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장: 교황의 시험 二
두변은 임야소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녀와 함께 생활했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두변은 꼭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전율했다.
어리고 혈기왕성하면서 경망스러웠던 남자는 모든 걸 놓친 뒤에야 끝없이 후회했다.
이 세계에 온 뒤, 두변은 많은 여인을 만났고, 여인 모두가 하나같이 절세가인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들과 연애를 해본 적이 있던가?
아니, 그런 적은 없었다.
혈관음은 두변을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해서 그를 감동케 했다.
계표표는 의리와 우정 때문이었다. 침상 위에서의 뜨거운 시간도 일종의 전투적인 우정이었다.
영설 공주는 황제 폐하의 사혼 덕분이기도 하고, 꿈속 시스템이 그녀와 꼭 혼례를 올려야 한다고 했었다.
예상 선자는 얼떨결에 부인이 되었고.
이도진과 옥진 군주는 더더욱 연애 과정이라는 게 없었다.
모두 좋은 여인들이지만 너무 사랑해서 불안한 감정을 느끼거나 열렬한 구애 과정이 있던 건 아니었다.
두변은 자신이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마음이 없어서였다.
두변의 연애는 몇 년 전에 이미 끝났었다. 임야소라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연애 감정을 모두 쏟아버렸다.
두변은 자신의 눈앞에 앉은 여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여인은 고고하게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있었지만, 조금은 수줍어하고 있었다.
5년 만에 보는 임야소는 어딘가 변해있었다. 그녀도 벌써 28살이 되었고, 성숙함이 어우러진, 여인이 가장 아름다울 시기에 있었다.
그녀는 두변이 못 본 사이에 더욱 아름답고 섹시해졌으며, 그녀 특유의 우아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다.
두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두변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나의 심마(心魔)일까?”
그녀가 홀리듯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대꾸했다.
“내 사랑,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우리 딸을 한번 보고 싶지 않아요? 지금 유치원에 있는데, 곧 집으로 돌아올 거예요.”
두변은 피라미드의 두 번째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짙은 초록색 정석이 내뿜는 서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녹색 빛 사이사이에 특수한 야광석의 달빛 같은 새하얀 빛이 섞여 있었다.
이 제2 관문은 뭘 뜻하는 거지?
심마인가?
아니면 꿈?
아니, 이건 정신 환각이 아니야.
두변은 자신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 모두 이렇게 진실했다.
하지만 임야소는 현대 지구의 사람,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제2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찰칵!
어디선가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작고 왜소한 체구의 여자아이가 가방을 메고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엄마!”
어린 여자아이가 달려오면서 임야소를 불렀다.
임야소가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 두변에게 말했다.
“내 사랑, 얘가 우리 딸아이예요. 벌써 다섯 살이 됐어요.”
두변이 웅크려 앉은 자세로 여자아이와 눈을 맞췄다.
이 아이가 효효라고? 벌써 다섯 살이나 됐어?
키가 다른 아이들보다 좀 작네. 몸도 좀 야윈 것 같고.
하지만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까? 이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오목조목 너무 예뻐.
여자아이의 두 눈은 꼭 보석처럼 커다랗고 반짝였고, 아이의 눈빛은 어딘가 고집스러우면서도 불안함이 어려있었다.
아이는 꼭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보였고, 연약해 보였다.
두변은 아이를 보자마자 마음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두변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아이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저며왔고, 눈시울과 코가 시큰해졌다.
“이리와. 아가야, 아빠가 안아줄게.”
두변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말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두변을 깜빡깜빡 쳐다보았다.
아이는 두변을 잘 모르는 것처럼, 두변이 누군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이 남자는 아이의 기억 속 아빠와 사뭇 달랐다.
아이는 두변의 얼굴과 자기가 기억하는 아빠의 얼굴 특징을 열심히 떠올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드디어 두변을 알아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해맑게 웃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아빠!”
아이가 활짝 웃으면서 두변의 품을 향해 달려왔다.
“아빠! 아빠! 아빠랑 우리 유치원에 갈래요. 친구들한테 효효도 아빠가 있는 거 보여줄래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어요!”
두변은 작고 부드러운 딸을 품에 안으려고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꼭 온 세상을 껴안을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음산해지더니, 방 안의 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임야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효도 그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엄마 임야소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임야소의 밝은 눈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절망 가득한 눈동자로 두변을 바라보았고, 아름답던 얼굴은 혈색이 하나도 없는 창백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임야소의 왼손에 칼이 들려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칼로 자신의 오른 손목을 그었다.
그녀는 칼로 오른 손목을 긋고, 긋고, 또 그었다.
임야소가 두변의 눈앞에서 자살하고 있었다.
“내 사랑, 나 좀 살려줘요.”
“내 사랑,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하하, 내 남편이 죽었네?”
“하하, 남편이 날 버렸어!”
“효효, 우리 아빠 찾으러 갈까?”
임야소가 딸아이의 손을 잡은 채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더니, 효효와 창가에 걸터앉았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한 자세였다.
“안 돼!”
두변은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아서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앞으로 달려가서 임야소를 말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두 다리를 움직여도 창가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두변이 달리면 달릴수록 임야소와 딸이 있는 창가와는 더 멀어지고 있었다.
“효효, 우리 효효 아빠 찾으러 갈까?”
“히히, 내 남편이 날 버렸거든!”
임야소가 두변을 향해 손짓하더니, 딸아이의 손을 잡고 십몇 층 높이의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두변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안 돼. 안 돼! 너 매마, 매마지? 매마인 거 다 알아. 너 매마잖아.
당장 멈춰! 매마 네놈이 꾸며낸 거 다 안다고!”
두변의 눈앞에 보이던 모든 게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생생하게 보이던 임야소도, 사랑스러운 두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매마 한 마리가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두변이 달려가서 매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두변이 벤 건 아무것도 아닌 허공이었다.
매마의 형상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조용히 두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매마의 실체가 아니야!
두변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나는 피라미드 방은 특수한 공간이라서 세계의 갈라진 균열의 저승과 연결되고, 그 그림자를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오래전에 매마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이었다. 어쩌면 매마가 이곳에서 싸웠을 수도 있고,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고 하면서 잔상을 남긴 것이다.
매마에겐 무수히 많은 층의 영혼이 있는데, 싸우거나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벗겨진 영혼 한 층이 영원히 이곳에 남겨진 것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외에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제2 관문을 통과한 걸까?
하지만 이 방을 열고 나갈 문을 찾을 수 없었다.
두변은 매마의 잔영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 거대한 매마의 몸집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두변이 매마의 몸을 뚫는 순간, 그의 몸이 제2 관문에서 빠져나왔다.
매마의 잔영이 바로 제2 관문의 문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치를 제3 관문 시험은 무엇일까?
세 번째 방, 제3 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두변의 눈앞에 아누비스가 다시 나타났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아누비스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몸집이 거대했다.
지금 아누비스의 키는 건물 3층 높이였다.
“두변, 우리 거래는 무척 즐거웠습니다. 맞지요?”
아누비스가 물었다.
두변은 아누비스를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아누비스가 이어서 말했다.
“이건 제4 관문으로 통하는 열쇠입니다. 황금 열쇠죠.”
아누비스의 손에 들린 황금 열쇠는 대략 3촌 길이에 굉장히 정밀하고 화려한 모양새였다.
사신 아누비스가 제4 관문의 열쇠를 천칭의 왼쪽에 올려둔 뒤, 두변에게 말했다.
“이제 천칭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를 내주어야 제4 관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뭘 내줘야 합니까?”
제1 관문에서 교룡의 황금 혈맥으로 아누비스의 병을 교환했고, 그 덕분에 제1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아누비스는 약속대로 두변의 몸에 있던 교룡의 황금 혈맥을 뽑아갔고, 두변은 교룡의 모든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거래를 해야 한다니?
사신 아누비스가 물었다.
“두변, 이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오신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아누비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는 부인과 의부와 딸이 생겼습니다. 맞지요?”
두변의 몸이 움찔했다.
“당신에게는 부인 영설, 예상, 이도진, 혈관음, 계표표, 송옥진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중 한 명의 목숨을 제 황금 열쇠와 교환해야 합니다.”
두변의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사신 아누비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3 관문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다른 세계의 여인이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한 이 6명의 여인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동등한 가치일 테니, 그중 아무나 한 명을 골라 천칭에 올려주십시오. 선택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전 즉시 그 여인을 죽인 뒤 그녀의 영혼을 천칭에 올릴 겁니다.”
두변은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했다.
“물론, 부인 중 한 명을 고르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당신은 교황의 시험에서 탈락하게 되고, 곧장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두변이 죽일 듯이 아누비스를 노려보았다.
거대한 아누비스가 말했다.
“두변, 의부 이문회의 영혼과 저 황금 열쇠를 교환해도 좋습니다. 당신은 그를 가족으로 여기고, 충분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죠. 의부의 이름을 말하면, 저는 즉시 그의 목숨을 거두고, 그의 영혼을 천칭에 올릴 겁니다. 의부 이문회뿐만 아니라, 유모, 혹은 두평아도 가능합니다.”
두변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제3 관문이 이런 시험일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교황의 시험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시험하는 것인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험을 치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신 아누비스가 말했다.
“두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시험에 주어진 시간은 무제한이 아닙니다. 앞으로 약 1분 남았습니다. 이 선택이 그렇게 어렵진 않을 텐데요? 이곳에 있는 부인들과 당신의 의부는 기꺼이 당신을 위해 희생할 겁니다. 물론, 누굴 선택해도 당신의 마음 한편이 아프겠지요. 하지만 부담을 너무 많이 갖게 되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 겁니다.
앞으로 43초 남았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 사람을 죽이거나, 시험을 포기하고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누비스가 설명했다.
그때, 두변이 갑자기 비수를 꺼내서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더니, 갈비뼈 하나를 부러트려서 몸속에서 꺼냈다.
그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극심한 통증에 혼절할 것만 같았다.
교룡의 혈맥이 없으니, 이제 자신은 자가치유가 불가능했다.
두변은 자신의 갈비뼈를 사신 아누비스에게 건넸다.
아누비스가 두변의 갈비뼈를 천칭 오른쪽에 올렸다.
“참 낭만적이로군요. 에덴의 전설에 따른 것이겠지만, 아쉽게도 이걸로는 거래가 성사되지 않습니다.”
천칭은 여전히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황금 열쇠의 무게는 두변의 피투성이 갈비뼈 한 대보다 훨씬 무거웠다.
“21초 남았습니다.”
“19초.”
“18초.”
거대한 사신이 계속해서 시간을 쟀다.
두변은 가족 중 한 명을 죽이고 그 사람의 영혼을 천칭에 놓거나, 교황 시험을 포기하고 이곳을 나가야 했다.
“17초.”
“16초.”
“9초.”
“6초.”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간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시험도 끝나게 된다.
두변은 제 머리를 쥐어뜯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제 다른 영혼을 가져가세요.”
사신 아누비스가 두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확실합니까?”
“네.”
두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신 아누비스가 큰 손을 뻗더니, 두변의 머릿속에서 영혼 한 줄기를 뽑아냈다.
아누비스가 뽑아낸 건 두변의 것이 아닌, 이 세계 숙주 신체의 영혼, 두회의 아들 두헌의 영혼이었다.
아누비스가 두헌의 영혼을 천칭의 왼쪽에 놓았다.
천칭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사신 아누비스가 말했다.
“두변, 이번 거래가 성사된 걸 축하합니다. 황금 열쇠를 드릴 테니, 앞쪽에 있는 문을 이 열쇠로 열고 제4 관문으로 가십시오.”
두변은 황금 열쇠를 건네받은 뒤, 피투성이가 된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구두사와 했던 지혜의 문답, 견사 대사의 정신 환각 시험, 그리고 천기도주의 시험까지, 수많은 시험을 거쳤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세 가지 시험은 사실 우연이 가득했고, 실력이 아닌 운으로 승부 볼 때가 많았다.
그가 거친 시험들은 무척 어려웠지만, 영리하게 머리를 쓰고, 자신에게 떨어진 운을 잘 잡은 덕에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화교의 시험은 오묘한 이치와 미지로 가득했다.
관문 하나하나를 넘을 때마다 통과돼서 좋긴 한데 왜 통과됐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교황 시험은 왠지 머리로 치르는 시험이 아니라, 무언가를 얻고 포기할지 선택하고 대가를 치르는 시험이었다.
두변은 피라미드의 세 번째 칸의 끝으로 갔고, 황금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두변은 손에 쥔 황금 열쇠로 제4 관문으로 향하는 황금 대문을 열었다.
제4 관문은 교황 시험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두변은 잠시 주저했다.
지난 관문들이 워낙 경악스러워서 그런지, 제4 관문에 또 뭐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 관문은 얼마나 더 놀랍고 힘겨울까.
두변은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황금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었다.
문을 열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금빛이 두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