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572화 (572/648)

572장: 태강 대제 강림

빙계성 성주의 성 안.

종말 이전엔 이곳에 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성은 이계의 에너지가 대량으로 깃들어 있는 석재로 쌓아 올린 것이고, 포화의 공격도 거뜬히 막아낼 정도로 견고했다.

연진 성주가 검은색 성의 꼭대기 층에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그 사람들을 안 죽였어요? 도대체 왜? 그 몹쓸 것들이 우리 아들을 죽였는데, 왜 복수를 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그 자리에서 그놈들을 죽일 수 있었잖아요.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요.”

연진 성주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당장 가서 그 부녀를 죽여요. 지금 당장요.”

연진 성주가 눈을 번쩍 뜨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나가라.”

미인은 화가 잔뜩 났지만, 연진 성주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입을 다물고 긴장한 기색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잘 닫힌 걸 확인한 후 연진 성주는 몸을 엎드리고 이마를 바짝 땅에 댔다.

성 꼭대기 층의 공기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입체 영상이 실내에 투영되었다.

투영된 사람은 검은색 갑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고, 마치 어둠의 군주 같은 숨 막히는 위압감을 자아냈다.

실제 사람이 아니라 입체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패기 섞인 무거운 분위기가 실내를 장악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연진 성주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예를 올렸다.

이 사람이 바로 절대 무도 강자이자, 천만 인류를 보호하고, 인류 질서를 수호한다는 태강 대제였다.

“네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자가 깨어났다고?”

태강 대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금속이 공명하는 듯한 이상한 목소리였다.

연진 성주가 머리를 조아린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자에게 3개월 안에 난호영을 1천 명 규모로 키우라고 했고, 6개월 안에 저와 결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태강 대제가 물었다.

“넌 내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거는 건지 이해가 안 되겠구나.”

“맞습니다, 폐하.”

연진 성주가 대답했다.

“난 그자가 정말로 대운을 타고난 건지 한번 보고 싶거든.”

이어서 태강 대제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하지만 반년도 너무 길지. 그러니 너무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내가 곧 그자를 만나러 갈 것이다.”

장소만은 종말 이후에 혈맥이 변이해서 강한 무공을 얻은 소수의 행운아였다.

강한 무공을 가지게 된 그녀는, 살면서 자신의 변태 첫사랑을 마주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놈의 뼈를 마디마디 분지른 다음에 짓밟아 죽이겠다고 다짐했었다.

약탈자 장소만은 십여 년 동안 사람을 무수히 많이 죽였지만,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변태 첫사랑을 죽이지 못해서 한이 맺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인간쓰레기 두변이 갑자기 짠하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장소만이 총구를 두변의 이마에 겨누고 냉랭하게 말했다.

“인간쓰레기 자식, 죽어버려.”

이때, 두효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고 장소만에게 달려들었다.

장소만은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두효의 칼을 피한 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장소만은 아직 앳돼 보이는 두효의 얼굴을 슥 쳐다보더니, 이를 갈면서 말했다.

“두변, 네가 인간쓰레기인 건 여전하구나. 이렇게 어린아이에게도 손을 대다니.”

두효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이 사람은 내 아빠예요.”

장소만이 흠칫 놀랐다.

두변은 장소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생김새도 무척 아름다웠고, 동양인에게서 보기 힘든 화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넘쳐 보이는 이 여인은 누구일까.

그러다 두변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체육 특기생인 데다 발육이 빨라서 학교의 여신으로 불렸던 사람?

안하무인인 데다가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개성이 넘치고 쿨한 척하던 그 시절, 정확히 말하면 중2병 말기였던 그 시절, 자기가 생각해도 씻을 수 없을 정도의 쓰레기짓을 했던 그 선배?

두변은 장소만의 얼굴은 알아봤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이름은 떠올리지 못했다.

‘장, 장 뭐더라?’

“설마 날 기억 못 하는 거야?”

장소만은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인간쓰레기 같은 놈이 나한테 그렇게 상처를 줘놓고 내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해?’

“선배, 정말 미안해요. 그때 내가 철이 없어서 선배에게 큰 상처를 줬어요.”

두변이 서둘러 말했다.

“지금 와서 미안하다고 해? 지금 와서? 이미 늦었으니까, 죽을 준비나 해.”

장소만이 격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는 두변의 머리통을 당장 터트릴 생각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아쇠를 당기려고 몇 번을 시도해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장소만은 사람을 죽일 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약탈자 소교였고, 꿈에서는 두변의 사지를 찢은 뒤에 머리를 날리는 것도 수백 번 이상 했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총살로 깔끔하게 보내주는 것도 그녀로서는 자비를 베푸는 셈이었다.

장소만이 머뭇거리는 사이, 두변이 말했다.

“선배는 키가 좀 더 크고, 좀 더 성숙해진 것 말고는 변한 게 없네요.”

아니다.

장소만은 고등학교 때보다 몸매가 더욱 폭발적으로 변했고, 외모도 더욱 화려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무공 덕분에 외모가 아직도 20대에 머물러 있어서 두변이 큰 변화를 못 느낀 것이다.

반면, 두변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사람 자체가 너무 야위었고, 키는 1.8미터가 넘는 것 같은데 몸무게는 50킬로도 안 되어 보였다.

두변은 꼭 바람이 불면 휘잉 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보다 키가 더 컸고 우울한 분위기가 더 짙어졌지만, 눈빛은 그때보다 훨씬 더 따뜻해지고, 우수에 차 있었다.

두변이 너무 야위고 처량해서 그런지, 그때만큼 잘생겨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처참한 꼴을 보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앞으로도 지금처럼 처참하고 볼품없게 살아라. 대신 당장 여기서 꺼져. 이 취락은 이제부터 우리 약탈자의 것이다.”

장소만이 두변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두효가 물었다.

“아줌마, 우리 아빠랑 아는 사이에요?”

장소만은 당장이라도 욕을 하고 싶었지만, 예쁘장한 두효의 얼굴과 맑고 순수한 눈빛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얘는 어쩜 이리도 티 없이 맑아 보일까. 두변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이런 딸을 낳았대?’

“흥. 알다마다. 저놈이 죽어서 가루가 돼도 알아볼 정도로 잘 알지.”

장소만이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줌마, 우리 아빠가 예전에 아줌마한테 잘못한 짓이 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려도 될까요?”

두효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장소만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됐어. 저놈의 몰골을 보니까 마음이 좀 나아졌어. 살려는 줄 테니까 어서 나가.”

장소만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 집인걸요. 우리를 여기서 내쫓으면, 저랑 아빠는 이제 지낼 곳이 없어요.”

두효가 비 맞은 고양이처럼 순수하고 억울한 눈망울로 장소만을 바라보았다.

사실 두효는 여기서 쫓겨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장소만과 그녀의 수하들을 이 취락에 정착하게 하고 싶었다.

지금의 급선무는 취락을 1천 명 규모로 늘리는 것이니까.

두효는 갑자기 나타난 이 수십 명 사람이 너무도 반가웠고, 어떻게든 붙잡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너희가 집이 없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장소만은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두효의 눈빛을 보니 차마 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효에게 말하는 걸 포기하고, 두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두변,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너 같은 인간쓰레기랑 한 지붕 아래 있기 싫으니까.”

두효가 무슨 말을 더하려던 찰나, 두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피했다.

취락에 널린 게 빈집이니, 굳이 이 집을 고집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두변은 장소만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어서 굳이 그녀와 기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장소만과 수하들이 화로에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두변과 두효는 옆집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아빠, 저 아줌마한테 감정적으로 상처를 준 거예요?”

두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그땐 어려서 철이 없었지.”

“무슨 일이었는데요? 아빠, 나도 알려줘요.”

두효가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어린애가 뭘 그렇게 많이 알려고 해. 아무튼, 앞으로 너도 잘생기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기가 멋있는 줄 아는 남자들을 마주치게 되면, 그놈에게서 멀리 떨어지거나, 온 힘을 다해서 따귀를 날려버려. 절대로 그런 인간쓰레기들을 좋아하면 안 돼. 알겠지?”

두변이 당부했다.

“음, 아빠는 엄마를 만난 뒤로 좋은 남자가 됐나 봐요.”

“사실 네 엄마를 만난 뒤에도 좋은 남자가 된 건 아니지.”

두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엄마가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라고 했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아빠 얘기를 자주 해줬어요. 아빠가 얼마나 낭만적인지, 얼마나 다정한지, 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인지 다 알려줬다니까요?”

임야소는 두효에게 두변이 완벽한 아빠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서 두변이 외도한 사실을 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두효가 주제를 바꿔서 말했다.

“아빠, 그나저나 밖에 있는 저 아줌마 엄청 대단해 보여요. 그 아줌마 수하들도 엄청 세 보이고요. 저 사람들한테 여기에 남으라고 하는 건 어때요?”

장소만 일행은 약탈자였다.

그들의 손에는 평생을 씻어도 씻어내지 못할 피가 묻어 있고, 다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소만을 따르는 수하들은 괴팍하긴 해도 나름의 선을 지킬 줄 아는 자들로 보였다.

만약 두변 부녀가 이 사람들을 취락에 남길 수만 있다면, 영지의 전투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아빠, 잘 봐요.”

두효가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서는, 장소만 일행이 있는 모닥불 앞으로 가서 말했다.

“아줌마, 제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러는데, 제가 가진 변이과를 아줌마 고기랑 바꿀 수 있을까요?”

장소만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었지만,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잘 구워진 고기 한 덩이를 두효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때.

끄아악!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속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매영체도입니다. 대인, 매영체도예요!”

매영체도가 빛처럼 빠른 속도로 모닥불을 향해 돌진했다.

장소만의 수하가 80여 명인데, 매영체도는 나타나자마자 십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괴수는 빨라도 너무 빨랐고, 힘이 세도 너무 셌다.

보통내기가 아닌 약탈자 무사들도 매영체도 앞에서는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죽었다.

탕, 탕, 탕, 탕.

장소만이 재빨리 코일 건을 집어 들고 매영체도를 향해 총을 쐈다.

하지만 매영체도에겐 코일 건도 무용지물이었다.

괴수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조준도 안 되고, 겉가죽이 너무 단단해서 코일 건 총알이 가죽에 박히지도 않았다.

장소만이 코일 건으로 난사하자, 괴수는 더욱 흥분해서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장소만은 괴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자신을 향해 방향을 트는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절망에 빠진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데 장소만이 눈을 한참 동안 감고 있었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장소만이 슬며시 눈을 떠보자, 그녀의 코앞에 징그러운 매영체도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매영체도는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괴수였고, 징그럽게 생겼다고 소문만 들었지 이렇게 가까이서 매영체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매영체도는 몸이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질 못했고, 괴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장소만의 얼굴까지 딱 5센티미터 남아있었다.

쩍 벌어진 괴수의 입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고, 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제자리에 얼어버렸다.

두변이 총을 쥔 약탈자 무사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의 손에서 총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총구를 매영체도의 목구멍 깊게 쑤셔 넣은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죽음의 신이라고 불리던 매영체도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매영체도는 힘이 엄청나게 세고, 속도도 무척 빠르고, 총알도 안 박히는 견고한 겉가죽을 가졌지만, 내장은 평범한 생물처럼 물컹하고 약했다.

장소만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두변이 어떻게 저 괴수를 멈추게 한 거지?

죽음의 신인 매영체도의 몸을 못 움직에게 고정시켰어?

두변이, 지금, 내 목숨을 구한 거야?’

두변의 정신술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기술이었다.

“오늘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까, 앞으로 서로 빚진 건 없는 거다. 우리는 오늘 하루만 여기서 신세를 질게. 내일 해가 뜨자마자 떠날 거야.”

장소만이 다시 차가운 표정을 되찾고 자리를 떠났다.

“변이가 일어나면 안 되니까, 모든 시체를 태워라.”

장소만은 명령을 내린 뒤에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녀는 집 한 채를 통째로 혼자 썼다.

방 안에 들어간 뒤, 장소만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표정을 풀었다.

‘허약한 몸으로 남은 생을 처참하게 살아갈 줄 알았던 두변에게 이렇게 대단한 기술이 있다니.

게다가 매영체도에게서 나를 구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던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인이 된 거야?

앞으로 다시는 두변과 마주칠 일을 없게 만들어야겠어.

동이 트는 대로 떠나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