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장: 혼백이 되살아나다
현대 지구의 식물인간 두변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다른 식물인간들처럼, 두변은 꼭 긴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또 어쩌면 간혹 보이는 기적처럼 깨어날 것도 같았다.
두변의 머릿속은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그의 혼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몸은 녹슬어버린 기계처럼 두변의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어서기는커녕, 눈을 뜨는 것도 무척 힘들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나의 딸, 나의 연인!’
두변은 이 말이 꼭 힘과 의지를 가져다주는 주문인양 계속해서 되뇌었다.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머릿속에서 같은 말을 수백 번, 수천 번 외치자, 정말로 강한 힘을 얻은 것처럼 천근만근 하던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야 속의 모든 게 흐려 보였고, 아무것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두변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주위의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낡고 버려진 버스로, 곳곳이 칠이 벗겨지고 녹슬어 있었다.
그리고 버스 안의 모든 좌석은 이미 죄다 뜯겨서, 버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변은 혼자 덩그러니 녹슨 철판 바닥에 누워있었다.
차창 밖은 몹시 어두웠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변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식물인간이 된 지 너무 오래된 터라, 사지가 퇴화되고 신경이 거의 마비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혼백이 신체를 빠져나갔던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아직 신체를 제 뜻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효효, 우리 아가!
내가 사랑하는 여인 임야소!
두변의 뇌리에는 이 말들만 떠올랐고, 이 말들을 통해서 강한 의지와 정신력을 얻었다.
두변은 몇백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손가락을 움찔거릴 수 있게 되었다. 뒤이어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성공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두변은 몸의 감각을 차츰 되찾고 있었다.
두변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허기와 갈증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굶고, 물을 마시지 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이곳은 어디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왜 버려진 버스에 누워있는 거지?’
두변은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곳은 현대 지구였다.
세계의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을 테니, 두변은 세계 종말이 도래한 뒤의 상황을 보고 싶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굶주림과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몸에서는 탈수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랜 탈수 때문에 신체 기능도 현저히 떨어졌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물을 마시는 거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탈수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두변은 두 가지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첫째, 예전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꾸준히 돌봐줬고, 세계의 종말이 온 뒤에도 돌봄을 받았다. 안 그러면 자신은 벌써 아사했거나, 탈수로 죽었을 테니까.
둘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계기로 두변을 돌봐주던 사람이 두변을 낡은 버스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만약 지금 깨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정말로 이 낡은 버스에서 소리소문없이 죽었을 것이다.
살고 싶다면, 물을 마셔야 했다.
물을 마시려면, 무조건 일어나서 이 버스에서 나가야 했다.
하지만 두변은 너무 오랜 시간을 반신불수 상태로 지낸 터라, 아무리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두변은 다시 눈을 감고 자신의 혼백을 느꼈다.
두변은 대녕 제국이 있던 파생된 차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했고, 거룡과 함께 꿈속 마왕과 동귀어진 했던 장면도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공백 그 자체였다.
‘혼백이 소멸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분명히 혼비백산했을 텐데, 혼백이 어떻게 다시 돌아온 거지?’
두변은 자신의 정신 영역을 둘러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혼백이 불완전하다는 걸 발견했다. 자신의 혼백이 다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아주 조금 모자랐고, 무언가가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자신의 정신도 아니었고, 자신의 기억도 아니었다.
정신 에너지로 보이는 그 무언가는 두변의 혼백과 확연히 달랐고, 끝도 없이 광활하게 퍼져있었다.
이 정신 기억은 오래되었고, 난해했고, 신비로우면서도 고귀했다.
정신 기억이 고귀한 경우도 있나?
그렇다. 어떤 세상엔 고귀한 정신 기억도 존재한다.
꼭 자신이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궁전에 들어선 한낱 미미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신장이 2미터 정도라면, 정신 기억의 궁전은 만 미터 높이였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이런 환경에 경외심을 갖게 된다.
이게 바로 고귀하고 신비한 정신 기억이었다.
그러다 두변은 금새 깨달았다.
이건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이구나.
상고 시대 용왕의 기억이 자신의 혼백과 융합된 건가?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이?
두변은 사실 아직도 상고 시대 용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두변이 알고 있는 건, 세상을 두 번이나 구했던 그 거룡도 상고 시대 용왕의 후예이자, 백성이라는 것뿐이다.
상고 시대 용왕은 어디서 온 존재일까?
머나먼 우주? 아니면 다른 곳?
어찌 됐든,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에는 엄청난 기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기밀은 새로운 문명, 혹은 무공, 혹은 다른 무언가에 관한 것일 테고.
아무튼,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고, 세계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었다.
두변이 고귀하고 신비로운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을 읽으려고 시도하는 순간.
콰아앙!
일순간, 두변의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폭발했고, 하마터면 그의 혼백이 다시 혼비백산할 뻔했다.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은 두변의 열람을 거부한 게 아니라, 두변의 정신력이 너무 낮아서 열람할 수가 없었다.
현재 두변의 정신력으로는 방대한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정신력이 더 강해지면,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이 책을 읽듯이 순조롭게 읽힐 것이다.
두변은 저도 모르게 조금 흥분했다.
지금 그의 정신력이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닌데 상고 시대 용왕의 정신 기억을 읽지 못하는 걸 보면, 이 안에 든 기밀이 엄청나다는 걸 뜻하니까.
용왕의 백성인 거룡도 그렇게 대단했는데, 용왕의 정신 기억은 또 얼마나 더 대단할까.
하지만 두변에게 시급한 건, 머릿속에 있는 용왕의 정신 기억을 열람하는 게 아니라, 얼른 버스 밖으로 나가서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가 깨어난 시간은 어느새 24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24시간 동안, 아무도 그를 보러오지 않았고, 심지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스산한 바람 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자신을 돌보던 사람은 왜 자신을 이 낡은 버스에 버려둔 걸까?
두변은 24시간 동안 눈을 감은 채 구양진경을 운용하며 주위의 현기 내력을 흡수했다.
대녕 제국에서 배웠던 그 구양진경 말이다.
식물인간이었던 두변의 몸은 더 이상 대녕 제국의 마화한 두헌의 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양진경은 그의 정신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두변이 구양진경을 시전하면서 놀랐던 건, 이곳의 현기 농도가 대녕 제국보다 몇 배는 더 높다는 것이었다.
이건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현대 지구에 세계 종말이 이미 벌어졌고, 이계의 차원 에너지가 1600년 전보다 훨씬 더 대량으로 현대 지구에 들어왔다는 의미니까.
구양진경의 효과는 대단했다.
두변이 24시간 동안 현기를 흡수하자, 손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두변은 뒤늦게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꼈다.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변이 꺼낸 건 가족사진이 담긴 유리 액자였다.
사진 속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혼수상태의 식물인간 두변, 약혼녀 임야소, 그리고 딸 두효.
두변은 드디어 처음으로 현대 지구의 딸 두효를 보게 되었다.
‘정말 작네. 너무 예쁘고 착하게 생겼구나.’
‘임야소는 여전히 아름답고, 못 본 사이 많이 씩씩해졌네.’
두변이 기억하는 임야소는 어리광을 자주 부리고, 고집이 센 데다 온실 속 화초 같았다.
그런데 사진 속 임야소의 모습은 든든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딸이 두변의 품에 안긴 채, 입술을 쭉 내밀고 두변의 왼쪽 뺨에 입맞춤했고, 임야소도 두변의 품에 기대어서 그의 오른쪽 뺨에 입술을 내밀었다.
사진 속 식물인간 두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 사진은 병원 병상에서 임야소가 셀프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임야소가 자살소동을 부려서 두변을 되찾은 후 그는 보름 동안 병원에서 요양했고, 퇴원하는 날 임야소가 핸드폰으로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참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다만, 사진 속의 두변은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래도 사랑을 듬뿍 담은 채 환하게 웃는 두 얼굴 덕분인지, 두변의 얼굴에도 생기가 도는 듯했다.
두변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고, 심장이 녹고 또 녹는 것만 같았다.
두변이 사진을 가슴에 얹은 뒤,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우리 아가,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정말 미안해.”
액자를 너무 세게 누르고 있어서인지 숨쉬기가 조금 힘들어졌다.
두변은 대녕 제국이 있는 파생된 차원을 구했지만, 간접적으로 현대 지구를 파괴했다.
하지만 이 현대 지구에는 자신의 약혼녀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이 있었다.
약혼녀와 딸은 식물인간이 된 두변을 수년 동안 버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우리 아가, 아빠가 널 찾으러 왔다. 앞으로 아빠가 다시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마. 내가 영원히 널 보호해주겠어.
내 사랑, 내가 당신을 찾으러 왔어!”
두변은 액자를 다시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두변의 몸뚱이는 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가족의 존재 덕분에 마음속에서부터 힘이 솟구쳤다.
두변은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킨 뒤, 버스 밖으로 나왔다.
버스가 세워져 있던 곳은 산속 동굴이었다. 그래서 차창 밖이 항상 어두웠던 것이다.
두변은 동굴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동굴 안은 적막만 흘렀고, 그 흔한 벌레가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세계 전체가 소리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아서, 금방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바깥세상을 보게 되었다.
역시 이 지구에도 세상의 종말이 일어났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창백한 초록색이었고, 초록색 구름이 태양을 가린 터라 천지가 어두컴컴했다.
지구 전체에 회색 안개가 낀 것처럼 회색빛으로 답답했다.
저 멀리 산과 언덕이 보였지만, 나무든 풀이든 푸릇푸릇한 초록색이 아니고 꼭 부패해서 죽은 생물체 같았다.
쿠구구궁.
파지직.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내리쳤다.
초록색 번개가 하늘을 유영하는 용처럼 하늘을 쩍 찢었다.
방사능이었다.
‘방사능이라니? 이계의 에너지인가? 어떻게 이 세계에 방사능 번개가 있는 거지?’
두변은 곧바로 생각했다.
이 지구의 강대국들이 핵폭탄을 이용해서 이계의 적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에 핵겨울 같은 현상이 나타났고, 방사능까지 유출되었다.
두변은 몇십 리 밖의 산 아래에 작은 촌락이 있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촌락은 폐허처럼 조용했고, 아무런 생기가 없었다.
‘이 지구에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안 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두변을 돌봐주던 사람은 불과 며칠 전에 두변을 버스 안에 버려두었다.
식물인간 두변을 버스에 버렸다는 건, 그가 알아서 죽기를 바란 것이다.
이어서 두변은 더욱 가까운 산 아래서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높고 견고해 보이는 담장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마을에는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두변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저 안에 사람이 있는 건가?
사람이 있으면 돼. 정말 다행이군. 지구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어.’
두변은 굶주림과 갈증을 참으면서 구양진경으로 흡수한 현기 내력을 이용해 산 아래로 달려갔다.
이 마을은 전투용 보루처럼 높은 담장이 세워져 있었고, 담장 위에는 정찰소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작은 취락일 것이다, 말세의 작은 취락.
두변의 시야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특수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소총을 든 채 담벼락 위에서 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든 소총이 뭔가 이상했다.
두변은 현대 지구에서 저렇게 원시적이고, 거칠고, 기이하게 생긴 소총을 한 번도 본 적 없다.
높은 담장에서 정찰하던 정찰병이 곧바로 두변을 발견하고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멈춰라. 너는 인간이냐, 불사족이냐? 인간이라면 당장 두 손을 위로 올려라.”
정찰병이 큰소리로 외치자, 두변은 곧바로 두 손을 높이 든 채 천천히 마을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담장 위에 있던 사람이 두변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당신은? 어떻게 아직 죽지 않았지? 게다가 깨어나기까지 했어?”
이들은 두변을 알아보았다.
마을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상한 소총을 들고 있던 건장한 사내도 두변을 귀신 보듯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두변이 깨어난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변이 주머니에서 액자를 꺼내면서 물었다.
“저기, 제 아내를 본 적 있습니까? 제 딸은요?”
정찰병이 사진을 대충 쳐다보았다.
두변은 긴장되어서 손에 땀이 쥐어졌다.
그는 사람들이 아내나 딸을 본 적 없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당신 딸은 당연히 본 적 있죠.”
정찰병이 말했다.
두변은 크게 기뻐했다.
내 딸이 아직 살아 있구나!
두변이 물었다.
“제 딸이 여기에 있습니까?”
정찰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디 있습니까? 제발 제 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나를 따라오십시오.”
정찰병이 두변을 데리고 취락 안으로 들어갔고, 마을의 문이 곧바로 닫혔다.
담장 위에 있던 다른 정찰병들은 꼭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것처럼 다시 경계 태세로 주위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