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500화 (500/648)

500장: 영덕제의 본모습

마침내 태후가 그릇 안의 독약을 다 마셨다.

“내겐 죄가 있다. 다 내 잘못이다. 대녕 황족의 선조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내가 대녕 제국의 강산을 금수만도 못한 놈에게 넘겨주다니.”

독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는지, 태후의 안색이 차츰 붉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침상에 누운 뒤, 죽음을 기다렸다.

방 안에 이미 은은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독약을 먹고 자결해도 향기롭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게 바로 멸혼향의 특징이었다.

옆에 있던 영덕제도 점점 진정을 되찾고 조용해졌다.

그는 무척이나 슬펐다. 하지만 그는 꼭 스스로에게 상심이라는 감정을 강요하는 것 같았고, 실상은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영덕제는 역대 위대한 황제들을 떠올렸다.

‘진황도 자기 친모를 죽였고, 한무제도 자기 처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지. 하지만 그들은 위대한 황제가 되었고, 천고 일제(千古一帝)로 남았잖아.

황제가 된다는 건, 인간이 아닌 용이 되는 거야. 용은 원래 냉정하고 잔혹하잖아.’

영덕제는 자신이 이미 용이 된 것만 같았다.

“천고에 남을 위대한 업적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희생은 값진 것이고, 다 하늘이 제게 내려준 단련의 시간입니다.”

영덕제는 침상에 누운 태후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모후, 편히 쉬십시오. 제가 내일 아침에 뵈러 오겠습니다.”

영덕제가 무릎을 꿇고 말한 뒤, 침상 머리맡에 위조된 유지를 내려놓았다.

이 유지도 두회가 미리 준비해둔 것으로, 영덕제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이 유지를 지니고 다녔다.

다만 유지와 독약을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 몰랐을 뿐이다.

이 유지의 내용도 영설 공주의 유서처럼 간단했다.

‘애가가 두변을 반은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두변이 사천과 호남에 출병한 것은 반역과도 같다. 이 일로 애가가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게다가 딸 영설이 두변을 설득하기 위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가의 마음이 비통하기 끝이 없었다. 애가의 아들과도 같았던 두변이 결국 반역을 일으켰으니, 애가는 선황과 영씨 선조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그래서 애가가 선황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만약 두변이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영설과 애가의 죽음은 그만큼 값진 것일 테지.

두변, 제발 애가와 영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거라.’

위조된 유지의 필적은 태후의 필적과 똑같았다.

영설과 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동시에, 둘의 유서가 세상에 공개될 것이다.

이 소식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그 순간이 바로 천지가 뒤바뀌는 순간이리라.

두변은 순식간에 진정한 난신적자로 몰락하게 되고, 양심도 없는 역적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만천하 사람들이 앞뒤를 다퉈가며 두변을 죽이려고 할 것이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치욕 속에 파묻힐 것이다.

영덕제가 태후의 자녕궁에서 나온 뒤, 백 걸음 밖에서 자리를 지키던 모든 궁녀들에게 말했다.

“모후께서 어렵게 잠드셨으니, 모두 정숙하도록 해라. 그 누구든 모후의 단잠을 방해하면, 처형을 피치 못할 것이다. 한 시진마다 조심스럽게 가서 모후의 상태를 살피거라. 모후께서 이불을 잘 덮으셨는지, 혹여나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여라.”

“알겠습니다.”

궁녀와 환관들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궁녀와 환관들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폐하, 효성이 정말 지극하십니다!

자녕궁 안은 태후 외에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궁녀나 환관들이 태후가 벌써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일 좋은 건, 자신이 떠나고 한 시진 정도 뒤에 태후가 죽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자신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태후가 죽었다는 게 밝혀지면, 제 무고함을 증명하기가 곤란해질 테니까.

황제가 떠난 뒤, 한 사람이 조용히 자녕궁 안으로 잠입했다. 용모는 무척이나 평범하지만 몸매가 무척이나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이어서 또 다른 사람이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영종오 대종사였다.

“이 요망한 것, 왜 이 계획을 내게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

영종오가 목소리를 낮추어 화를 내자, 여완완이 말했다.

“대종사, 대종사께서는 영설을 그리도 아끼시고, 태후마마께 충성을 다하시잖습니까. 만약 제가 미리 알려드렸다면, 걱정이 앞서서 큰일을 망치셨겠지요.”

“그래서 탁몽에 관한 일을 내게 알려주고, 그래서 시간을 맞춰서 영설 공주를 만나러 가라고 했고, 또 시간을 맞춰서 태후마마를 뵈러 가라고 했던 거냐? 영설 공주가 회임할 수 없고, 그녀를 해한 사람이 영덕제일 수도 있다는 언질을 하게 하고? 너는 영덕제가 사람을 보내서 영설 공주를 죽일 걸 알고 있었다. 영덕제가 자기 손으로 모친을 죽이게 부추긴 건 바로 너란 말이다.”

“대종사, 제자의 며느리가 너무 악독하다고 탓하지 마세요.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악독하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더 잔혹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영덕제는 이미 모친을 시해할 마음이 있었어요. 안 그러면 왜 항상 멸혼향을 몸에 지니고 다니고, 위조된 유지를 가지고 다녔겠어요? 그에게는 모친을 시해할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어차피 오늘이 아니었다면, 언젠가 자기 손으로 죽였을 테니까요.

그리고 만약 제가 모든 계획을 대종사께 미리 알려드렸다면, 과연 영설 공주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게 했을까요? 그렇게 되면 모든 계획이 다 수포가 된다고요.”

영종오가 침묵했다.

요망한 여완완이 황제에 대해 한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될 말이지만, 전부 다 사실이었다.

“대종사, 이럴 시간 없어요. 멸혼향 맹독이 그렇게 희귀한 건 아니지만, 해독약이 없기로 유명하잖아요. 태후마마를 살리고 싶다면, 얼른 위에서 독약을 빼내고, 중화할 수 있는 약을 다시 먹여서 몸에 남은 독소를 제거해야 해요.”

여완완과 영종오는 얇은 관을 태후의 입으로 넣어서 관이 위장에 닿을 때까지 깊숙이 넣었다. 그리곤 태후의 위장에 있던 모든 것을 흡입해서 빼낸 뒤, 여러 번 반복해서 위를 세척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태후의 위에 있던 독약이 95퍼센트 정도는 제거되었다.

남은 5퍼센트의 독약은 약으로 중화가 가능해서 두 사람은 다시 관을 통해 태후의 위에 약을 흘려 넣었다.

두 사람 덕분에 태후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졌고, 호흡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반 시진 넘는 시간 동안, 아무도 자녕궁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후의 목숨을 구한 뒤, 여완완이 갑자기 태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영종오가 화들짝 놀라면서 뒤돌아서면서 다그쳤다.

“뭐 하는 것이냐.”

“가사 상태로 위장해야죠. 태후는 영설 공주와 달리 무공이 없어서, 제가 가사 상태를 만들다가 태후가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고요. 무공이 없는 사람에게 맹약을 쓸 수 없으니, 성화교 밀술을 써야죠.”

여완완이 대답했다.

“태후마마를 바로 구해서 나가지 않고?”

“황궁에 방계의 대종사가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요? 우리가 태후와 영설 공주를 밖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꾀를 써서 몰래 도망치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가짜 영덕제를 천국으로 끌어올린 뒤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가장 고통스러울 거고, 우리 부군에게도 제일 좋은 일일 테니까요.”

여완완이 침통을 꺼내는데, 그 안에는 머리카락처럼 얇은 침들이 놓여 있었다. 얇은 침에는 각각 다른 종류의 약이 발라져 있었다.

슉, 슉, 슉, 슉.

여완완이 수십 개 침을 태후의 온몸에 꽂기 시작했다. 태후의 심장, 격막, 각 근맥에도 침을 놓았고, 심지어 그중 침 3개는 태후의 머리에 직접 찔렀다.

은침은 태후의 호흡, 심장박동, 맥박을 멈추게 했고, 태후는 다시 호흡이 없고 맥박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여완완이 다시 태후의 옷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영종오가 물었다.

“이렇게 하면 허점이 전혀 없는 건가?”

“허점이 없을 리가 있겠어요? 정말로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부군밖에 없어요. 가사 상태라면 허점이 없을 리가 없죠. 하지만 영덕제는 지금 마음이 조급해서 태후와 영설 공주의 시신을 다시 살필 겨를이 없을 거예요. 아마 한시라도 빨리 이 둘을 땅에 묻으려고 할걸요.”

영덕제는 자신이 태후를 직접 죽였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방계 고수가 됐든, 두회가 됐든, 영덕제는 무조건 잡아떼면서 태후가 자결했다고 우길 작정이었다.

여완완이 특수한 향료를 꺼내서 태후의 몸에 바르자, 태후의 몸에서 특이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바로 멸혼향의 냄새와 똑같았다.

영종오가 정신력을 집중한 뒤 태후에게 바짝 다가서야만 그녀에게 생기가 남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태후에게 남은 생기는 무척이나 미약해서, 누구도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믿지 않을 정도였다.

영종오가 말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 만에 하나 방계 고수가 태후마마께서 죽지 않으셨다는 걸 눈치채면, 그들은 바로 태후마마를 죽일 것이야. 그럼 우리가 여태 한 게 다 무용지물이 되지 않으냐.”

“대종사께선 이미 허점을 알고 계시니까 불안한 거예요.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어요. 그리고 제 신분은 지금 태후의 시중을 드는 궁녀예요. 이런 가면은 대종사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성화교도 있다고요. 제가 항시 태후를 지켜보고 있을게요. 하관할 때까지요.”

여완완이 영종오에게 눈짓했다.

“이제 가야 해요.”

두 사람은 곧 자취도 없이 자녕궁에서 사라졌다.

태후는 홀로 조용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진짜로 죽은 사람처럼 호흡과 맥박이 없었고, 몸에서 은은하게 멸혼향이 났다.

반 시진 뒤, 여완완과 네 명의 궁녀가 자녕궁에 들어왔다. 궁녀들이 당직을 바꿀 때가 된 것이다.

“시간이 됐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태후마마를 한 번 확인하러 가야겠구나.”

궁녀 중 우두머리인 소유가 말했다.

궁녀들이 조심스럽게 자녕궁 안으로 들어가서는 침상에 조용히 누워있는 태후를 바라보았다.

궁녀 한 명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푹 주무시고 계시네.”

궁녀 소충으로 가장한 여완완이 말했다.

“음? 이게 무슨 향이지? 엄청 향기로운데.”

소충으로 위장한 여완완은 매혹적인 기운을 숨긴 채 지극히 평범한 궁녀가 되어 있었다. 소충이라는 궁녀는 원래도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인지라, 여완완이 위장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소유는 황궁에서의 경험이 많은지라, 이 향기가 멸혼향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소유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잰걸음으로 태후에게 다가가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호흡이 없어!’

소유는 긴장한 기색으로 태후의 목 쪽 맥박을 확인했다.

‘맥박도 없잖아?’

침상 머리맡에는 뚜껑이 열려있지만, 내용물이 완전히 비지 않은 멸혼향 병이 있었고, 태후의 유지도 병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유가 소스라치게 놀라 바닥에 주저앉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자녕궁을 뛰쳐나갔다.

일각 뒤, 황제가 자녕궁으로 달려왔다.

황제는 그 짧은 몇백 미터 거리에서 몇 번이나 넘어졌고, 환관과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자녕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몇 명의 태의가 태후를 둘러싸고서 그녀의 맥을 잡아보고, 눈을 뒤집어 보고, 호흡을 확인했다.

결국 태의들은 태후가 승하했다고 말하면서 멸혼향을 마시고 자결했다고 결론지었다.

영덕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고, 토하는 시늉을 몇 번이나 하더니 기어코 피를 토해냈다.

“폐하, 이것은 태후마마의 유지입니다.”

영덕제가 유서를 받아들었다.

유서에는 두변이 반역을 일으키고, 영설이 죽은 소식을 접한 뒤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선황의 뒤를 따라갔다고 적혀 있었다.

푸악!

영덕제가 또 한 번 피를 토한 뒤 혼절해버렸다.

혼절하기 직전, 황제가 격노하면서 외쳤다.

“두변! 짐이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여봐라. 짐의 황명이다. 진서왕 두변의 모든 작위를 빼앗고, 서민으로 좌천시켜라. 두변은 반역을 일으킨 죄인이다. 천하의 정의로운 사람들은 짐의 명을 받아 두변을 토벌하라!”

‘드디어 때가 됐다!’

영덕제는 몹시 흥분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오랜 시간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두변을 지하 18층 지옥까지 보내버리고, 만인에게 그가 난신적자라는 낙인을 찍는 날 말이다.

태후의 죽음 덕분에 마침내 영덕제와 두변의 결전이 찾아오게 되었다.

“문무백관과 경성 백성들은 태후와 영설 공주를 위해 사흘의 애도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태후와 영설 장공주를 황릉에 묻는다.”

영덕제의 말에 환관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여완완은 자기 손으로 연출한 이 연극이 곧 절정에 달할 거라는 생각에 신이 났다.

영덕제는 곧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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