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장: 거룡의 포효
세계의 갈라진 틈의 명계 공간 안.
온몸에서 귀화를 뿜어내는 거대한 용이 두변을 향해 미친 듯이 불을 뿜어댔다.
거룡이 꼭 두변을 당장이라도 죽이려는 것처럼 격하게 달려드는데, 하늘로 치솟은 불꽃이 무려 몇백 미터 길이였다.
이 거룡은 천기도주 정신 환각에서 보았던 화염 괴수보다 훨씬 더 강력해 보였다.
거룡이 뿜어내는 귀화는 뜨겁지 않고 몹시 차가웠지만, 그럼에도 불에 닿는 모든 것을 없앴다. 조금 전에 마귀들이 귀화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지 않았나.
거룡이 뿜어낸 귀화가 두변의 몸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 화염에서도 두변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거룡은 입을 쩍 벌린 채 몇 분 내내 귀화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변이 멀쩡하기만 하자 더 화가 나서 날뛰기 시작했다.
거룡이 두변을 향해 커다란 앞발을 휘둘렀고, 두변은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맞아서 수천 미터 밖까지 날아갔다.
거룡의 힘이 어마어마하게 셌지만, 두변은 여전히 멀쩡했다.
거룡의 몸은 귀화로 이뤄져 있어서 물리적 실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두변은 이 귀화로부터 아무런 상해를 입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거룡이 흥분해서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거룡이 날개로 두변을 세게 치자, 두변은 몇만 미터 밖까지 튕겨 나갔다.
그 사이 거룡이 명계의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내려와 발을 내리꽂았다.
콰쾅!
두변의 몸은 거룡의 발밑에 깔린 채 수천 미터 아래까지 파묻혔다.
두변은 이제야 생각이 좀 정리되었다.
우선 이 세계에는 지옥도, 명계도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죽은 뒤에 혼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강한 이계 괴수들이 존재한다. 이계 괴수들은 죽은 뒤에 혼백이 되는데, 괴수의 혼백은 본능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모여들게 된다. 그래서 괴수의 혼백들이 세계의 갈라진 균열의 한 구역을 자신들의 명계로 지정한 것이다.
이 거룡은 아마 이 작은 명계의 초특급 패주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이 거룡은 왜 이곳에 있는 마귀들을 전부 없애지 않았을까?
거룡이 계속해서 미쳐 날뛰면서 광기 어린 모습으로 포효했다.
“죽어라. 교활한 마귀!”
휙!
두변은 명계의 하늘 위로 날아올라서는 거룡의 눈앞에 둥둥 떠서 외쳤다.
“나는 마귀가 아니다. 자세히 보아라. 나는 네 동족이다!”
거룡이 화르륵 타오르는 귀화의 눈동자로 두변을 노려보다가, 두변의 기운을 느끼려고 있는 힘껏 냄새를 맡았다.
거룡이 멈칫하더니,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그런데 바로 몇 초 뒤, 거룡의 두 눈이 다시 광기 어리게 변했다.
“죽어라. 교활한 마귀!”
그러더니 또 아까처럼 두변을 공격하면서 미쳐 날뛰었다.
심지어 공격하는 패턴도 조금 전과 똑같았다.
두변은 인내심을 갖고 거룡에게 말을 하고 또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거룡의 눈빛은 단 1초만 차분해지고, 곧바로 다시 미쳐 날뛰면서 반복적으로 두변을 공격했다.
두변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거룡은 감각을 잃었고, 그의 기억력은 최대 30초였다.
누가 거룡의 감각과 기억을 빼앗아간 걸까?
두변은 매마가 이 거룡의 감각을 빼앗은 뒤에 이 명계 영역 안에 숨겨두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두변이 전속력으로 거룡의 추격을 떨쳐낸 뒤, 명계 영역의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두변을 뒤쫓던 거룡은 30초가 지나자 제자리에 멈춰섰다. 거룡은 자신이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혼란스러워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두변은 거룡을 뒤로하고 명계 영역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백 리를 달리던 두변은 멀지 않은 곳에서 해발 몇만 미터 높이의 절벽을 발견했다. 험준한 층계가 산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두변은 정신력을 집중해서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산꼭대기에는 왕좌 하나가 놓여 있었고, 왕좌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거룡의 감각과 기억이 저 산꼭대기 왕좌에 있는 게 아닐까?’
두변은 산 아래에 도착한 뒤, 층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조금 전처럼 바닥이 울렁이면서 마귀들이 나타나더니,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마귀가 두변을 꽁꽁 둘러쌌다.
두변은 육맥신검을 이용해서 마귀들을 물리쳤다. 두변의 육맥신검은 꼭 레이저 건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발사되었고 육맥신검에 맞은 마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공 수준을 돌파한 덕분에 두변의 육맥신검 위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덕분에 초당 수십 검을 쏟아낼 수 있었지만, 이곳의 마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두변이 종일 육맥신검을 쏜다고 해도 마귀들은 전부 죽지 않을 듯했다.
마귀들의 공격 방식은 몹시 징그러워서, 불빛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죽을 걸 알면서도 자살 공격을 했다.
두변이 아주 찰나의 틈을 보인 사이, 마귀들이 두변의 몸에 닿자마자 한줄기 암흑 기운이 되어서 두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짧은 찰나에, 수백, 수천 마리 마귀가 두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예전의 무공 수준이었다면, 두변의 몸은 벌써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두변은 다행히도 몸의 절반만 마귀의 기운에게 빼앗겼다.
그의 근맥 중 절반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점점 더 차가워졌다.
만약 이대로 마귀의 기운에 잠식된다면, 이 명계에 영원한 조각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아오! 진짜 끊질기네.”
두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바닥을 비수로 그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그는 곧바로 지옥불로 자신의 피를 태웠다.
그러자 온몸의 피부가 갈라지더니, 지옥불이 두변의 몸에서 화르륵 불타올랐다.
두변의 온몸이 불덩이가 되자 두변 주위의 모든 마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변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간 마귀 기운도 깨끗이 사라졌다.
두변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된 채로 묵묵히 산을 올랐다.
능파미보를 시전해서 무려 초속 30미터가 넘는 속도로 층계를 오를 수 있었다.
두변이 지나간 자리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두변은 거의 층계를 밟지도 않고 빠르게 산을 올랐는데, 지옥불 때문에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층계가 사라졌다.
지옥불이 모든 걸 집어삼키기 때문이었다.
두변은 끊임없이 위로 달렸고, 산꼭대기로 향하는 층계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1분 뒤, 두변은 절벽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꼭대기에는 해골 왕좌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해골은 인간의 해골도, 이수의 해골도 아닌 악마의 두개골이었다.
그렇다. 매마도 아니라, 강력한 악마의 해골이다.
악마의 체형은 거룡만큼 거대했고, 그의 두개골도 무려 20층 건물 높이인 6, 70미터에 달했다.
악마의 뿔 2개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었다.
두변은 층계처럼 되어있는 악마의 코뼈를 밟으며 꼭대기로 향했다.
‘이게 마왕인가? 두개골이 여기 있는데, 몸통의 골격은 어디 있는 거지?’
두변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사막섬에서 상고 시대 용의 골격을 발견했고, 이곳에서는 마왕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둘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두변은 고민하면서 악마의 콧대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이 절벽 꼭대기는 마귀들에겐 금기의 구역이나 다름없어서 두변은 지옥불을 거뒀다.
두변은 이내 두개골의 눈 부위까지 올라갔다.
커다란 눈구멍에는 눈알도 없었고, 귀화도 없었다.
두변은 계속해서 뼈를 타고 올라갔고, 악마의 이마를 지나 정수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왕좌와 왕관이 놓여 있었다.
거무스름한 왕관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왕좌 옆에는 지팡이가 하나 놓여 있는데,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에는 황금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석에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변이 지팡이 가까이 다가가자 황금빛 보석에서 용의 울음소리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지팡이 안에 봉인된 게 바로 거룡의 기억과 감각일 것이다.
두변이 지팡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자, 어디선가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관을 선택해야죠.”
“자기! 어둠의 황관을 선택해요. 당신이 어둠의 황관을 쓰게 되면, 무궁무진한 힘을 얻게 되고, 이곳의 주인이 될 거예요. 당신의 적도 한 방에 무찌를 수 있고요.”
낯선 목소리가 영설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내 사랑, 어둠의 황관을 선택하세요. 부군, 어둠의 황관을 선택하면, 세계의 군주가 되고,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돼요.”
이젠 그 목소리가 예상의 목소리로 들렸다.
“부군, 어둠의 황관을 선택해야 해요. 그 황관을 선택하면, 모든 매마가 당신의 명령을 들을 것이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기만 해도 당신의 적은 흔적도 없이 죽을 거예요.”
여러 목소리가 두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데,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전부 두변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두변은 당연히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알 수 없는 막강한 정신력이 두변의 의지를 억누르고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두변은 황관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두변은 의지를 어떻게든 조절하려고 했지만, 몸은 이미 두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두변의 두 손이 황관을 덥석 쥐었다. 순간, 무한한 희열, 기쁨, 흥분을 느꼈다.
두변의 의지는 알 수 없는 힘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철저히 짓눌렸다.
그래도 두변은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쓰면서 발버둥쳤지만, 그의 두 손은 그의 의지와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두 손은 황관을 잡아서 천천히 머리 위로 올렸다.
“끼하하하하!”
두변의 귓가에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계략을 달성한 악마처럼 웃으면서 소리쳤다.
“황관을 써라. 어둠의 왕이 되어서 이곳의 주인이 되어라!”
두변의 두 손은 황관을 천천히 머리 위로 내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고. 황관을 쓰게 되면, 난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될 것이고, 마왕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
두변의 의지가 소리 없이 아우성을 외쳤다. 하지만 그의 두 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위로 황관을 옮겼다.
이 황관과 해골 왕좌의 정신력은 두변의 정신과 의지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때, 두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예쁘장하지만, 어딘가 음울하고, 고집스러운 여자아이의 얼굴.
현대 지구에 있는 두변의 딸, 두효의 얼굴이었다.
물론, 두변은 현대 지구에 자신이 딸이 있는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는 글랜시스 교황의 시험에서 두효를 보았고, 매마의 잔영이 두변의 기억과 그리움을 바탕으로 두효의 환각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보았든 간에, 두변은 그 장면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딸 두효가 자그마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을.
정말 두변이 자신의 아빠인지 확인하려는 장면을.
두변이 자기 아빠라는 걸 확신한 뒤에 예쁘장한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한 장면을.
활짝 웃는 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힘이 솟구쳤다.
“끄아아악!”
두변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서 자신의 손목을 끊어냈다. 정확히 말하면 두변은 몸의 진동으로 손목을 잘라낸 것이다.
두변의 두 손과 손에 들려있던 황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잘린 손목으로 자신의 두 손을 주워서 겨드랑이에 끼웠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황관이 아직도 두변을 부르고, 유혹하고 있었다.
두변은 황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지팡이로 다가가서 손목으로 지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치켜들고 악마의 두개골을 내리찍었다.
콰직.
악마의 두개골이 깨지는 대신, 지팡이 손잡이 쪽의 황금 보석이 툭, 깨졌다.
깨진 보석 사이로 황금빛 기운이 쏟아져 나오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룡의 감각과 기억이 해방되었다.
크오오오오!
거룡의 감각과 기억이 해방되는 그 순간, 천 리 밖에서 거룡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이 귀화로 뒤덮인 거룡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 절벽 꼭대기를 향해 돌진했다.
거룡의 비행 속도는 무척 빨라서, 불과 2각 만에 해골 왕좌 앞에 도착했다.
해방된 거룡의 감각과 기억은 혜성처럼 반짝이면서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거룡이 도착하자, 황금빛 기운이 거룡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일순간, 거룡의 혼란스럽고 광기 어린 눈빛이 차분하게 바뀌더니, 거룡이 냉정하고, 고귀하고, 강인한 눈빛으로 두변을 내려다보았다.
거룡은 앞발로 두변을 잡더니, 그를 자신의 등 위로 던졌다. 그리고서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오르더니, 포효와 함께 엄청난 귀화를 뿜어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귀화가 악마의 두개골 위에 있던 왕좌와 황관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해골 왕좌는 멀쩡했지만, 황관은 그대로 녹아서 악마의 두개골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후 거룡은 두변을 등에 태운 채 지옥의 문을 향해 날아갔다.
지옥의 문은 지옥불로 이뤄져 있지만, 두변은 지옥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룡도 똑같이 지옥불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대로 지옥의 문을 지나 죽음의 동굴을 거침없이 통과해서, 세계의 갈라진 균열을 뚫고 현실 세계로 나왔다.
거룡은 멈추지 않고 수천 리를 날아 바다 건너, 산 너머, 마귀 해역을 지나 사막섬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사막섬 중앙에 있는 대균열의 바닥으로 내려갔다.
드디어 거룡의 혼백이 거룡의 골격과 하나가 되었다.
거룡의 귀화는 일순간 사라졌고, 대신 거룡 골격의 눈동자가 귀화로 바뀌면서 골격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거룡의 골격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포효했다.
거룡의 포효 때문에 사막섬 전체가 흔들리더니, 주위 해역에도 수백 미터 높이의 해일이 일기 시작했다.
거룡의 혼백이 골격과 합쳐지면서, 거룡의 골격에 강하고 기이한 초록빛이 맴돌았다.
5백 미터 길이의 거룡이 두변을 등에 싣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더니, 동쪽으로 날아갔다.
두변이 거룡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가서 싸우고, 파괴해라. 우리의 모든 적을 죽여 없애버려라!
동방 연합 왕국. 어디, 멸망의 전율을 느껴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