모후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제, 태후의 방 안에는 태후와 황제 두 사람만 남았다.

영덕제가 통곡하면서 말했다.

“이 어리석은 누이야, 정말 이 오라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구나.

모후, 우리 모자의 운명은 왜 이리 기구한 겁니까. 영설이 갔으니, 이제 우리 둘만 남았습니다.”

태후가 냉랭한 눈빛으로 영덕제를 노려보았다.

“몹쓸 놈,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영설은 자결한 게 아니라, 네놈이 죽인 것이다. 영설의 몸에는 무언가가 있어서 회임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독을 쓴 사람이 바로 너지. 너는 영설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행복도 빼앗았고, 두변을 모함해서 영설을 죽이기까지 했다. 영설은 네 친누이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억장이 무너져내린 태후는 영덕제를 향해 삿대질하면서 울부짖었다.

“정말 후회되는구나. 내가 너무 약하고, 아둔했던 게 후회된다. 너 같은 짐승을 위해서 이 많은 일을 해오다니. 자기 친누이도 죽이는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을 위해서.”

영덕제는 일순간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 들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청천벽력을 들은 황제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모후께서 어떻게 영설이 회임할 수 없는 이유를 알고 계신 거지? 어떻게 이 비밀을 알고 계신 거야!

모든 게 다 완벽했는데, 모후께서 이런 것에서 허점을 찾아내시다니!’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조용해졌다.

그는 이 일 때문에 태후가 자신을 배신하고, 출생의 비밀을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

처참한 죽음을 맞고 싶지 않으니, 다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황제는 눈을 감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황제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후, 늘 선황께 미안함과 그리움이 가득하다고 하셨지요? 이제 마음 편히 선황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황제가 약이 든 그릇을 가져와서 태후의 턱을 잡고 약을 강제로 그녀의 입에 부었다.

“모후, 정말 죄송합니다. 이건 다 모후께서 자초하신 겁니다.

저는 모후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모후께서 떠나시면, 극상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드리겠습니다.”

영덕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온몸을 덜덜 떨었다.

영덕제는 손을 떨면서도 태후에게 약을 먹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절망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이다.

태후는 저항하지도 않고 슬픈 눈빛으로 악을 쓰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아들의 인성을 알고 있었다.

악인의 자식이니,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태후가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직접 하마. 내가 자결하는 모습으로 만들려던 거 아니냐. 이리 다오. 내가 직접 하마.”

황제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후에게 그릇을 건넸다.

태후가 독약의 향을 맡으면서 말했다.

“멸혼향이구나. 귀족 여인들이 자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약이지. 죽은 뒤에도 얼굴에 홍조가 있고, 몸에서 특이한 향이 나니까. 다 내 업보이니라. 내 죄야.”

태후가 약을 한 모금씩 삼키기 시작했다.

이 약은 두회가 황제에게 필요할 때 쓰라고 준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도 이 약을 지금 바로 쓸 줄은 몰랐다.

영덕제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다 모후께서 저를 이렇게 만드신 겁니다. 제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닙니다.”

태후가 계속 독약을 마시면서 말했다.

“네가 그 악인의 핏줄이긴 하나, 그자도 대녕 황족의 혈맥이니, 네가 황위를 잇는 게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 없다. 황위를 다시 건송제(建頌帝) 일족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태후는 젊었을 때를 회상했다.

천윤제가 태자일 때, 당시의 황제는 태자가 너무 인자하고 유약하다는 이유로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태후의 이름은 허숙군(許淑君)으로, 몰락한 훈귀 가문 출신이었다.

태후 허숙군은 천윤제 같은 천진한 젊은이가 아니라 세상을 압도하는 영웅 같은 사내를 좋아하는 유약한 여자였을 뿐이었다.

천윤제도 당시에 다른 여인을 흠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황제가 사혼을 내리면서 혼인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처음부터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심성이 착한 사람들인지라, 혼인을 맺은 뒤에 차차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를 아끼기 시작했다.

이때, 무척 준수하고 영웅의 기개를 가진 매력적인 사내가 허숙군 앞에 나타났다.

당시에 그녀는 태자비였고, 무척 어렸었다. 영도현은 천윤제보다 열 배는 넘을 만큼 남성적 매력이 가득했고 무공 수준도 어마어마했다.

특히 영도현의 몸에서는 특별한 남성적인 기운이 가득해서 여인들에겐 너무 치명적이었다. 젊은 허숙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렇게 그의 매력에 넘어갔었다.

하지만 태후는 어렸어도, 여인의 도덕성과 정조를 지켰다.

영도현에게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미 혼인을 맺은 몸이기에 다른 사내와 사통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고민 끝에 그를 멀리하고 그와의 모든 교류를 끊었다.

영도현은 갖은 수를 썼지만, 허숙군의 도덕적인 방어선을 뚫지는 못했다.

그는 결국 특수한 약으로 허숙군을 유혹한 뒤 어린 그녀를 간음했다.

영도현은 여인의 마음을 사려면, 우선 그녀의 몸을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허숙군은 그의 예상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허숙군은 영도현에게 마음이 흔들렸지만, 자신에게 약을 먹여서 간음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에 대한 호감은 역겨움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일이 생긴 뒤, 허숙군은 심하게 앓아누웠고, 천윤제가 돌아오면 그에게 고백한 뒤 자결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허숙군은 예상치도 못하게 자신이 회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량하고 연약한 여인인 허숙군은 혼자 죽는 것이면 상관없지만, 배 속의 아이는 무고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혈육을 그대로 제 손으로 죽일 순 없었다.

착하고 연약한 여인은 자기 위안을 계속했다.

태자가 안남 왕국을 방문하기 전날 허숙군과 밤을 보냈고, 영도현의 간음과 불과 이틀 차이였다. 허숙군은 이 아이가 태자의 아이라고 끝없이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녀는 끝내 이 일을 태자에겐 비밀로 하되, 자결하지 않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 허숙군은 태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태자의 선량함과 인자함, 그리고 너그러움과 강건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허숙군은 파렴치한 영도현보다 천윤제가 훨씬 더 낫다고 느꼈고, 그렇게 천윤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뒤, 허숙군은 놀랍게도 이 아이가 천윤제와 얼굴이 닮았다는 걸 발견했다.

허숙군은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을 놓았고, 분명히 이 아이가 천윤제의 혈육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허숙군의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아이는 자라면 자랄수록 준수한 외모가 돋보였지만, 아이의 미간과 눈빛, 그리고 성격이 파렴치한 영도현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숙군은 자신을 더 합리화하면서 자신을 환상 속에 가뒀다. 이 아이의 성격은 영도현이 아니라, 친부인 천윤제를 닮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 누군가가 그 환상을 완전히 깨부수고 말았다.

두회가 영덕제에게 가서 그의 출생의 비밀을 밝혔고, 그의 몸에 영도현의 유일무이한 유전 표식이 있다고 알린 것이다.

영덕제는 두회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곧장 태후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출생을 물었고, 태후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에게 진실을 알려줬다.

당시 태후는 아들을 보호해줘야 하고, 그의 출신을 죽을 때까지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반쪽짜리 아들이나 다름없는 두변에게 미안한 짓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태후는 그 오랜 세월 자신이 해왔던 모든 헌신이 허망해졌다.

그녀가 낳은 건 아들이 아니라, 금수만도 못한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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