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장: 폐위하라 一
태후가 ‘부활’하고 관에서 일어나 앉는 그 순간, 거의 평온하고 고요한 호수에 거대한 돌덩이가 던져진 것처럼 큰 파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뒤이어 태후가 한 말은 거의 핵폭탄을 터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세계에는 핵폭탄이란 게 없지만 말이다.
태후의 말이 가진 살상력은 핵폭탄 그 자체여서, 일순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경악하고 말았다.
태후가 입을 열자마자 했던 첫 마디, 황제가 모친을 시해했다는 말만으로도 천지가 뒤흔들릴 말이었다.
게다가 영덕제가 선황의 친자가 아니라, 북명검파 종주 영도현의 사생아라니.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덕제는 조정의 신하들이 보기에 사실 꽤 괜찮은 황제였다. 선황의 인자함은 그대로지만, 선황처럼 제멋대로가 아니었다. 그리고 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피를 토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영덕제가 두변에게 했던 건, 군주가 신하에게 해줄 수 있는 예우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런 만큼 영덕제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아들이자 인자한 군주라 할 만했다.
그런데 태후가 황제가 모친을 시해했다고 말하니, 누가 태후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태후의 말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태후가 영덕제의 친모이고, 태후가 얼마나 영덕제를 아끼는지는 만인이 알고 있는 만큼, 그런 태후가 영덕제를 모함할 리 있나.
영덕제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고, 귀에서 웅웅 거리는 이명이 들려왔다. 발밑이 거세게 흔들리면서 온몸이 제멋대로 휘청였고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영덕제는 충격에 빠져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건 재앙이야. 파멸적인 재앙이야!’
이 느낌은 이원이 배신했고, 심양전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똑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끔찍했다.
심양전에서 패배했을 때 잃은 것은 영덕제 자신의 위신이었고, 대녕 제국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태후가 파괴하려는 건 자신의 명예와 제위였다.
영덕제는 가슴이 욱신욱신 끓어오르면서,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며칠 내내 했던 각혈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피를 토해선 안 돼!
지금 피를 토하면, 태후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 돼!
영덕제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피를 애써 삼켜냈다.
하지만 또 피가 차오르자,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조금씩 피를 삼켰다.
이미 고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어서, 입안에서 차오른 피가 입가에서 새어 나오려고 했다.
영덕제는 태후가 더 말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바로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 심지어 태후가 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희대의 혼군이라는 걸 밝히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또 한 번 모친을 시해하는 꼴이 된다.
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영덕제가 두회에게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냈지만, 두회는 황제를 쳐다보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피를 애써 삼키고 있느라, 영덕제는 말 한마디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니 태후가 폭로하는 걸 마냥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두회는 태후를 제지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집중했다.
태후가 황제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두변의 명성을 더욱 망치기 위해서 친누이인 영설을 암살하다니. 그리고 영설이 회임을 한 터라, 두변 때문에 황가에서 두 생명을 잃은 것이라고 했지? 하지만 네가 영설이 회임하지 못하도록 영설의 분향에 독을 쓴 터라, 영설은 한동안 회임하지 못한다.
네놈은 영종오의 사생아지, 선황의 친자식이 아니다. 이 일로 양강 총독 두회가 너를 협박했고, 너를 금수만도 못한 놈으로 만들었다. 너는 두변을 자극해서 그가 역모를 일으키길 바랐고, 일부러 그를 난신적자로 만들었다. 두변이 요동 지역을 전부 내주고, 북방의 병권도 내주는 대가로 사천과 호남을 달라고 거래를 제안했다. 두변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두 성을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동방 연합 왕국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변은 네가 이미 동방 연합 왕국과 작당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너는 두변의 명성을 바닥을 치게 한 뒤에, 공공연히 방계에게 출병하여 두변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다.
제국의 남방은 이미 방계의 손아귀에 있고, 동방 연합 왕국에게 넘어갔다. 네놈은 단지 동방 연합 왕국의 힘을 빌려서 두변을 죽이려는 게야.
네가 이러는 것은 늑대를 집으로 들이는 짓이고, 대녕 제국의 강산을 망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무능하고 정치도 잘 모르는 연약한 여인이지만, 너와 영설에게 최선을 다했다. 내 마음은 이 천하를 품을 수 없지만, 너희 둘만큼은 품을 수 있었다. 원래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비밀을 지키려고 했다. 너는 네 누이 영설을 죽여선 안 됐고, 그 죄를 두변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 했다.
네가 영설을 죽였다는 걸 내가 알아채자, 너는 어미인 나도 네 황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서 네 손으로 나를 죽였지. 네놈은 네 손으로 멸혼향 독이 든 탕약을 내 입에 가져다 부었다. 다만, 너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내가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너는 도둑이 제 발 저려서 태의들이 내가 죽었다고 결론을 짓자마자 그 누구도 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게 되었구나.
금수만도 못한 놈 주제에 어찌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느냐?
네가 선황의 친혈육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녕 제국 황실의 후예이니, 네가 황제가 되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너 같은 짐승이 어떻게 천하를 군림할 수 있겠느냐?
애가는 대녕 제국의 태후다. 애가는 한 번도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오늘 대신들도 모두 이 자리에 있는 김에, 태후의 지의를 내리겠노라.
영덕제는 선황의 친혈육이 아니다. 그는 모친과 누이를 시해하였고, 짐승보다도 못한 놈이다. 애가는 선조들의 무덤 앞에서 정식으로 그의 황위를 폐하노라.
애가가 명령한다. 진서왕 두변, 진남공 송결, 동창 대도독 이문회, 내각 수보 고순창을 고명(顧命) 대신으로 임명하고, 그들의 결정에 따라 황실 혈맥에서 현능한 자를 골라 대녕 제국의 새로운 황제를 세우도록 하라.”
태후의 말은 빨랐지만 말투는 명료해서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경성의 공훈 귀족들은 태후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지금 이곳에는 대신들과 공훈 귀족들 외에도 경성의 수천 명의 백성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 영덕제의 수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을 끔찍이 아낀다는 명성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고, 두변이 얼마나 악독한 역적인지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수천 백성이 태후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똑똑히 들어버렸다.
장장 몇 분에 걸쳐 영덕제는 피를 삼켜냈다. 그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고, 다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영덕제는 순식간에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첫 번째 방법은 당장 무릎을 꿇고 크게 기뻐하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태후가 죽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외치면서 효자 연기를 계속하는 것. 하지만 이 방법은 쓸모가 없다. 태후가 이미 황제와 대립했으니, 아무리 효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상황을 걷잡을 수 없다.
두 번째 방법은 무릎을 꿇고 통곡하는 것이다. 태후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처럼, 두변이 그녀에게 사악한 술수를 쓴 것처럼. 귀신에 씌지 않는 한,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관에서 일어난 여인이 태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다. 영덕제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영덕제가 태후를 가리키면서 격노했다.
“너는 누구냐? 모후의 시신을 어디에 숨긴 것이냐. 짐의 모후를 되돌려놓거라. 당장!
어서 네 정체를 말하라. 두변이 보낸 요괴이냐? 왜 짐의 모후인 척하는 게냐. 모후의 시신은 어디 있느냐. 짐의 모후를 돌려놓아라! 모후!”
영덕제가 가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자리에 있던 관리들의 얼굴에는 아직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수천 명 백성은 경악했고 영덕제의 연기에 압도되었으며, 관에서 일어난 태후가 정말 가짜인가 보다 생각했다.
태후는 자기 아들이 이렇게 파렴치하고 뻔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태후가 큰소리로 외쳤다.
“내각 수보 고순창, 예부시랑 오삼석. 앞으로 나와서 애가가 진짜 태후인지 아닌지를 판별해보시오.”
내각 대신들이 태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실 대신들은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은 누가 봐도 틀림없는 진짜 태후였다.
이수 가죽 가면이라는 게 있지만, 결국엔 가면이기에 허점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여완완이 이수 가죽 가면을 써서 눈에 띄지 않는 궁녀로 변장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궁녀 따위에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하지만 태후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여인인지라,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그녀가 가짜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대신들의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의 외모, 몸매, 기질, 어조, 분위기 등 어딜 봐도 모두 황태후였다.
태후가 말했다.
“고순창, 애가가 말한 지의를 듣지 못하였소? 당장 영덕제의 황위를 폐하고, 진서왕 두변, 진남공 송결, 내각 수보 고순창, 사례감 병필 태감, 동창 대도독 이문회 네 명을 고명대신으로 임명하고, 황실 후손에서 현명한 자를 골라 황위를 잇도록 하시오.”
황태후가 지명한 네 명의 고명대신 중,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고순창 한 사람뿐이었다.
고순창이 대열 밖으로 나온 뒤, 황태후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태후마마, 영덕 천자께서 선황의 혈맥이 아니라 영도현의 자식이라고 하셨사온데, 증거가 있으신지요?”
고순창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물었다.
“선황이나 애가나 이중턱이 없지만, 영덕과 영도현은 이중턱이 있소. 여기 자리에 있는 대신 중에서도 이중턱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고순창 대인께서도 이중턱이로군. 다들 잘 생각해보시오. 이중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부모 중 한 분이 이중턱일 것이오.”
황태후의 말에 대신들이 웅성거리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이중턱 유전 논리가 아직 성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자리에 있던 이중턱 대신들이 곰곰이 되새겨보니, 황태후의 말대로 자신의 부모 중 한 명이 무조건 이중턱이었다.
그중 예외인 대신들도 있긴 했는데, 그들은 바로 다른 일을 떠올렸다. 그건 자기가 모친의 친아들이 아니라 관저 내 어느 시녀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중턱 유전설이 권위가 있는 논리는 아니었지만, 사실이긴 했다.
자리에 있던 수십 명 이중턱 대신 중 황태후의 논리에 어긋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태후가 황제의 친모인데, 영덕 천자가 선황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 가짜일 리가 있을까.
태후가 말했다.
“고순창 대인, 애가의 지의를 받들겠소?”
내각 수보 고순창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예부시랑 오삼석은 고명대신으로 지명되지 않았지만, 고순창을 따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영덕제는 침착함을 되찾고 냉랭한 눈빛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후가 말했다.
“자리에 계신 대신들은 모두 한때 정리될 대상이었소. 방계 역적이 조당을 관장할 때, 정직한 충신들을 조당 밖으로 내쫓았지. 그때 대신들은 감옥에 투옥되거나 고향으로 쫓겨났소. 그런데 진서왕 두변이 선황과 함께 연합하여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뒤에야 방계 세력을 경성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소. 그들은 제국의 남방까지 물러났고, 그 때문에 우리 대녕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소. 그 덕분에 정직한 그대들이 드디어 조정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대들은 선황께서 일일이 선발한 충신들이오.”
듣고 보면 참 웃긴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