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507화 (507/648)

507장: 피를 토하는 진남공

얼마 지나지 않아 영덕제가 영도현의 사생아이고, 모친을 시해한 대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이 장선조의 고향 하남 여녕부에 전해진 순간, 장선조는 즉시 온 가족을 데리고 하남을 떠났다.

하남은 영덕 황제의 통치를 받는 북방이기 때문이고, 대녕 제국이 계속해서 빛을 발하길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장선조는 두변이 있는 진서성으로 가지 않고 계림부로 갔다.

그가 서남으로 갔다는 소식이 퍼지자, 남하한 관리들은 곧장 장선조의 곁으로 몰려들었고, 장선조는 곧 남하한 관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장선조는 장양명 대사의 사형이자 가장 친한 벗인지라, 두변은 장선조 노대인을 존경하기도 했다.

관리들만 남하하는 게 아니라, 여러 번왕들, 그리고 번왕의 자제들까지 서남으로 내려왔다.

조왕, 영왕, 진왕, 요왕 등, 많은 번왕과 번왕의 자제들이 두변을 찾아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새로운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촉왕 세자께서 주군을 뵈러 왔습니다.”

계표표가 밖에서 통보하자 두변은 흠칫 놀랐다.

촉왕은 선황의 친형이지만, 성격이 부드럽고 범속한 탓에 별로 존재감이 없는 번왕이었다.

두변이 검각후와 심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직위상이로든 위치상으로든 촉왕이 제일 좋은 중재자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에 두변이 사천과 호남을 점령했을 때, 원칙대로라면 촉왕이 조정을 대표해서 두변을 질책해야 했지만, 그때도 촉왕은 성도의 왕부에서 문을 닫아걸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살았다.

두변은 자신의 군대가 성도를 점령한 뒤에도 직접 촉왕을 찾아가지 않았고, 촉왕도 두변을 찾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꼭 서로 범접하지 않는 우물물과 강물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촉왕 세자가 두변을 먼저 찾아온 것이다.

“영충삭, 진서왕 전하를 뵙습니다.”

촉왕 세자가 허리를 숙여서 예를 올렸다.

두변이 살짝 놀랐다.

영충삭의 얼굴은 준수한 편이 아니었고, 옷차림도 화려하거나 부귀한 편이 아니라 평범한 흰 장포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외모와 옷차림에서도 고귀한 기개가 돋보였고, 세속을 초월한 용자(龍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두변이 답례했다.

“촉왕 세자를 뵙습니다.”

생김새나 기개를 보았을 때, 촉왕 세자는 꽤 경쟁력이 있는 후보였고, 선황의 혈맥과 무척 가까운 선황의 친조카였다.

촉왕 세자는 두변과 함께 시가 얘기를 하다가 무도 얘기까지 넘어갔다. 그는 예상외로 준종사급 무도 수준을 갖춘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황족 중에서도 무도 수준이 아주 우수하다 할 만했다.

또 이어서 촉왕 세자는 두변과 함께 정치와 신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두변은 그가 말하는 신법에 대한 견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촉왕 세자는 신법에 대해 깊이, 자세히 알고 있었고, 정확하고 투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둘은 초면인데도 마음이 잘 맞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진서왕, 진서왕이 사천과 호남에 출병한다고 했을 때, 온 천하 사람이 다 진서왕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라고, 진서왕은 난신적자라고 욕했지요. 하지만 저는 진서왕께서 영역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방 연합 왕국과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함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천과 호남에는 진서왕께서 꼭 얻어야 할 게 있다는 것을요.”

영충삭의 말에 두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촉왕 세자가 생각보다 너무 똑똑한데?’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시대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요. 진서왕도 보다시피 제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거칩니다. 좀 고생을 한 얼굴이죠.”

‘그러고 보니 촉왕 세자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 법한데, 어째서 피부가 까맣고 거친 거지?’

촉왕 세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바닷바람 때문입니다. 한때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성화교 세계에 간 적도 있고, 페르시아 왕국에서도 반년 정도 살았습니다. 서방 성로마 연맹에도 갔었고, 유경 왕국에서도 몇 개월 머물렀죠. 그곳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번화하고 돈에 취하는 곳이더군요.”

두변은 번왕의 세자가 나름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점에 놀랐다. 하지만 조정의 지의에 따르면, 번왕이나 번왕의 자제들은 조정의 봉지를 떠날 순 없었다.

촉왕 세자는 두변과 한참 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눈 뒤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촉왕 세자 영충삭의 명성은 다른 번왕 세자들의 명성을 순식간에 눌러버렸다.

남하한 대신들의 지도자인 장선조도 촉왕 세자에게 군주의 재량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선조가 이 뜻을 밝히자, 계림부로 몰려온 관리들도 촉왕 세자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일제히 냈다.

그 뒤로 두변을 설득하러 오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나라에는 군주가 하루라도 없어선 안 된다며, 어서 새로운 군주를 모셔야 한다며, 촉왕 세자 영충삭이 용감하고, 지혜롭고, 인자하고, 선황과 가장 가까운 혈맥이니 좋은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변은 그들의 말에 아무 말도 대꾸하지 않았다.

두변은 자신의 부인 영설 공주를 새로운 황제로 세우고 싶었지만, 자기 입으로 말하긴 뭐하니 다른 고명대신인 진남공 송결이 의견을 내주길 바랐다.

절대 고수인 이도진과 여완완이 영설 공주를 호송해서 남하했고, 세 사람은 곧 안남 왕국으로 향했다.

안남 왕국, 순화부.

두변이 사천과 호남에 출병했을 때, 옥진 군주는 진남 공작부의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송결에게 갔고, 송결은 두변과 할포단의를 했다.

두변은 영덕제가 선황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알고, 가장 먼저 혈관음을 안남 왕국으로 보내서 송결을 만나게 했다.

송결은 두변이 영덕제를 모함하는 줄 알고 격노했고, 혈관음에게 두변과 결렬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는 와중에 영덕제가 두변을 난신적자라고 공포하면서, 그를 토벌하라는 성지를 내렸다.

진남공 송결도 이 성지를 받게 되었지만, 안남 왕국에서 완씨 반왕과 전투를 벌이느라 토벌하러 갈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당장 두변을 토벌하러 갈 수는 없지만,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 두변을 토벌하라는 격문을 내서 황제의 성지에 응답했다.

송결은 안남 국왕에게 당장 변경 지역을 봉쇄하고, 두변과의 모든 경제적 교류를 끊으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송결이 경성에 격문을 보내기도 전에, 북쪽에서 놀라운 소식들이 연달아 도착했다.

영덕제가 선황의 친혈육이 아니라 영도현의 사생아라는 소식과 영덕제가 모친을 시해하는 천륜 대죄를 저질렀다는 소식도 전해졌지만, 그는 이게 다 터무니없는 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송결은 소식들을 절대로 믿지 않았고, 이런 터무니 없는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바로 두변이라고 생각했다.

송결은 다시 혈관음을 찾아와서 두변과 절연하라고 단호하게 강요했다.

혈관음이 두변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하자, 송결은 아예 혈관음을 내쫓고 의부와 의녀의 연을 끊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영설 공주가 안남 왕국에 도착했다.

송결은 영설 공주의 입에서 모든 진실을 듣게 되었다.

“영덕 위제가 부군 두변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 저를 암살했어요. 모후께서 격노하시면서 영덕 위제에게 출생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협박하자, 영덕 위제는 절대로 저질러선 안 될 천륜대죄를 저질렀죠.”

영설 공주는 영덕제에 관한 진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영설 공주가 말했다.

“모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지의를 내리셨습니다. 영덕 위제를 폐하고, 두변, 송결, 고순창, 이문회를 고명대신으로 임명한 뒤, 이들이 고른 자로 새로운 황제를 모시라고요.”

진남공 송결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고, 여전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든 게 다 진짜였어? 두변이 말한 게 다 사실이었다고?

만약 이게 다 진짜라면, 내 체면은 어찌해야 하나.

덕망과 명망이 높은 공작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는데!

영덕제의 성지에 응답하기 위해서 두변에 대한 토벌 격문까지 썼는데!

내가 충성을 바쳤던 황제가 이런 사람이었다고? 이런 짐승보다도 못한 놈이었다고?

“말, 말도 안 됩니다. 절대로요.”

송결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남 왕국의 왕후 영신 공주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송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진남공, 모든 게 다 사실입니다. 영덕 위제가 가장 최근에 내린 성지가 벌써 온 천하에 전해졌어요. 영덕 위제가 안남 왕국에도 국서를 전했습니다. 국왕 폐하께 진남공을 체포하고, 경성으로 압송하라고요. 이런 난신적자를 안남 왕국에 남겨둬선 안 된다고, 성지를 거역하면 뒷감당은 알아서 하라고요.”

영신 공주가 대녕 제국에서 온 국서를 송결에게 건넸다.

송결이 국서를 펼쳤다.

‘진남공 송결이 두변과 공모하여 대녕 제국을 뒤엎으려는 대죄를 저질렀다. 송결의 모든 작위와 관직을 박탈하고, 동창, 여경사, 대리시는 연합하여 송결을 체포하라.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즉살해도 좋다. 안남 국왕은 즉시 송결 등을 체포하여 대녕 제국 여경사가 도착하길 기다려라.’

송결은 성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성지는 영덕 위제에 대한 빼도 박도 못 할 증거였고, 송결은 자신이 무언가를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남공 송결은 온몸이 떨리면서 눈앞이 자꾸만 하얘졌다. 가슴속에서 피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이 내가 충성을 바치던 황제라고?

내가 눈뜬장님이었구나.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을 못 알아봤다니.

송결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입을 크게 벌리고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어금니를 너무 세게 깨물어서 입 안에서 피가 나면서 혀끝으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푸악!

결국 송결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를 토하고 말았다.

“아아, 영덕 위제! 나와 네놈은 이 세계에 공존할 수 없다.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송결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아서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영설 공주가 말했다.

“부군께서 진남공을 계림부로 초대하여 새로운 군주에 대해 논의하자고 하세요. 제국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선 안 되니까요.”

당일 밤, 영설 공주는 북상하여 다시 대녕 제국의 서남으로 돌아갔다.

하루 뒤, 진남공 송결은 군무를 인수인계한 뒤에 북상했다.

군영에서 그를 배웅하던 사람들은 송결의 왼쪽 눈에 왜 갑자기 안대가 감겨있는 건지 영문을 몰랐다.

송결은 아직 대녕 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남하한 관리들의 지도자인 장선조가 수백 명에 이르는 관리들을 이끌고 송결을 환영했다.

장선조는 송결을 한 정각으로 안내해서 반 시진 정도 밀담을 나눴다.

송결은 장선조와 작별한 뒤, 계속해서 북상했다.

두변은 계림부 성문 밖까지 나가서 직접 진남공 송결을 맞이했고, 광서 순무 관아에 들어가서 대화를 시작했다.

진남공 송결이 깊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진서왕. 내가 잘못했소. 전에 영덕 위제가 선황의 핏줄이 아니라 영도현의 사생아라고 알려줬었는데, 나는 진서왕이 다른 마음을 품은 줄 알았소. 그때 당신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악담을 퍼부었소. 위제가 당신을 토벌하라는 성지를 내렸을 때, 당신에 대한 격문도 썼었소. 정말 내가 눈뜬장님이었소.”

두변이 물었다.

“진남공의 왼쪽 눈은 왜 그렇습니까? 전투 중에 다치신 겁니까?”

송결의 왼쪽 눈에 검은 천으로 만든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영덕 위제의 진상을 몰랐으니, 눈이 있어도 없는 것과도 같아서 그렇지. 내가 직접 왼쪽 눈알을 파냈소.”

송결의 대답에 두변은 흠칫 놀랐다.

송결이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하긴 했지만, 두변은 송결을 위로하지 않았고 그런 말을 해서 뭐하냐는 등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파낸 눈알을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송결이 자존심이 세고 의지가 너무 강한 사람이라 타인의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을 듯했다.

“황태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네 명의 고명대신을 임명했다고 들었소. 이젠 우리 둘만 남았지만 말이오. 진서왕이 보기에는 새로운 군주로 누가 적당할 것 같소? 일단 내 의견을 먼저 얘기하자면, 촉왕 세자 영충삭이 용감하고, 포부가 있고, 지혜롭다고 생각하오. 여러 방면에 박식하기도 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니, 우리 대녕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제격이라 생각하오.”

송결이 말했다.

“영설 공주가 선황의 유일한 혈맥이니, 영설 공주를 황제로 모셔야 합니다.”

두변의 말에 송결은 경악하고 말았다.

두변이 미친 건가? 영설 공주를 새로운 황제로 모시자고? 여인을 황제로 모신다니, 음양이 뒤바뀌고 건곤이 뒤엎어지는 이야기를 하는군.

“진서왕,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라, 대녕 제국의 황제를 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오. 몇천 년 이래 여인이 황제가 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소. 게다가 영설 공주는 당신의 부인인데, 영설 공주를 황제로 세우면 천하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두 사람은 결국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불쾌한 분위기 속에서 작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