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장: 바다 위의 학살
바다 위, 거대한 용이 계속해서 화염을 뿜어냈고, 화염은 하늘을 가릴 기세로 맹렬하게 타올랐다.
동방 연합 왕국의 전함은 속수무책으로 불길에 휩싸였다.
견고하기 짝이 없던 전함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전함 위의 사람들은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염은 수 척, 수십 척, 백여 척 전함을 집어삼켰고, 동방 연합 왕국 함대 중 절반이 1각 만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머지 절반의 지휘관도 완전히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거룡이 드디어 불을 뿜어내는 걸 멈췄다.
“도망쳐야 한다!”
기함에 타고 있던 해군 원수 방천덕이 큰소리로 외쳤다.
“함대 전원 퇴각하라! 분산해서 도망쳐라!”
아직 망가지지 않은 백여 척 전함이 급선회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해군 원수 방천덕, 두회와 고정이 탄 기함도 최고 속도로 도망쳤다.
그런데 이때, 거대한 용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잠영을 하기 시작했다.
거룡은 동방 연합 왕국의 나머지 전함 아래로 다가가서는, 미친 듯이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룡이 날카로운 발톱과 날렵한 날개를 마구 휘저으면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를 일으키자, 조금 전의 불바다보다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미친 듯이 도망치던 동방 연합 왕국의 전함들은 꼭 바다 위에 떠다니는 힘없는 장난감 배처럼 순식간에 뒤집혔고, 거룡의 발톱과 날개에 맞아서 찢기거나 으스러졌다.
크오오오오!
거룡이 수면 위에 떠 있던 순양함 한 대를 통째로 물어뜯었다.
콰드득!
순양함은 순식간에 나무 조각이 되었다.
거룡이 두 앞발로 호위함 두 척을 잡더니, 상공 몇천 미터까지 날아오른 뒤에 호위함을 바다로 내팽개쳤다.
호위함 두 척은 수천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면서 가속도가 붙더니, 굉음과 함께 수면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부서졌다.
거대한 거룡은 전함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파괴했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거룡은 지금 분노한 상태였다.
이 분노를 무려 1천 년이나 품고 있었으니, 그 폭발력이 얼마나 클까.
거룡은 동방 연합 왕국의 전함을 미친 듯이 찢고, 찢고, 부수고, 또 부쉈다.
다시 바다 위로 날아오른 거룡이 입을 쩍하고 벌리더니,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화염을 뿜어냈다.
일순간, 몇백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다 위에는 온통 화염이 넘실거렸고, 곳곳에 동방 연합 왕국 전함의 잔해가 떠다녔다.
마치 세계 종말의 날 같은 장면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방천덕, 두회, 고정이 타고 있는 기함만은 아직 멀쩡했다. 거룡이 일부러 그 기함을 피해서 공격하는 것처럼 말이다.
두회와 고정은 처음엔 그 장면에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두 사람은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특히 두회가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두회는 항상 두변은 안중에도 없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고, 두변이 상대도 안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상대가 되지 않는 건 그였다.
매번 두변을 곧 죽일 것 같은 상황까진 가지만, 결국엔 두변에게 역전당하고, 반대로 두변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두회는 두변이 이번에도 기적을 만들어 낼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하지만 두변의 필살기가 대붕 공군이라고 하니, 모두가 안심했다.
두변의 필살기는 이미 소군 방진이 예상한 것이고, 대붕 공군을 몰살할 수 있는 대살기까지 준비해뒀으니까.
하지만 두변의 필살기는 대붕 공군이 아니라, 이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고 강한 거룡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동방 연합 왕국이 준비한 대살기는 우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두회는 도리어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두변이 역시 대살기를 가지고 있었군. 진정한 대살기를 말이야.’
두회는 이제 완전히 절망해서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두회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절망하다 못해 억울한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콰과과광!
바다 곳곳에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두회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폭발음이 나는 곳을 바라봤다.
동방 연합 왕국의 모든 전함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가 타고 있는 기함 한 척만 남아있었다.
크르르!
거대한 거룡이 하늘에서 내려와 바다 위에 떠있는 상태로, 동방 연합 왕국의 기함을 노려보았다.
거룡은 두회와 불과 수십 미터 거리에 있었다.
거룡은 귀화의 눈으로 두회와 기함 위의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의 눈빛은 꼭 하찮은 개미라도 쳐다보듯이 멸시하는 눈빛이었다.
잠시 뒤, 갑자기 수많은 검은 점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두변, 기음음, 예상, 그리고 수십 명 고수들이 동방 연합 왕국의 기함 위로 떨어졌다.
두변은 두회 등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본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 경성에 있을 때, 두변은 일부러 두회와 마주치는 걸 피했고, 두회도 두변을 피해 다녔다.
드디어 두 부자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변은 처음엔 두헌이 두회의 친자가 아니라, 옆집 왕씨 같은 놈의 아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두회가 이토록 두헌을 싫어하고, 심지어 알아서 죽으라는 의도로 그를 내다 버리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지금 보니 두변의 추측은 틀렸다.
두헌의 생김새는 희민지를 닮았지만, 그의 눈매는 두회를 닮았다.
누가 봐도 이 둘은 친부자가 맞았다.
“왜 그랬습니까?”
두변이 물었다.
두변은 두회가 친자식을 굶어 죽으라고 무인도에 버린 건, 순전히 방청의의 협박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두회는 방탁의 수하이긴 해도, 방탁이 오히려 두회에게 무척 의지하고 있었다.
사실 두회는 좀 먼 곳에 괜찮은 저택을 마련한 뒤, 두헌을 몰래 키울 수도 있었다.
굶어 죽으라고 무인도에 보내는 것보단, 경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라고 해도 됐었다.
“점술사 말로는 내가 언젠간 네 손에 죽는다고 하더군.”
두회가 감정의 동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친자식을 죽일 생각을 한 것이었다.
두회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보니 그 점술사가 꽤 용해.”
두변은 전 양광 총독 고정을 바라보았다.
고정은 그저 작게 탄식할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변의 시선은 동방 연합 왕국의 해군 원수 방천덕에게 향했다. 방천덕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냉랭하게 말했다.
“소군의 이상은 원대하고 위대하다. 네가 이 전투에서 이겼다고 해도, 너와 소군 전하의 차이는 천지 차이다.”
두변이 명령했다.
“세 사람을 참수해라.”
“예!”
고수 몇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두회, 고정, 방천덕 세 명을 갑판 위에 무릎을 꿇렸다.
쓰윽!
고수들은 동시에 검을 휘둘렀고, 세 사람의 머리가 갑판 위로 떨어졌다.
두회는 죽기 전에 아직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수를 당하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고, 결국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수도.
이곳은 세상에서 제일 예술적 감각이 넘치는 곳이자, 젊고, 거대하고, 평온한 성이었다.
소군은 천문학적 숫자의 금산은해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성이 너무 화려하거나 번영과 유흥이 뒤섞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곳은 화려하다는 표현보다 고귀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소군 방진이 우아하게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서 연주를 하면서 작곡을 하고 있었다.
서방세계의 제일 미인인 성로마제국의 앤 공주가 사모하는 눈빛으로 방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방진의 발 한쪽을 품에 껴안은 채, 각종 손톱 손질 도구로 방진의 발톱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해주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예요.”
방 안에는 또 한 명의 절세미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속이 비치는 얇은 천 한 장을 아슬아슬하게 몸에 걸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곡선은 천에 가려져서 보일 듯 말 듯했고,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천사와 악마가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여인이 바로 소군의 정인이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에인젤이었다.
에인젤은 이 자세를 취하고서는 방진이 그림을 그리기를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방진은 여전히 음표 하나에 붓을 멈춘 채 곡을 구상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방진의 독점물과도 같았고, 그래서 소군 방진은 웬만한 여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두변의 여인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파렴치한 두변의 손이 닿은 여인들이라 방진의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방진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게 깨끗함이었고, 심한 정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소군 방진이 여인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막한 여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밀신 한 장을 소군 방진에게 건넸다.
밀신에는 딱 한 줄의 글만 있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무적 해군 전군 전멸. 두회, 고정, 방천덕 참수.’
소군이 밀신을 손에 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
푸악!
소군 방진이 피를 확 뿜어냈다.
새하얗던 밀신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함대가 전멸한 뒤, 두변은 제국급 전열함을 빼앗았다.
제국급 전열함은 배수량이 6천 톤에 달하는 거대한 전함으로, 이제 두변의 거지 함대에는 전열함이 총 2대가 된 셈이었다.
두변의 함대가 20만 대군을 싣고 위풍당당하게 동방 연합 왕국의 왕성을 향해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거대한 거룡은 하늘에서 몇 바퀴 돌더니, 다시 몇만 미터 상공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동방 연합 왕국의 왕성이 있는 곳은 동남쪽인데, 거룡은 두변과 아무런 인사도 없이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거룡은 서쪽에서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불가항력의 엄청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세계의 멸망까지 이제 37일이 남았다.
“거룡이 굉장히 오만하네요.”
예상이 말했다.
하긴, 용은 본래 오만하지.
예상이 이어서 말했다.
“만약 영도현이 내 앞에 있었다면, 나도 그를 죽였을 거예요.”
예상은 두회를 죽인 두변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 봐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두변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예상의 걱정은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맹수 호랑이도 자식은 먹지 않는다는 말은 거꾸로 해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두회는 두헌의 부친이지, 두변의 부친은 아니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왕성, 최고 궁전 안.
“전하, 두변이 승리할 수 있고, 우리의 함대를 전멸할 수 있었던 건, 거대한 용 한 마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거룡이 두변을 버리고 서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표령 도주가 말했다.
궁전 안에 놓인 왕좌는 황금으로 만든 게 아니라, 해골로 만들어진 왕좌였다.
무슨 해골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거대한 해골 위에 큰 뿔도 두 개 달려있었다.
소군 방진은 아무 말 없이 왕좌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안색은 평소보다 창백했다.
표령 도주가 말했다.
“거룡은 성화교의 성물입니다. 1천여 년 전에 사막섬에서 거대한 용의 골격을 발견했지요. 성화교 교황들은 전부 이 용의 골격이 있는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황이 아니라 이 거대한 거룡이야말로 바로 성화교 신도들이 믿는 성화교의 화신입니다. 1천여 년 동안, 성화교는 이 거룡을 부활시키려고 갖은 방법을 썼지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거룡이 이렇게 갑자기 부활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장로 기천구가 말했다.
“제가 생각에는 꼭 두변이 거룡을 깨운 건 아니라고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남미주에서 종말급 힘을 채굴해내서 거룡이 부활한 걸지도 모르지요.”
소군 방진은 전 세계와 적이 되는 것을 불사하고 남미주 식민지를 빼앗았다.
그곳엔 도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세계의 종말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표령 도주가 말했다.
“기 장로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거룡은 남미주에 있는 세계 종말급 힘 때문에 깨어난 것이고, 두변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내각 수보 방탁이 말했다.
“거룡은 확실히 두변을 멀리 떠났습니다.”
표령 도주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미 몇천 리 떨어졌고, 거룡은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거룡의 목적지는 남미주일 가능성이 크고요.”
동방 연합 왕국 대원수 방천파가 말했다.
“전하, 우리 동방 연합 왕국에는 백만이 넘는 대군이 있습니다. 비록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긴 하지만, 당장 왕국 본부에 집결할 수 있는 병력이 50만이 되지요. 이 50만 중에 15만 곤륜노 무사, 15만 보병총을 장비한 신군이 있지요. 게다가 우리에게는 500대가 넘는 정석 마포에 초특급 마포 20대가 있습니다. 두변이 우리 해군을 전멸시킨 건,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거룡 때문이고, 지금 그 거룡은 두변을 버리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힘은 여전히 두변보다 최소 열 배 강하고, 우리 왕성을 지킬 수 있을뿐더러, 두변의 주력 대군을 몰살할 수 있을 겁니다.”
소군 방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모든 힘을 집결하여 왕성을 방어하고, 두변과 결전할 준비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