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장: 강인한 내 딸
취락 안으로 들어가자, 두변은 이곳에 있는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은 몇백 명 정도로 파악했다.
사람들은 전부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안 감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사람들의 눈빛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콜록, 콜록.”
곳곳에서 사람들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노년층으로, 해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은 거칠고 새까맸다.
어린아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정찰병이 두변을 데리고 취락 중앙의 저택으로 갔다.
이 저택은 몹시 크고 견고해 보였지만,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나갔고, 아주 허름해 보였다.
“영주(領主), 두 선생이 깨어났습니다. 딸을 찾으러 왔다더군요.”
정찰병이 말한 뒤,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이 여인은 냉랭한 외모에 서른 살이 넘어 보였고, 몸매는 건강미가 넘쳤다.
하지만 이 여인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어서 사람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이 여인도 특수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심하게 닳아 있었다.
여인은 두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두 선생, 아직 죽지 않은 건가요? 게다가 깨어나기까지 하고?”
영주가 물었다.
두변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서 말했다.
“제 딸아이 두효는 어디 있습니까? 어서 두효에게 데려다주십시오.”
여인의 눈빛이 복잡해지더니, 난감한 어투로 말했다.
“갑시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봐야죠.”
두변은 여인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본다니?
무슨 뜻이지? 설마 효효가 병이라도 난 건가? 심하게 다친 건가?
두변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제 딸이 어떻게 된 겁니까?”
두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주가 대답했다.
“사형 판결이 났습니다.”
두변은 자신의 귀를 믿지 못했다.
효효가 사형에 처한다고? 말도 안 돼!
두변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나랑 농담하는 겁니까? 제 딸은 이제 대여섯 살입니다. 그렇게 어린아이에게 사형이라니요. 다들 미쳤어요?”
영주는 두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날 따라오세요.”
영주가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두변은 조용히 영주와 함께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두변과 영주가 도착한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음산한 지하 감옥 안.
영주가 한 철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 딸은 저기 안에 있어요.”
두변은 숨을 참고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철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어딘가 고집이 세 보이고, 개성 있고, 무척 아름다운 소녀가 두변의 시야에 들어왔다.
소녀의 외형만 보아도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행관들이 소녀의 목에 줄을 감고 있었다.
소녀는 곧 교사형에 처해질 예정이었다.
효효? 이 소녀가 우리 아가 두효라고?
두변의 기억 속에 있던 딸은 대여섯 살이었는데, 작고 어린 두효는 어느새 출중한 소녀가 되어있었다.
소녀는 교사형에 처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얼굴에 고집이 가득했다.
소녀는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소녀의 눈빛이 두변에게 향했다.
일순간, 거대한 빙산이 산산조각이 나고, 사르르 녹아버린 것 같았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울먹였다.
“아빠, 아빠!”
바로 다음 순간, 소녀가 자신의 목에 감겨있던 밧줄을 힘으로 뜯어버리고 두변을 향해 달려왔다.
소녀는 두변의 품에 안기면서 그를 꼭 안았다.
그녀는 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아빠, 아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죠? 이거 꿈 아니죠?
매일 하늘에 기도했어요. 아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요. 무슨 대가여도 좋으니, 다 치를 수 있다고요.”
소녀의 힘이 어찌나 센지, 이제 막 식물인간 신세를 벗어난 두변은 자신의 몸 곳곳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를 들을 지경이었다.
이 딸 때문에 갈비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두변이 기억하던 딸은 몸이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의 두효는 날씬하지만 민첩해 보였고, 그녀가 입고 있는 것도 전투용 가죽 갑옷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맨손으로 굵은 밧줄을 뜯어낸 걸 보니, 두효는 못 본 사이에 무척 힘이 세진 모양이었다.
“효효, 네 아빠 뼈가 다 으스러지겠다.”
두변의 뒤에 서 있던 영주의 말에 두효는 그제야 두 팔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두변을 껴안았다.
그녀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변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렸을 때 매일 아빠의 품에 안긴 채 동화책을 읽었고, 아빠가 깨어나서 자신을 안아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십여 년 동안 묵혀온 그녀의 숙원이 드디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아빠가 드디어 깨어났고, 두 팔로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두효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두변은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눈물을 흘렸고, 살면서 이렇게 울어본 적 있나 싶을 정도로 오열했다.
두변은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온 세상을 다 가질 정도로 행복했었다.
딸의 힘이 너무 세서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트릴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부녀는 30분이 지나도록 껴안고 있었고, 나중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채 서로를 놓아주었다.
두변이 손을 뻗어서 딸의 예쁘장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두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우리 아가, 언제 이렇게 컸어? 우리 딸 진짜 예쁘네. 아빠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뻐.
미안해, 효효. 아빠가 네가 크는 걸 지켜보지도 못했네. 네가 태어났을 때, 네가 아기일 때, 네가 유년일 때를 다 놓쳤어.”
두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영주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고개를 치켜들었다.
딸 두효가 사랑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아빠는 놓치지 않았어요. 아빠는 언제나 제 곁에 있었고, 제가 성장하는 내내 제 옆을 지켰어요.”
두변은 딸의 말을 알아들었다.
자신이 식물인간이긴 해도, 아빠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두효에겐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었다는 의미이리라.
“아가, 엄마는?”
두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취락에 도착한 뒤, 딸만 만났지 임야소를 보진 못했다.
그는 자기가 상상한 나쁜 소식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두효가 고개를 저었다.
“아빠, 미안해요. 제가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언제?”
“세계의 종말이 도래했던 날, 저는 다섯 살이었어요. 그때 집으로 달려가서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엄마가 오길 기다렸지만, 며칠을 기다려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처음엔 제가 아빠의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혔지만, 나중엔 집에 있던 먹거리도 다 떨어졌고, 아빠의 유동식도, 성인 기저귀도 동이 났어요.”
두변은 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두효는 엄마가 아빠를 돌보는 걸 어깨너머로 봐온 터라, 저도 모르게 두변의 몸을 닦고, 유동식을 먹이는 걸 할 줄 알았다.
그때 두효의 나이는 불과 다섯 살이었다.
두효가 이어서 말했다.
“저는 집에서 엄마가 돌아오길 계속 기다렸어요. 밖은 항상 소란스러웠고,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불사족으로 변했어요. 불사족들이 매일 우리 집 문을 두드릴 때 정말 무서웠어요. 하지만 아빠의 품에 안겨있으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지더라고요. 그런데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엄마는 오지 않았고, 저는 기절해버렸어요.”
당시 두효는 너무 굶어서 혼절했다.
“다시 깨어났을 땐, 제가 유치원의 통원버스에 타고 있더라고요. 장 선생님이 저를 구해줬어요. 장 선생님은 제 유치원 선생님이신데, 선생님의 남편분이 통원버스를 운전했고, 덕분에 H시를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 뒤로는 계속 유랑 생활을 해왔고요.”
두효는 세세한 얘기는 하지 않고 그저 삼켰다.
두변은 딸아이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세상의 종말이 들이닥쳤을 때, 두변 같은 식물인간은 짐 덩이일 것이다. 하지만 딸은 다섯 살 때부터 장 선생과 함께 두변을 보호하고 데리고 다녔다.
두효가 말했다.
“저는 십여 년 동안 아빠와 장우함 이모와 함께 지냈어요. 종말이 온 뒤로는 엄마를 본 적 없고요.”
두효가 가슴 앞주머니에서 작은 액자를 꺼냈다.
작은 액자에는 두변이 가진 가족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두변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는 가족이 세 명이었는데, 두변이 깨어난 뒤에는 오직 둘만 남게 되었다.
두변은 딸에게도 무척 미안했지만, 임야소에게는 말로 못 할 정도로 미안했다.
그녀는 인간쓰레기인 자신을 대소변까지 치워주면서 정성스럽게 돌봐줬다. 이 빚은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두변이 다시 두효를 품에 안았다.
“아가, 엄마는 아주 강인한 사람이야. 엄마는 분명히 죽지 않고 어디선가 우리를 찾아다니고 있을 거다. 아빠가 맹세할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얼마나 긴 시간을 할애해도 좋으니, 꼭 엄마를 찾아오겠다고 말이야. 우리 가족은 다시 함께할 수 있어.”
두효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효가 영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영주, 제가 풍엽에서 세운 공훈을 봐서라도 제 아버지를 잘 보살펴주세요. 제 모든 공훈 포인트를 아버지에게 양도할게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장우함 이모를 구할 방법을 찾아주세요.”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빠가 살아났으니, 이제 네 아빠도 우리 풍엽령의 일원이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네 아빠를 보살펴주겠다.”
두효가 말했다.
“감사해요, 영주. 그때 영주께서 나서지 않으셨다면, 저와 장우함 이모는 일찍이 죽었을 거예요. 그 뒤로 저를 제자로 거둬주신 뒤, 물심양면으로 저를 키워주셨어요. 만약 영주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왜소하고 병약한 아이로 자랐을 거예요. 아마 일찍이 아사하거나 병사했겠죠.”
영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가 뭐지? 왜 서욱(徐旭)을 죽인 거야? 네가 죽는 건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과도 같다는 걸 알면서도 왜?”
두효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에요. 제가 그놈의 목숨을 살려줬던 건 힘도 없고, 불쌍해서예요. 제가 공훈 포인트로 그놈을 키웠고, 서욱에게 시킨 일은 아빠를 돌봐달라는 일 하나였어요. 그런데 서욱은 제가 없는 틈을 타서 아빠를 학대하고, 아빠의 음식을 빼돌리고, 아빠의 몸 위에 대소변까지 봤어요. 서욱이 아빠를 학대하는 걸 발견하고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어요. 그저 흠씬 패서 혼쭐을 내주고 싶었던 건데, 너무 화가 나서 힘을 조절하지 못한 나머지 그놈을 때려 죽었어요.”
‘또 나 때문이야?’
두변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그는 이 이야기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장우함 선생, 두변, 두효 세 사람은 십여 년 동안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힘겹게 살아갔다.
처음에는 장우함 선생이 어떻게든 이들을 먹여 살렸는데, 나중에는 두효가 크면서 영주의 제자가 되어 훌륭한 전사가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 두효가 세 사람의 의식주를 책임졌을 것이다.
이전에는 장우함 선생이 식물인간 두변을 돌봤고, 지극정성으로 그를 돌봤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장 선생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잡혀갔다.
두효는 두변과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전장에 나가서 공훈 포인트를 얻어야만 했고, 자신이 구해줬던 서욱이라는 소년에게 두변을 돌보는 임무를 주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식물인간 두변을 학대했고, 두효가 이를 발견하고는 서욱을 홧김에 때려죽인 것이다.
이곳의 영주는 두효를 무척 총애했지만, 이곳에선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걸 규범으로 세웠다.
그래서 서욱을 죽인 두효는 교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도래했는데, 약육강식의 환경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엄격한 법률이 존재할 리 없는데?’
두변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태강 제국의 영지에서는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서욱을 죽이고 싶진 않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저는 서욱을 때렸을 겁니다.”
두효가 말한 뒤, 고개를 들고 두변을 바라보았다.
“아빠, 제가 여태 쌓아둔 공훈 포인트라면, 아빠는 이 영지에서 2년은 족히 살 수 있어요. 2년 동안 몸조리 잘하시고, 이곳 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보세요. 아버지는 꼭 살아남아서 엄마를 찾아야 해요. 제가 죽기 전에 깨어난 아빠를 볼 수 있었으니, 전 그걸로 충분해요.”
두효는 두변을 돌보는 게 습관화되었다.
그녀는 이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두변을 보호하려고 했고, 그의 앞날을 걱정했다.
두변은 딸을 만나자마자 딸을 잃게 생겼다.
두변은 더욱 절망했다.
두효는 나쁜 놈을 죽였을 뿐이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교육 방식이란 말인가?
두변이 두효의 이마에 입맞춤한 뒤, 몸을 돌려서 영주에게 물었다.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는 건, 어느 나라의 율법입니까?”
“태강 제국이요.”
영주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두변은 벌써 태강 제국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들었다.
이곳은 현대 지구인데, 태강 제국이 웬 말인가.
“태강 대제께서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영지에서는 아무도 약자를 괴롭혀선 안 된다고요. 무공 수준이 뛰어난 전사여도, 혁혁한 공훈을 세운 사람이어도 어김없이 교사형에 처합니다. 인류의 문명은 벼랑 끝에 있습니다. 불사족이 대부분 세상을 통치했고, 우리는 태강 대제의 보호를 받았기에 살아남은 겁니다. 이 율법은 태강 제국의 근간이고, 이 율법이 흔들리면 태강 제국의 질서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약한 자들은 개돼지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고, 마지막 인류 문명도 완전히 짓밟혀서 없어지겠죠.
두효가 서욱을 죽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두효가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곳 영지도 질서가 없는 곳이 됩니다. 영지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살인이 난무할 겁니다. 난세일수록 엄격한 율법이 필요합니다.”
난세일수록 엄격한 법률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말은 천고의 세월이 지나도 지나도 옳은 말이긴 했다.
이것은 거의 절대 옳음에 가까운 진리였다.
영지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율법은 절대적이었다.
이 절대적 율법이 있어야만 사람들이 안전함을 느끼고, 귀속감과 응집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변이 영주가 된다고 해도 지금처럼 이 율법을 절대법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율법에 따라 목숨을 내놔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딸이었다.
“강적들이 태강 제국 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불사족, 변이 약탈자, 꼭두각시 연맹, 그리고 악몽 부족까지. 만약 엄격한 법으로 사람들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적이 우리를 공격하기도 전에 제국 전체가 내부 분열로 멸망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이 제국의 보호를 받는 천만 인구가 무덤도 없이 죽임을 당할 거예요.”
영주가 설명했다.
두변이 물었다.
“예전에 있던 세계 각국의 정부는 어떻게 됐습니까?”
영주가 대답했다.
“없어진 지가 언젠데요.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뒤, 대부분 국가가 1년 이내에 멸망했습니다. 이제 태강 제국만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에요.”
두변은 더욱더 의아했다.
21세기 현대 지구의 문명은 꽤 많은 발전을 했는데, 어째서 각 국가가 1년도 채 못 버티고 멸망한 걸까.
심각한 방사능 유출이 있는 걸 보니, 그 사이에 분명히 핵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태강 제국이라는 제국은 어떤 세력일까?
태강 제국의 영지는 얼마나 넓고, 태강 대제는 누구인가?
두변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딸을 구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무력을 써서 딸을 빼앗아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 온몸의 근육이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고, 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아이가 없어요. 두효는 내가 제일 아끼는 학생이고, 가장 훌륭하게 성장한 학생이에요. 난 두효를 후계자로 삼기까지 했으니까요. 난 두효가 죽는 게 누구보다 비통한 사람이에요.”
영주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
“서욱이라는 소년이 잘못한 게 먼저잖습니까. 효효는 고의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입니다. 다시 판결을 내리면 안 될까요?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이라면, 절대로 두효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두변이 다급하게 말했다.
“두 선생, 지금 우리에게 법정이나 재판장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영주가 되물었다.
하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지금은 말세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발버둥 치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고, 깨끗한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누가 법률을 연구하고, 번거롭고 불필요한 형식 절차를 따질까.
이들에게는 오직 엄격한 율법만이 존재하고, 회색 지대 없이 오직 흑과 백으로만 잘잘못을 따졌다.
“아빠,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는 게 무서운 건 아니에요. 사람을 죽이고 나서 도망칠 기회가 있었어요. 영주와 정찰 전사들도 일부러 제게 탈주로를 마련해줬죠. 하지만 저는 도망치지 않았어요. 이곳은 우리의 집이고, 우리 인류의 희망이에요. 만약 살인을 저지르고도 목숨으로 갚지 않는다면,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말 거예요. 제가 살아가는 대가가 그렇게 큰 혼란을 일으키는 거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두효가 침착하게 말했다.
두변이 딸 두효를 바라보았다.
예쁘장하고 야윈 두효의 얼굴에 고집과 정직함이 가득 묻어났다.
두변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두변이 영주를 향해 말했다.
“태강 제국 율범의 범위 내에서 내 딸이 죽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까?”
두변이 현대 지구에 온 이유가 바로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함이고, 인류 문명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태강 제국이라는 제국에는 절대적인 율법이 있었고, 태강 제국이 마치 이 세계의 마지막 인류 문명인 것 같았다.
두변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이 많았지만, 희망을 품고 있었다.
만약 태강 제국의 율범 범위 내에서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있긴 있는데, 거의 해낼 수 없는 방법이에요.”
영주가 대답했다.
“그게 뭡니까?”
“S급 공훈이요.”
“정확히 그게 뭔지 설명해주십시오.”
“정확히 수량화하자면, 사람 1천 명을 구하면, 한 사람의 사형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S급 임무를 달성하면, 사면권을 하나 얻는 거죠. 이건 태강 제국의 율법에 있는 조항이에요.”
“이 영지에도 S급 임무가 있습니까?”
“영지는 S급 임무를 배정받을 수 없는 단위예요. 오직 성주(城主)만이 S급 임무를 배정할 권력이 있죠.”
‘성주? 이건 또 무슨 관직이지?’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영주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 풍엽령은 빙계성 소속이에요. 빙계성의 통치자는 근방 몇백 리 내의 수십 개 영지를 관리하죠.”
두변이 물었다.
“그럼 빙계성이라는 곳은 종말 이전엔 어느 지역이었습니까?”
“강서성 옥산현, 절강성 개화현, 상산현, 강서시 중앙 구역이에요. 대략 현 단위의 지역을 두 개 반 합친 정도의 크기고, 5,000제곱킬로미터 정도 돼요.”
영주의 설명대로라면, 이곳은 두변이 알고 있는 지역이었다.
“지금 빙계 성주가 발표한 S급 임무가 있습니까?”
“있어요. 미지의 괴물을 죽이는 임무인데, 이 괴물이 두 영지의 1천 명 사람을 죽였어요. 성주께서 무사를 세 번이나 파견했는데, 수십 명 고급 무사가 전부 죽었어요.”
“무슨 괴물입니까?”
“그건 우리도 몰라요. 하지만 그 괴물이 두 영지에 있던 1천 명 사람을 죽일 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어요. 영지에는 그 어떤 전투의 흔적도 남지 않았고, 1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렸어요. 심지어 영지에는 사람들이 발버둥 친 흔적조차 없었죠. 사람들은 전부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죽었고, 칠규에서 피가 흘렀어요. 얼굴은 심하게 변형되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고요. 우리는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속성의 괴물인지, 어떤 종족인지조차 몰라요.”
그렇게 끔찍한 괴물이라고?
영주가 이어서 말했다.
“두 영지에는 9급 무사 3명, 8급 무사 열댓 명, 7급 무사 수십 명이 있었는데,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죽은 모양이에요. 성주께서 보냈던 수십 명 고급 무사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죠.”
두변은 9급 무사가 뭔지 몰랐지만, 지금 자신의 신체 수준은 0급 무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두변의 몸은 지금 툭 치면 쓰러질 정도로 허약했고, 2, 30근짜리 물건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러니 그 미지의 괴물이 더없이 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1천 명을 죽인 걸 보면, 그 괴물은 아마 정신류의 괴물일 것이고, 물리적으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닐 것이다.
두변이 물었다.
“9급 무사가 뭡니까?”
영주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녀가 맨손으로 벽에서 벽돌 하나를 뽑아내더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벽돌을 으스러트렸다.
이어서 그녀는 굵은 쇠사슬을 가져오더니, 양손으로 쇠사슬을 당겼다.
툭.
굵은 쇠사슬이 얇은 실마냥 끊어져버렸다.
두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강하다고? 힘이 얼마나 센 거야
세계 종말이 15년이나 지났는데도 인류가 살아있는 이유가 있었네. 벌써 이만큼 진화했다니.
정리해보자면, 이렇게 강한 무사들 수십 명이 그 괴물을 죽이러 갔는데 전부 돌아오지 못했다는 거지?
그 미지의 괴물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두변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S급 임무는 그거 하나뿐입니까?”
“당연하죠. 영주로서 이런 S급 임무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요. 없으면 더 좋고요. S급 임무가 많다는 건, 재앙이 들이닥쳤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 괴물이 얼마 전에 우리와 불과 30리 떨어진 난호영을 박살 냈어요. 15일 전에 소리 없이 그 영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죠.”
“정찰병들이 전시 상태처럼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하는 것도, 이곳 사람들의 눈에 절망이 가득했던 것도 그 괴물 때문입니까?”
“맞아요. 그 괴물의 다음 목표가 바로 우리 풍엽령일 가능성이 농후해요. 우리는 난호영처럼 전투력을 갖춘 영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난호영도 소리 없이 당했으니, 우리도 소리 없이 해치워지겠죠.”
더욱 무서운 건, 그 누구도 그 괴물을 본 적 없다는 것이다.
어떤 외형을 가졌는지, 어떤 속성인지도 모르고.
미지로 인해 느끼는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두변이 말했다.
“그 괴물을 죽이기만 하면, S급 임무를 완수하기만 하면, 딸 효효가 무죄로 풀려납니까?”
“맞아요.”
영주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두변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제가 그 S급 임무를 받겠습니다. 그 괴물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가서 한 번 만나봐야겠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조금 전에 깨어난 식물인간이 무슨 수로 그 미지의 괴물을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수십 명 고급 무사도 돌아오지 못했는데, 두 영지에 있던 사람들 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소리 없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렇게 강한 괴물을 조금 전까지 식물인간이었던 자가 만나러 가겠다고?
사람들은 두변이 미친 게 아닐까 걱정했다.
두변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린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에요. 저는 꼭 가야만 합니다. 그 누구도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두변을 바라보던 두효의 눈가에 행복의 눈물이 고였다.
두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정말로 저도 아빠를 막지 못하는 건가요?”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를 향한 아빠의 사랑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두효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빠도 제가 아빠를 향한 사랑을 막을 수 없어요. 저도 갈래요. 저도 아빠랑 같이 갈래요.”
이때, 허공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귀의 소리처럼 사람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하하, 드디어 찾아냈다!”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힘이 풍엽령의 상공을 뒤덮었다.
일순간, 사람들은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두변도 온몸이 굳어버렸고,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깔깔깔!”
괴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두변은 자신의 앞에 있던 몇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변형되더니, 칠규에서 피가 흐르면서 공포에 질린 채로 죽는 걸 보았다.
끔찍한 미지의 괴물이 온 것이다.
천 명도 넘는 사람을 죽인 괴물이 풍엽령에 도착했다.
“하하, 드디어 너를 찾았어! 드디어!”
괴물의 목표는 바로 두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