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560화 (560/648)

560장: 멸세 마왕 二

800미터 높이는 되어 보이는 악마의 몸은 꼭 거대한 산과도 같았다.

4대 매마가 강력한 힘을 이용해서 마왕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마왕의 몸으로 옮겼다.

그 사이, 두변과 대종사들은 이들의 의식을 방해하지 않고 미친 듯이 하늘을 찢었다.

두변 등은 명계의 하늘을 최대한 많이 갈라서 태양 빛이 들어오게 했다.

머리를 이어붙이자, 마왕은 무려 1,000미터 높이에 달했다.

1600년 전에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악마가 드디어 돌아왔다.

“후우우.”

마왕이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끝 없이 공허함이 담긴 눈동자였다.

마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기운도 내뿜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 세계, 이 차원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 어떤 무도 강자도 마왕 앞에서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할 것이다.

“노비 방진, 의자 방진이 차원의 주인, 지구의 주인, 멸세 마왕 폐하를 뵙습니다.”

소군 방진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방진의 키는 멸세 마왕의 발등 높이보다도 작았다.

“고생했구나.”

멸세 마왕이 말했다.

소군 방진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자, 최고의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두변을 향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변, 네가 동방 왕성을 파괴하고, 동방 연합 왕국을 멸망시켜서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동방 연합 왕국은 내 장난감에 불과했다. 네가 죽을 힘을 다해서 아등바등했던 것들이 전부 하찮은 놀이에 불과했다고. 너는 보잘것없는 개미 한 마리지만, 나는 위대한 멸세 마왕의 의자이자, 이 차원의 소군이다. 넌 내 앞에서 개미 한 마리가 될 자격도 없다.

세계 종말의 전투? 하하, 너 따위 광대놈이 무슨 세계 종말의 전투냐. 너는 내 새끼손가락 하나 까딱할 자격도 없다.”

소군 방진이 마왕을 향해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멸세 마왕, 세계의 주인 폐하, 두변 저놈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제가 저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한다.”

멸세 마왕이 말했다.

소군 방진이 두변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더니,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영도현을 죽이는 데 손가락 하나를 썼지만, 네놈을 죽이는 데엔 손가락 한 마디도 쓰이지 않지. 내가 이 황관을 쓴 뒤로 얼마나 강해졌는지 아느냐? 멸세 마왕 폐하께서 다시 깨어나시는 순간, 내 힘은 열 배는 더 강해졌다.

가엾은 두변, 너는 이 세상에서 나를 우러러볼 자격조차 없다.

두변, 너를 개미 밟아 죽이듯이 짓밟아주마. 나의 힘은 너의 백 배, 천 배다.”

소군 방진의 힘은 두변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강했다.

방진이 두변을 향해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그의 몸이 점점 더 커졌고, 이윽고 그의 몸이 100미터 높이까지 커졌다.

두변의 키는 소군 방진의 발등에 닿지도 못했다.

소군 방진의 새끼손가락조차도 두변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소군 방진이 두변을 짓눌러 죽이려고 새끼손가락을 아래로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두변이 검을 뽑아들었다.

샤악.

서늘한 빛이 소군 방진의 눈앞에 번쩍 나타났다.

그 거대한 몸이 움찔 경련을 일으키더니, 방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제 가슴을 확인했다.

방진의 가슴팍에 가슴 전체를 가로로 가로지르는 금이 생겼다.

다음 순간, 가슴팍의 금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방진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의 머리부터 가슴까지가 통째로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안 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내 힘이 네놈의 천 배인데, 네놈은 분명 보잘것없는 개미인데, 내 새끼손가락으로도 네놈을 눌러 죽일 수 있는데, 도대체 왜?”

소군 방진이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다.

어떻게 두변이 방진을 이긴 건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군 방진은 두변보다 최소 천 배는 더 강했다.

두변의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군 방진은 몸이 절반으로 잘렸는데도 바로 죽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새끼손가락 하나로도 두변을 눌러 죽일 수 있었는데, 어쩌다 두변에게 몸을 잘린 걸까?

분명히 세계의 정상에 올랐는데, 차원의 제2 주인이나 다름 없었는데, 어쩌다 나락으로 떨어진 걸까?

“왜? 어째서?”

방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두변이 슬픈 눈빛으로 방진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방진, 네가 말했었지, 다른 지구에서 나를 본 적 있다고. 하지만 난 정말 너를 기억하지 못해. 네가 손가락 하나로도 나를 개미 눌러 죽이듯이 죽일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내가 일격으로 너를 죽인다는 결말은 이미 몇 개월 전에 예측할 수 있었지. 네 결말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똑같아.”

소군 방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지? 나는 너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강한데?”

“너는 이제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 나도 그걸 아는데, 네가 그걸 모르나? 너는 네 사명을 완수했으니, 네 주인이 너를 내게 선물로 준 거다”

소군 방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천 미터 높이의 마왕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진, 두변의 말이 옳다. 너는 두변만큼 총명하지가 않아. 너는 내내 꿈속에 빠져있었다. 두변도 알고 있는 것을, 당사자인 네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두변이 멸세 마왕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마왕 폐하, 세계 종말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멸세 마왕이 물었다.

“정말로 시작할 셈이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요.”

멸세 마왕이 물었다.

“이미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알면서도 시작하겠다는 것이냐?”

“예, 당연합니다.”

“그럼, 시작하지.”

두변은 곧바로 날아올라서 검으로 하늘의 어딘가를 찔렀다.

그러자, 금황색 빛 한 줄기가 명계의 하늘을 뚫고 내려왔다.

두변은 마치 등불을 밝히는 것처럼, 검으로 좌표를 찍듯이 아주 정확하게 한 곳만 찔렀다.

크오오오오!

하늘에서 천둥소리에 가까운 분노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거대한 거룡이 하늘을 찢고 나타났다.

500미터 길이의 거대한 거룡이 하늘에서 선회하자, 두변이 거룡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두변은 전처럼 거룡의 머리에 올라타지 않고, 거룡의 두개골 속으로 들어갔다.

일순간, 두변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두변과 거룡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쿠오오오!

두변과 하나가 된 거룡이 고개를 치켜들고 포효하자, 엄청난 힘이 명계를 장악했다.

하늘에 난 거대한 균열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고, 햇빛이 닿는 곳마다 파란 눈이 녹아서 사라졌다.

원래도 이곳은 멸세 마왕의 본진인데, 머리가 잘린 마왕은 1600년 동안 이곳을 자신만의 명계로 개조했다.

이런 곳에서 멸세 마왕과 전투를 벌이는 건, 무척 손해보는 짓이다.

그래서 두변과 거룡은 이 명계의 결계를 필사적으로 찢어서 태양빛을 비춤으로써 멸세 마왕의 우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멸세 마왕이 말했다.

“아주 똑똑한 방법을 쓰는군.”

두변과 하나가 된 거룡이 천천히 말했다.

“1600년 전에도 네 머리를 잘랐으니, 오늘도 똑같이 네 머리를 자를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같이 죽은 것이지.”

멸세 마왕의 말에 두변과 거룡이 말했다.

“또 한 번 같이 죽으면 되겠군.”

거대한 거룡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하늘을 찢었고, 더욱 많은 햇빛이 명계로 들어왔다.

그러다 거룡이 커다란 앞발을 힘껏 모으더니, 태양빛을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모았다. 거룡의 앞발 사이로 모인 태양빛은 이내 몇백 미터 길이의 태양검으로 변했다.

“이제야 종말의 전투같군.”

멸세 마왕이 말했다.

마왕이 거룡처럼 커다란 두 손을 모으자, 이곳에 쌓인 파란색 눈이 그의 손아귀에 응집했다. 이윽고 마왕의 손아귀 사이엔 어느새 몇백 미터 길이의 명계의 검이 생겨났다.

500미터 길이의 거룡과 1,000미터 높이의 멸세 마왕이 몇만 미터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세계 종말의 카운트다운.

3분 29초.

3분 28초.

“죽어라.”

“종말의 전투다!”

“다시 한번 동귀어진하는 것이다. 죽어라!”

500미터 길이의 거룡이 한 줄기 빛이 되어서 멸세 마왕을 향해 날아갔다.

1000미터 높이의 멸세 마왕은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1초 뒤, 두변과 거룡은 멸세 마왕의 앞에서 그의 목을 향해 태양검을 휘둘렀다.

산처럼 거대한 멸세 마왕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슈아악.

태양검이 멸세 마왕의 머리까지 1미터가 남았을 때, 검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거룡과 두변의 몸도 갑자기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멸세 마왕이 말했다.

“두변, 어차피 이런 결말일 줄 알았으면서, 왜 꼭 이렇게 하는 거지?”

이때, 두변의 머릿속에서도 똑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두변, 어차피 이런 결말일 줄 알았으면서, 왜 꼭 이렇게 하는 거지?’

이건 꿈속 시스템의 목소리였다.

두변이 물었다.

“돈키호테를 압니까?”

멸세 마왕이 말했다.

“알지. 네 머릿속에서 읽은 적 있다.”

꿈속 시스템이 말했다.

‘알지. 네 머릿속에서 읽은 적 있다.’

두 목소리가 서서히 하나로 겹쳐졌다.

두변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줄곧 꿈속 시스템이라고 불렀는데, 당신의 진짜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꿈속 시스템이 대답했다.

‘나는 정말 꿈이다.’

멸세 마왕이 말했다.

“나는 꿈속 마왕이고.”

꿈속 시스템이 바로 멸세 마왕이고, 멸세 마왕이 바로 꿈속 마왕이었다.

마왕이 소군 방진에게 말했다.

“그래서 두변이 너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는 거다. 두변은 이미 몇 개월 전에 내 정체를 파악했지만, 너는 여전히 네 꿈속에 빠져있었다.”

두변이 몇 개월 전에 이미 꿈속 시스템을 간파했다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위대한 글랜시스 교황이 두변에게 계시를 주었고, 전 숙주가 그에게 깨우쳐 주었다.

물론, 두변은 전 숙주가 자신에게 준 계시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무척 놀랐었다.

전 숙주는 꿈속 시스템에게 영혼을 빼앗기기 직전에 아주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전 숙주는 왼손은 새끼손가락과 검지를, 오른손은 새끼손가락과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때는 전 숙주가 정말 이런 걸 정보라고 준 걸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 숙주가 죽기 직전에 정보를 남길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했다.

꿈속 시스템이 아주 순식간에 전 숙주의 영혼을 삭제해버렸을 테니까.

전 숙주는 아주 찰나의 시간에 남에게 정보를 주고자 그 자세를 취했다.

즉, 다음 숙주인 두변에게 이 정보를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다.

이 손모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왼손 새끼손가락은 제일 얇은 손가락이니, 가늘 세(細)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 새끼손가락도 제일 얇은 손가락이니, 가늘 세로 읽을 수 있고, 가늘 세가 두 개나 있으니 같을 동(同)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왼손의 검지(食指)는 식(食)으로 읽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拇指)은 무(拇)로 읽으면 된다.

이 글자들을 모아서 동음으로 읽어보면, 계통시마(系統是魔: 시스템이 마왕이다.)라는 뜻이 된다.

전 숙주가 혼혈 중국인이라 중국어를 할 줄은 알지만, 매우 유창한 수준은 아니었다.

해독하라고 준 정보치고는 난이도가 정말 극악무도했지만, 어쨌든 두변은 이 암호를 해독해냈다.

위대한 글랜시스 교황은 전 숙주의 정체를 알아챘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계몽했고, 전 숙주가 시스템의 정체를 스스로 깨닫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녕 제국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

두변이 말했다.

“전 숙주가 글랜시스의 계몽을 받은 뒤, 이 세계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죠.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여완완에게 전수해주려고 했고요. 당신은 전 숙주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느끼고 그의 영혼을 삭제한 거죠.”

꿈속 마왕이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 숙주를 찾게 되어서 그를 삭제한 것이다.”

두변이 물었다.

“다음 숙주가 바로 방진이죠?”

꿈속 마왕이 대답했다.

“그렇다. 방진도 꿈속 시스템의 숙주였지.”

빛 두 줄기가 방진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왔다.

이 세계의 꿈속 시스템은 총 4가지 색깔이다.

빨간색, 파란색, 금색, 초록색.

시스템은 숙주 두변의 머릿속에 두 줄기 빛, 그리고 방진의 머릿속에 두 줄기 빛으로 존재했다.

두변이 말했다.

“소군 방진의 사명은 당신의 몸을 찾는 것이고,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당신의 머리를 몸에 이어붙이고, 부활시키는 거였습니까?”

꿈속 마왕이 말했다.

“그렇다. 그래서 방진은 막강한 과학 기술이 필요했고, 그 기술로 이 세계를 정복하고, 남미주 식민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강한 무도 집단의 힘이 필요했지. 북명검파 하나로도 부족했다. 수백 명, 수천 명 대종사의 힘이 있어야만 내 머리와 목을 이어붙일 수 있다.”

마왕을 부활시키는 데에 천 명이 넘는 대종사가 힘을 들이긴 했다.

조금 전에 내력을 흡수당한 북명검파 대종사는 500명이었지만, 그 전에 여완완, 영도현, 막한 등이 이미 수백 명 대종사의 내력을 흡수한 상태였다.

두변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진, 잘 봤지? 너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고, 이젠 그럴 가치조차 잃은 거다.”

꿈속 시스템의 두 빛줄기가 소군 방진의 머리를 떠나자, 방진은 완전히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스템이 그의 영혼을 삭제하진 않았지만, 방진은 이미 살아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안 돼. 안 돼!”

소군 방진이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꿈속 마왕이 말했다.

“숙주, 언제부터 나를 의심했나?”

두변이 대답했다.

“방진을 만나게 됐을 때부터요. 나랑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더군요. 지옥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명의 주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고, 일찍이 영도현과 결탁한 걸 보고 의심하기 시작했죠.

방진의 사명은 마왕을 깨우는 것이었고, 내 사명은 이 거룡을 깨우는 것이었겠군요.”

꿈속 마왕이 말했다.

“두변, 너는 위대한 인물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의연함, 용감함, 총명함, 모험심, 심지어 고독과 비관적인 태도까지.”

두변이 멋쩍게 웃었다.

꿈속 마왕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희생.”

마왕이 거대한 손을 허공에 대고 가볍게 젓자, 거룡과 두변이 힘들게 찢어낸 명계의 하늘이 다시 어둠으로 가득해졌다.

균열이 다시 닫힌 것이다.

“그리고 배짱도 있다.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게 모든 패를 깔 배짱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두변은 서로의 패를 알면서도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마왕이 말했다.

“두변, 너는 아주 위대하다. 글랜시스도 위대하지. 글랜시스는 네가 마왕의 숙주라는 걸 알면서도 용의 혈맥을 네게 줬고, 거룡의 통제권을 네게 줬다. 이미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발악을 해본 거지.”

글랜시스는 전 숙주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의 정체를 알아채서 그를 유배 보냈다.

그리고 두변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글랜시스는 두변의 정체를 알아챘지만, 교황의 자리와 용의 혈맥을 두변에게 주었다.

이런 일은 위대한 용기와 신임이 필요한 일이다.

글랜시스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하늘이 선택권을 준 것 같지만, 사실은 선택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왕의 숙주가 두 번이나 찾아왔을 때 글랜시스의 죽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세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두변을 믿기로 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두변에게 남겨주었다.

글랜시스가 말했던 것처럼, 하늘은 농담을 좋아한다. 갑자기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오늘부터 네가 구세주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늘이 멸세의 사자에게 ‘오늘부터 네가 구세주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웃긴 농담이 있을까.

꿈속 마왕이 말했다.

“두변, 너와 글랜시스 교황은 위대하다. 네가 내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네가 반항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내가 너를 수복할 테니까. 그런데 너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어코 이 전투를 만들어 냈지. 개미와 마왕의 전투인 걸 알면서도 말이야.”

두변이 말했다.

“그렇죠. 돈키호테가 풍차에 덤벼든 것보다도 못한 수준이죠.

하지만 글랜시스 교황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구세 같은 건, 실패해야 정상이라고. 성공하는 게 이상한 거라고 말이에요.”

꿈속 마왕이 말했다.

“둘 다 참 위대한 인물들이지만, 그 모든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두변, 네가 운명을 항쟁한 건 무척 용감한 일이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대단한 용감함과 용기여도, 절대 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용감한 두변, 너는 나의 제일 성공적인 숙주이자, 제일 실패한 숙주다.

너의 항쟁은 개미가 열심히 더듬이를 움직이면서 반항하는 수준일 뿐이다.

아주 비장하지만,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

두변, 네가 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하다고 해도, 결국은 내 도구에 불과했어.

방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소리지.

너는 방진보다 좀더 고귀하고 위대하지만, 누가 이 먼지가 다른 먼지보다 더 고귀한지 구별하는 걸 본 적 있나?”

세계 종말의 카운트다운.

15초.

13초.

9초.

멸세 마왕이 이어서 말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설득할 줄 알았나? 내 사단에 들어오라고 부탁할 줄 알았나? 그런 건 다 쓸데없는 기대다. 너는 내게 먼지 한 톨에도 못 미치는 존재다.

이제 세계의 종말이 드디어 시작된다.

내가 천 년이 넘게 기다린 것도, 열 명의 숙주를 키웠던 것도, 다 오늘을 위해서다.

오늘부터 이 세계는 천마족의 것이다.”

카운트다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