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장: 거지 함대
바다 위, 두변의 교룡호 전열함.
선장 리안나 군주는 여전히 화끈한 몸매를 해군 제복에 숨긴 뒤, 뱃머리에 서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리안나 군주가 말했다.
“두변 각하, 이 세계는 참 정상적이지 않네요.”
유경 왕국도, 유경 왕성도 여전히 건재하고 예전처럼 번영하지만, 지금 그곳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유경 왕족의 것이 아니었다.
소군 방진의 정인 에인젤이 유경 왕성의 실권자, 여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경 왕국의 철갑 전함이 경쟁력이 떨어지는 순간, 유경 왕국은 멸망의 위험을 맞이해야 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증기 동력 철갑함과 유탄포가 부상한 뒤, 유경 왕국의 철갑함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그래서 리안나 군주는 유경 왕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리안나 군주뿐만 아니라, 교룡호에 탔던 선원들과 유경 왕국의 해군 병사들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대녕 제국에서 부인을 맞이하고 아이를 낳은 후였다.
기음음은 처음으로 절정 고수의 신분으로 두변과 함께 출전했다.
기나긴 항해 여정 동안, 기음음은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기음음이 그린 것은 두변이 예전에 그녀에게 해줬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 모습이었을 때, 두변은 틈만 나면 기음음의 곁을 지키면서 각종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기음음은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고 이야기책을 만들 듯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지금 기음음이 그리고 있는 건 신데렐라 이야기도 인어공주 이야기도 아닌, 영도현이었다.
그것도 젊은 시절의 영도현을.
두변이 기음음의 옆에서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시에 우리 모두가 북명검파에 있었어요. 영도현은 아주 야망이 가득한 사람이었죠. 그의 마음속엔 원한과 억울함, 그리고 원대한 이상이 있었어요. 영도현은 아주 모순이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무척 매력적인 남자였어요.”
두변은 기음음이 말하는 영도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시 영도현은 황족의 후예였지만, 황위를 빼앗겼다.
영도현은 고귀하고 복잡한 신분인 데다, 여러 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용모까지 준수하니, 모든 여인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흘리고 다녔을 것이다.
“언니 기음음과 나는 그를 좋아했지만, 그는 내가 아닌 언니를 좋아했어요. 난 그 일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북명검파를 나왔고, 성화교에 이끌렸죠. 성화교에서 몇 년을 지냈는데, 그들의 교리에 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내가 관심을 가졌던 건, 그들이 가진 이계 에너지 기술과 이수 생물에 관한 지식이었죠. 나는 대녕 제국에 분교를 개척하겠다고 성화교에 약속하는 척을 했고, 성화교 고수와 신비 술사를 데리고 나와서 천마교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누구나 두려워하는 여마두가 되었죠.
하지만 내가 천마교를 만들었던 유일한 이유는 북명검파를 무찌르고, 영도현을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잘못을 빌게 하는 거였어요. 눈뜬장님이라 내가 아닌 언니를 선택했다고 말이에요. 물론, 그때 내 성격은 무척 삐뚤어졌었죠. 내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이 있다면, 인내심 없이 그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그러다 죽이는 사람이 점점 더, 점점 더 많아져서 흉악한 여마두가 되었죠.
난 한때 천마교로 북명검파를 무찌를 수 있다는 천진난만한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북명검파가 나섰을 때, 그들에게 반격할 힘이 전혀 없었죠.
누가 나를 반로환동(返老還童)하게 해준 줄 알아요?”
두변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글랜시스 교황?”
기음음이 대답했다.
“맞아요. 글랜시스 교황. 교황께서는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는, 사람을 시켜서 내게 두루마리 하나를 보내줬어요. 난 그 두루마리를 배우면 천하무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로환동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곧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글랜시스 교황이 다시 사람을 시켜서 나를 성화교로 데려갔죠. 그때 내게 묻더군요. 어린아이로 지낸 요 몇 년이 후회스럽냐고요. 난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글랜시스 교황도 후회하지 않으면 됐다고 하더군요.”
기음음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난 정말 후회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무공을 잃고, 완벽한 몸매를 잃었지만, 지혜를 되찾았으니까요.”
기음음이 영도현의 화상을 다 그렸다.
“사람은 참 신기해요. 머리가 차분해지면, 모든 일이 바뀌니까요. 내가 다시 영도현을 보았을 때, 정말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일지 않았어요.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영도현도 많이 변해 있었고요. 20년 전의 기운이 아예 없어졌더라고요.”
이때, 창가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기음음이 걸치고 있던 장포가 흘러내렸다.
기음음은 장포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서,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매혹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기음음이 잠긴 목소리로 그를 유혹했다.
“뭘 기다리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얼마나 많은 인생의 낙을 놓치게 할 거예요?
옛사람들이 인생이 짧다고 하던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이젠 정말 인생이 고되고 짧다는 걸 실감해요. 어서 시작해요.”
동방 연합 왕국, 방청의가 다시 혼례를 치르고 있었다.
이번에 혼례를 치르는 상대는 또 황제였다.
그녀는 이전의 연왕 영충(寧充), 지금 새로 즉위한 영녕 황제에게 시집을 갔다.
지금 방청의는 거의 혼백이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붉은 혼례복을 입었고, 목각 인형처럼 시녀들에게 둘러싸여서 화장을 받았다.
방청의는 아름답게 단장하는 내내 눈빛에 총기가 하나도 없었다.
“크흠!”
문밖에서 기침소리가 나자, 방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물러났다.
방청의의 부친 방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너의 숙명이다. 바꿀 수가 없어. 네가 좋든 싫든, 만족스럽지 않아도 영녕제와 혼례를 올리고 그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해. 네가 낳은 아이는 장차 대녕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방청의가 냉소를 짓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왜 방진은 황제를 안 한답니까?”
방탁이 말했다.
“넌 너무 그를 얕보고 있다. 방진은 대녕 제국의 황제 따위가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야. 그는 이 세계 전체, 어쩌면 저 하늘까지 담을 그릇을 가지고 있다. 영녕제에게는 실권이 없을 것이다. 그가 조금 황당한 구석이 있지만, 영덕제처럼 음침하진 않아. 그러니 네가 황후가 된다면, 네가 대권을 쥘 수 있다.”
방청의가 비웃으면서 말했다.
“잊지 마세요. 지금 대녕 제국은 두변과 영설이라는 진무제의 손에 있다는 걸.”
방탁이 단호하게 말했다.
“두변은 죽을 것이다.”
방탁, 두회, 고정 등은 두변이 당연히 죽을 테니, 그의 부인을 어떻게 나눠 가질지까지 결정했다.
방탁은 영설, 두회는 옥진 군주, 그리고 고정은 이도진을 갖기로 했다.
두변의 부인들은 전부 절세미인인지라, 동방 연합 왕국의 최고 임원만 배정받을 수 있었다.
막 제위에 등극한 영녕제도 한 명을 골랐는데, 그는 무공을 폐한 예상 선자를 골랐다.
여인들이 만약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그녀들의 아이를 인질 삼자는 얘기도 끝냈다.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머니는 어떤 치욕스러움도 견딜 테니까.
이 모든 생각은 방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서 누가 가졌던 여인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지만, 두변을 엿 먹이기 위해서 그의 부인들을 수하에게 나눠준 것이다.
방탁은 소군 방진이 분노했다는 걸 눈치챘다.
이전의 소군 방진은 언제나 신처럼 고고했고, 꼭 분노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었다.
아무도 소군 방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네가 말을 듣지 않은 탓에, 우리 가문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방탁이 말한 뒤 손뼉을 한 번 치자, 무공 강자인 여인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여인은 방청의도 아는 사람으로, 방탁의 첩실로 올해 마흔이 안 된 나이였다. 하지만 이 여인의 외모는 방청의의 언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방탁의 첩실에겐 또 다른 신분이 있는데, 그녀는 북명검파의 제자였다.
첩실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곧장 방청의의 입을 벌리고 단약 하나를 집어넣었다.
“안 돼! 싫어!”
방청의가 미친 듯이 발버둥쳤지만, 첩실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방청의의 어딘가를 툭 쳤다.
그러자 단약이 곧장 방청의의 배 속으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잠시 뒤, 방청의의 눈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정말로 산송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건 너의 숙명이다.”
방탁은 이 말만 남긴 뒤 그대로 방을 떠났다.
방청의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방 안으로 돌아온 방탁도 단약 한 알을 삼켰다.
그의 소첩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야께선 정말 노익장이세요. 어젯밤에도 소첩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하셨잖아요. 영설이라는 여인을 정복하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단약을 삼킨 방탁은 소첩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북명검파에서 개조한 오금회(五禽戲: 도가에서 다섯 짐승의 자세를 흉내 내어 신체의 여러 관절을 부드럽게 하여 혈액 순환이 잘되게 하는 양생법)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방탁이 물었다.
“머리카락을 까맣게 해주는 약은 찾았느냐? 아주 까맣고 오래 가는 걸로 말이다.”
방탁은 지금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대해전은 금방 끝날 것이다.
두회와 고정, 그리고 방천득 원수가 이끈 대군은 순식간에 두변의 거지 같은 함대를 무찌를 것이고, 곧바로 파죽지세로 대녕 제국을 점령할 것이다.
방탁이 대녕 제국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
만약 그가 대녕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최소 20년은 내각 수보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소군 방진은 세속적인 권력에 연연하지 않지만, 방탁은 달랐다.
두변의 부친 두회, 이전의 민월 총독이자 현재의 내각 대신인 고정, 그리고 동방 연합 왕국의 해군 상장 방천덕이 기함의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두회는 세상에 이렇게 커다란 전함이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 전함은 마치 산 하나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이 전열함의 이름은 제국호이고, 배수량은 6, 7톤이 넘으며 초특급 마포가 19대 설치되어 있었다.
정석 동력 핵심을 무려 세 개나 장착했고, 항해 속도는 시속 25절이었다.
이 전열함은 1만 5천 미터 이내의 모든 목표물을 산산조각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그 어떤 해군이 되었든, 제국호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가루가 될 것이다.
제국호 한 척으로 세상 모든 해군과 맞서 싸워도 제국호가 이길 것이다.
동방 연합 왕국은 이번 전투에 제국급 전열함을 세 척이나 내보냈고, 왕국급 전열함 9척, 해권급 전열함 13척, 순양함 50여 척과 호위함 100여 척을 동원했다.
이 정도 해군의 규모면 19세기 대영 제국을 가뿐히 이길 정도였다.
두변을 죽이는 건 총으로 모기를 쏘는 수준으로,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두변을 죽인 뒤에 서쪽으로 가서 성화교 세계의 모든 해군 병력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소군 방진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세상의 바다에는 오직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만 항해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다른 국가는 아예 해군을 소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해상 무역과 해상의 질서는 전부 동방 연합 왕국이 관장할 것이다.
소군 방진의 패기는 역시 대단했다.
검은 매 한 마리가 동방 연합 왕국의 제국호 전열함에 착지했다.
수석 술사가 검은 매와 교감한 뒤, 두회에게 알렸다.
“두회 대인, 고정 대인, 방 원수. 두변의 거지 함대가 170리 밖에 있다고 합니다.”
두회와 고정이 몸을 움찔했다.
두 사람은 드디어 두변에게 패전했던 치욕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흥분했다.
“모든 전함, 앞으로!”
“우리가 상대할 적은 거지 함대이고, 그들에겐 전열함이 딱 한 척밖에 없다. 너희들의 임무는 두변의 거지 함대를 포위해서 몰살하고,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깨끗하게 섬멸해라!”
“두변은 모든 희망을 성화교의 대붕 공군에 걸 것이다. 모든 전함은 공중 방어를 위해 속사 마포를 잘 활용하고, 항시 전투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공중에 목표물이 잡히는 즉시 발사하라!”
“되도록 반 시진 내에 두변의 공군을 몰살해야 한다!”
“그놈들이 믿는 구석이 없어지면, 그의 거지 함대는 다리가 잘린 돼지처럼 우리에게 도살당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두변과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가 점점 더, 점점 더 가까워졌다.
100 리.
80 리.
50 리.
충분히 가까워졌다 보니, 서로의 시야에 서로가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두변 측 사람들은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를 보고 경악했다.
동방 연합 왕국의 무적 함대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다를 뒤덮을 정도의 기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회와 고정 등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두변이 거지 함대를 이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지경으로 거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변의 함대에는 낡고 오래된 전열함 한 척과 전투력이 없어 보이는 대형 화물선이 전부였다.
‘두변이 저렇게 모자란 놈이었나?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결정을 할 리가 없을 텐데.’
‘모든 희망을 대붕 공군에 걸었다고?’
‘우리의 속사 마포에 당하는 대붕을 보면 피를 토하겠군.’
두변이 손짓하자, 천 마리에 가까운 대붕 공군이 속도를 올리면서 하늘을 향해 고도를 높였다.
동방 연합 왕국의 해군 원수 방천덕이 큰소리로 외쳤다.
“두변의 공군이다. 모든 속사 마포를 준비하고, 목표물이 보이는 즉시 사살해라.”
“이건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