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장: 역사적인 대결전
대전 시작 열흘 전.
전 여진 제국의 숙친왕 완안영도가 두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변이 물었다.
“완안영도, 지금 수중에 병사가 얼마나 있지?”
완안영도가 대답했다.
“8만 병사가 있습니다.”
완안영도의 8만 병사는 투항한 4만 여진 무사, 2만 몽골 무사, 그리고 여진 제국의 2만 한군 정예병으로 이뤄져 있었다.
두변이 물었다.
“당시에 내가 원했던 건 여진 포로들을 전부 죽이는 거였지만, 당신이 내게 무릎을 꿇고 이들의 투항을 받아달라고 부탁했지.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도 좋다고, 설령 그게 실험 대상이 되는 거라도, 총알받이가 되는 거라도 상관없다고 했고.”
“맞습니다.”
완안영도가 깔끔하게 인정했다.
“이제 당신들을 총알받이로 쓰겠다. 두강과 원천조의 33만 대군이 곧 오주성에 도착할 것이니, 8만 병사를 이끌고 오주성으로 가라.”
두변의 말에 완안영도의 얼굴에 경련이 살짝 일었다.
“주군, 소장이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로는 절대로 그들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필요하다. 이 8만 명의 유일한 쓰임새는 바로 나를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이다.”
두변이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정말로 시간이었다.
사공엽과 주술사 국사와 사제들이 미친 듯이 정석 마포를 개조하고 있다.
두변이 계산해보니, 마포가 최소 300대는 있어야 동방 연합 왕국의 화포 군단을 압살할 수 있었다.
사공엽과 주술사 국사 군단은 밤낮없이 개조에 몰두해 있었다. 그들은 매일 공장에 갇혀 있었고, 하루에 20시간 넘게 일을 했다. 밥을 먹고, 자고, 씻는 시간이 4시간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중 과로로 쓰러지거나 과로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마포 300대를 개조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완안영도가 말했다.
“주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신지요?”
“너희가 오주성에서 적군의 발목을 열흘 동안 붙잡고 있어야 한다.”
“고이민도 저와 함께 가는 겁니까?”
완안영도가 물었다.
고이민은 전 여진 제국의 군왕으로, 그 문무를 겸비했지만 변덕스럽던 여진 귀족이었다.
“아니, 고이민은 동행하지 않는다.”
두변이 대답했다.
“주군,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신, 곧장 가도록 하겠습니다.”
두변의 제2군단, 성화 군단의 주장군이 두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는 성화 군단 8만 병력을 이끌고 염주성을 지켜라.
너희들이 상대해야 할 대군은 막한 여왕과 소목지가 이끈 33만 동방 연합대군이다. 이 대군의 진짜 주장군은 동방 연합 왕국 상장 방천명이다. 성화 군단 8만 명으로는 절대로 그들을 막을 수 없을 테니,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끌어주길 바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33만 대군을 염주성에서 열흘 동안 붙잡아 두어라. 알겠나?”
“명 받들겠습니다.”
성화 군단장 염렬(炎烈)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1군단 절세 지하성 군단이 두변에게 충효를 바치는 이유는 그가 대성주이기 때문이었다.
제2군단 성화 군단이 두변을 따르는 이유는 그가 정말로 화신의 환생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성화 군단은 모든 군단 중 두변을 가장 열렬히 지지하고, 가장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단이었다.
이들은 두변의 어떤 명령이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했고, 설령 그게 불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그의 명령을 따랐다.
“섭정왕, 나도 갑니다.”
한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남 왕국의 영신 왕후였다.
두변이 놀라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두변이 성화 군단에게 염주부를 지키라고 한 건, 구사일생의 임무이며, 희생으로 시간을 맞바꾸는 일이었다.
“순화부에 있을 때부터 부군의 뒤를 따라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부군이 내게 아이들을 부탁했고, 안남 왕국의 미래도 맡겼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안전하니, 내가 전사하더라도 별 상관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우리 안남 왕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두변, 난 이미 결심했어요.”
두변이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옥진 군주가 갑옷을 입고 두변을 찾아왔다.
“두변, 나도 염주부를 지키러 가겠습니다.”
두변이 난색을 표했다.
“그들을 막을 순 없을 겁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 시간을 벌 순 있어요.”
옥진 군주가 핵심을 짚었다. 두변에겐 최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부친은 영덕 위제를 잘못 보았다는 이유로 왼쪽 눈을 파냈어요. 그리고 영창제까지 잘못 보아서 결국 목숨을 잃었죠. 난 아직도 왜 영설이 여인의 몸으로 황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언제나 옳다는 걸 믿어요. 전에 내가 저지른 잘못을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갈 수 없어요. 나도 내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요.”
옥진 군주의 진지한 말에 두변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만회한 거 아닌가요? 다 만회한 겁니다.”
“몸으로 만회했다는 뜻이에요? 그건 만회가 아니라, 나 좋으라고 한 거죠. 그건 만회라고 할 수 없어요.”
옥진 군주가 말했다.
이때, 계청주가 나타나서 말했다.
“왕야, 저도 가겠습니다.”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계후야께서 이끄는 제5군단은 아직 제대로 전장에서 싸울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계청주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혼자 가겠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제가 영신 왕후와 옥진 왕비를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선황의 은혜를 받았고, 그 뒤로 진무제의 은혜를 받아 계성후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이 은혜에 보답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양심도 없는 놈인 소목지를 만나게 될 테니, 꼭 가고 싶습니다.”
소목지!
계청주 사부의 손자이자, 아주 어렸을 때 계표표와 정혼했던 사내.
2년 전에 소목지가 돌연 계청주 앞에 나타났을 때, 계청주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계표표와 혼례를 올려주려고 했다.
그때부터 계청주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은 소목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영설 공주를 황제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계청주는 지난 일을 계기로 여인 황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과거에 그는 계표표가 여인이라는 이유로 대신 소목지를 후계자로 삼았었다. 하지만 참혹한 결과를 맛봐야 했고, 결국 성별은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결국엔 계청주, 영신 왕후, 옥진, 염렬 네 명이 8만 성화 군단을 이끌고 염주성으로 들어갔고, 여황, 완안영도가 8만 대군을 이끌고 오주성으로 진입했다.
두 군단은 오주와 염주가 결국엔 함락할 걸 알지만, 두변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군말 없이 각자의 성을 지키기로 했다.
계청주, 옥진, 영신 왕후까지 자발적으로 나서자, 여씨 가문의 주모인 여황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여 직접 오주 전장에 나섰다.
두변에게 시간은 금일뿐만 아니라, 시간은 생명이고 승리였다.
쾅, 쾅, 쾅, 쾅.
수백 대의 화포가 동시에 발포되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수백 발의 탄환이 오주 성벽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성벽에 불길이 일었다. 오주성 전체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십여 대의 초특급 중포가 발포되었고, 일순간 천지의 색깔이 변했다.
거대한 포탄이 있는 힘껏 오주 성벽에 떨어지는 순간, 무척이나 견고했던 성벽이 꼭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광!
성벽 한 구간이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수많은 돌덩이를 사방으로 쏘아내면서 무너져내렸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성벽에 거대한 구멍이 났고, 초특급 중포가 발포되자마자 성벽을 찢어버렸다.
오주 성벽은 13미터 높이에 8미터 두께로 무척 견고했다.
이 광경을 본 두강과 원천조는 우월감에 흠뻑 취했다.
이게 바로 산을 밀고, 바다를 뒤엎는 힘이로구나!
아무리 기적을 많이 써낸 두변이어도 동방 연합 왕국의 전투력 앞에서는 그저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구나!
“발포하라!”
“발포하라!”
동방 연합 왕국의 화포가 염주성과 오주성에서 미친 듯이 발포되었다.
새로운 전투 방식이었다. 성벽에 구멍 하나 내고서 돌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길을 내는 것처럼, 성벽이 평평해질 때까지 폭파하는 것.
그런 식의 폭파는 상대방의 사기와 자신감까지 밀어버리고 말았다.
콰과과광!
경천동지의 폭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성벽은 큼직한 단위로 무너져 내리고,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다행히도 성 안에 있던 백성들은 일찍이 대피한 터라, 지금 성 안엔 백성이 한 명도 없었다.
완안영도와 여진 군대의 고위 장수 몇 명이 어느 저택의 지하실에 모였다.
이들은 지하실에 있음에도 대지가 떨리는 게 느껴졌고, 천장에서 흙먼지가 끊임없이 우수수 떨어졌다.
“왕야, 이번에 정말로 다 죽는 거 아닙니까? 완전히 전멸하는 것 아니냐고요. 이젠 성벽도, 활과 화살도, 검도 소용없습니다. 저들처럼 화포와 화총으로만 전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만호 한 명이 물었다.
“전쟁의 양상이 이미 바뀌었다. 우리가 시대에 뒤떨어진 건 맞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다.”
완안영도의 말에 만호가 또 물었다.
“왕야, 두변도 이번에 끝장일 겁니다. 차라리 투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변보다 훨씬 더 강한 동방 연합 왕국에 말입니다.”
완안영도는 안색의 변화 없이 검을 뽑아서 만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검으로 그의 심장을 깊이 찔러 넣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완안영도가 투항하자고 한마디 한 만호를 단칼에 죽여버리다니!
하지만 주위에 있던 여진 고위 장수들과 몽골 고위 무사들은 완안영도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완안영도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완안영도의 위신이 가장 높기도 하고, 그가 여진 무사들의 유일한 지도자이기 때문이었다.
“두변은 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게 직접 말했다. 다들 두변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완안영도가 묻자,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산해관 전투와 심양 전투를 겪은 사람들이었다.
두변은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만들고, 또 한 번 만들어 냈다.
완안영도가 말했다.
“이번 대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총알받이다. 두변을 위해 시간을 버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를 증명할 유일한 기회다. 앞으로 우리가 총알받이가 되고 싶다고 해도 두변에겐 우리가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총알받이를 할 자격도 없다면, 차라리 망족이 낫다. 투항하겠다는 건, 여진족을 멸망시키겠다는 것과도 같다. 알겠나!”
콰과과광.
천하 패주인 동방 연합 왕국은 극강의 부를 자랑하는 만큼, 이번 대전에 준비한 포탄의 수량도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이들은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각 성에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동방 연합 왕국은 수백 대 화포로 수십 번의 발포를 한 뒤에야 잠잠해졌다.
양강 총독 두강, 평서 대장군 원천조는 포연이 걷힌 오주성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용호가 걸터앉은 모양이었던 오주성의 성벽이 거의 무너져 내렸고, 꼭 누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두강이 감탄했다.
“세계가 변했소이다. 성벽이 이젠 쓸모가 없어졌군요.”
“두변은 시대에 뒤떨어졌소이다. 그것도 백 년이나요. 이제 돌격하라. 성 안에 있는 병사를 모조리 몰살해라.”
원천조가 명령했다.
화총병이 명령을 듣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칼을 찬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주성 안으로 진입했다.
슉, 슉, 슉, 슉.
이때, 성 안의 여러 저택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시가전(市街戰)이었다.
두변은 완안영도의 8만 병력으로는 두강과 원천조의 33만 대군과 정면 대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8만 명이 성벽에서 정면 전투를 치른다면, 반 시진도 안 돼서 전군이 전멸할 것이고, 동방 연합 왕국의 포탄에 맞아서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적군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완안영도는 가장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광서의 최남단인 염주성에서도 잔인한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염주 성벽도 반 시진의 포화 세례를 맞은 뒤 이미 폐허가 되었다.
막한, 소목지, 방천명이 군대를 성안에 진입시키는 순간, 두변의 성화 군단에게 반격을 당했다.
무수히 많은 병사가 저택 안에, 갱도에 숨어있다가 화살을 쏘았다.
수십 명이 거리 하나를 담당했고, 냉병기로 반격했다.
영신 왕후, 옥진 군주, 계청주도 직접 전장에 나서서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