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잠 못 드는 용
* * *
고층 빌딩을 잠재우는 법을 아는가?
나는 지금부터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커다란 빌딩과 같은 몸집과 백 개의 머리, 밀레니엄 쇼크 이전 괴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비주얼을 지닌 신화 속 괴물.
올림포스의 안주인 신들의 여왕 헤라, 그녀의 심복 라돈은 본래 신화에서도 잠을 자지 않는 용이다.
주인의 황금사과를 지키는 잠들지 못하는 용, 라돈.
"다른 부탁은 없어?"
"라돈의 수면 말고는"
"달리 요구할 만한"
"부탁은 없어."
이 녀석들의 화법. 굉장히 짜증 난다.
한 사람이 대표해서 얘기하면 빨리 빨리 끝날 것을 세 명이 나누어서 얘기하니 대화가 길게 늘어진다.
후 단호하네. 애초에 부탁의 개념도 상당히 모호하다.
애초에 잠들지 못하는 용을 재워달라니?
"그런데 라돈을 왜 재우려고 하는 건데?"
"라돈은 우리를 위해"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한 번쯤은"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어."
앗, 아아...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음씨만큼은 정말 훌륭하다.
비록 신화 속 존재들이 크립티드가 되어 나타났지만
원래 이야기까지는 잊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크립티드만 넘쳐 나면 히어로도 필요 없을 텐데.
"뭐 하나만 물어보자 깐프스."
생각해 본 것이 하나 있긴 하나 일단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아두자.
"그냥 의식이 없는 상태도 수면으로 인정해 줄 수 있어?"
"라돈을 기절시키려고"
"하는 거야?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
이 그리스 깐프 녀석들 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구만.
감동적인 건 감동적인 거고, 고층 빌딩을 잠재워?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빌딩을 후드려 패서 무너뜨린 뒤 눕혀준다면 그것이 빌딩의 수면법이 아닐까?
본인의 의지로 잠들지 못한다면 물리적 마취로 기절시킬 수밖에.
라돈 정도의 초상위 크립티드라면 마취가 잘못되어서 못 일어날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마취 이후 일어나는 것은 녀석의 의지에 달려있다.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여력도 없고.
"흥! 할 수 있다면 해봐라 이 느낌이지? 그럼 허락은 받은 거로 친다."
저 뒤에서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는 하예은을 부른다.
"장비 챙겨라 예은아, 치료하러 가자."
"진심이세요, 아저씨? 아까 전만 해도 4대6이니 7대3이니 그랬잖아요."
"그거야 생사결의 문제로 생각해본 거고, 힘을 빼놓는 건 또 다른 얘기지."
"흐응…"
어질어질하니? 그래도 이게 내 방식인걸.
"엘레나 너는 님프 자매들과 황금사과 나무에 꼭 붙어 있어. 저 녀석이 나무까지 행패를 부릴 순 없겠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위험한 곳까지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엘레나. 님프들과 대화해서 적어도 죽일 듯이 싸우는 일은 없잖아?"
"오늘의 우진님은 서윗? 하네요."
"넌 집에 가면 당분간 PC 이용 금지야."
인터넷에 오염된 깐프 녀석, 중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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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를 마친 뒤 하예은과 나는 라돈의 앞으로 다가갔다.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주시 중이다.
움직일 때마다 쫒아 오는 100개의 머리.
환자에게 치료법을 설명해 줄 차례이다.
"이봐 라돈! 님프들이 얼마나 간곡하게 요청하던지, 너의 불면증 치료를 부탁하던데?"
『필멸자 주제에 이 불사의 용 라돈을 재울 수 있다 생각하느냐?』
크으, 이 그리스 새끼들은 님프나 용이나 말이 너무 많아.
한 놈만 대표로 말하면 되는 것을 100개의 머리가 전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골이 울린다.
"필멸자인 나와 불멸의 용 너나 머리를 맞으면 드러눕는다는 점은 똑같을 텐데?"
『크크크, 오만한 놈. 그리고 거기 인간 계집, 상당히 불쾌한 기운을 갖고 있군.』
"저는 헤라클레스 님의 챔피언, 12 과업의 달성을 위해 당신을 잠재워야 합니다."
『그 무식한 인간 영웅의 후계자인가, 좋다.』
그 거대한 몸을 피는 라돈.
이거 완전 빌딩 한 채와 싸우는 거나 다름없네.
『황금사과의 파수꾼 라돈, 네 녀석들의 도전에 응한다.』
그 즉시 거대한 앞발로 우리를 찍어 누르려 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재빨리 뒤로 물러섰지만, 충격파까지는 방어할 수 없다. 하예은도 상황은 같은지 저 멀리 날아가고 있다.
이 정도 상위 크립티드와 대치하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인사 한번 살벌하게 하네.
끼이이이이이익!
여의 한 개를 소환해 땅에 처 박은 뒤 자유 비행 운동을 하고 있는 내 신체를 멈추었다.
푀요오오오오오오!
어느새 나타난 천둥새 아퀼라도 하예은을 낚아채 지상으로 되돌린다.
"하예은! 히드라의 독으로 라돈의 포스 필드를 해제하는 데만 주력해!"
"아저씨는 어떻게 하시게요!"
"녀석의 움직임을 봉인해야지!"
. . .
<근데 손우진은="" 무기도="" 없는데="" 뭐로="" 싸우냐?=""/>
얘 무기로 싸우는 거 본적이 한번도 없는데
제천대성님의 챔피언으로 있으면 당연히 ' 그 무기' 써야되는거 아님? 쓰는 꼴을 못봤음
샤라크: 여의봉 쓰긴 씀 그런데 니가 상상하는 그런게 아님 ㅋㅋ
ㄴㅇㅇ: 뭔데 그럼? 여의봉이 여의봉이지
ㄴ샤라크: 이건 물어보지 말고 미튜브 가봐라 진짜 미친놈이라 살벌함 ㅋㅋ
천비: 여의 쓰긴 쓰지 근데 존나게 많이씀 ㅋㅋ
ㄴㅇㅇ: 그게 몬 소리임?
ㄴ천비: 여의봉'들' 많이 쓴다고
ㄴㅇㅇ: 알게 쉽게 말해 ㅅㅂ
ㄴ천비: 니가 찾아 이 핑프 새끼야
ㅁㄴㅇ: 이 새끼 현역 시절 별명 모름? 걍 용역 깡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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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의 유물 여의금고봉(?????) 을 능숙하게 사용하기엔 아직 내 스펙이 부족했다.
사실 무게 13,500근, 8톤짜리 쇠 봉을 자유롭게 휘두르고 다니는 원숭이가 규격 외 존재이지 내가 부족한 게 아니야.
여의를 가장해서 들고 다녔던 공사용 철근들은 크립티드를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공사용 철근으로 온 힘을 다해 크립티드의 포스필드를 후려치거나
괴수들을 핏덩이로 만들고 나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휘어있다.
때문에 소환 도술을 익히기 전까지는 수련 삼아 철근 다발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나만의 여의를 만들어서 수련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천 개의 티타늄 합금 철근 다발들, 티타늄 여의 시리즈다.
공사용 철근보다 강도는 강하면서 기존 유물에 비해 가볍게 다룰 수도 있어서 부담이 덜 하기도 하고.
원본 여의의 신축성도 고려해 각자 철근의 길이도 제각각 이다.
한 개로 부족하다면 천 개의 여의로 후려친다.
도술을 외워 여의 시리즈를 허공에서 소환했다.
지금은 한 개씩 여유롭게 소환해서 싸울 형편이 아니야.
하늘에서 철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땅에 꽂히기 시작한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쿠웅!
라돈 주변을 빼곡히 채운 여의 시리즈.
주변의 철근들을 뽑아 그대로 라돈에게 달려간다.
라돈의 포스 필드 수준은 완력 하나로만 깨부수기엔 역부족이니
흐읍, 여의에 강기를 감아 있는 힘껏 휘두른다.
"불면증 드래곤 새끼야 인사 받아라 !!!"
내 인사가 무색하지 않게 받아주는 라돈 녀석. 꼬리를 휘둘러 나를 튕겨내려 한다.
녀석의 꼬리와 내 여의가 부딪힌다.
대기가 요동치고 충격으로 주변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빌딩에 무지성으로 돌진한 대가는 내 몸으로 받아냈다.
콰 앙 !
건물에 처박힌 뒤 몸 위에 있는 잔해들을 치워낸다.
씨이이이이발
온 몸이 저릿저릿하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눈은 붉어지고 눈동자는 금색으로 물들고 있다.
화안금정 (火???)이 켜지고 나서야 그나마 저 규격 외 용가리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의 한 다발로 안되면 다섯 다발, 열 다발, 스무 다발, 서른 다발.
꽂혀있던 여의들을 대량으로 뽑아 다시 라돈과 충돌한다.
콰 앙 ! 콰 앙 ! 콰 앙 !
거대한 생체 빌딩 라돈의 포스 필드와 티타늄 여의 시리즈들이 충돌한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
앞서 불멸자로서의 격식은 어디 갔고 잔뜩 꼴 받았는지 포효를 내 뿜는 녀석.
그때 라돈의 위로 불길한 녹색의 빛줄기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예은은 자신의 화살에 히드라의 사기(死?)를 담아 두었다.
히드라보다 상위에 있는 라돈은 이 화살로 죽지는 않겠지만
포스 필드 정도라면 해제할 수 있으리라.
"크읏...!"
화살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갉아먹는 듯하지만
시간을 벌어준 손우진을 위해 지체할 순 없다.
팔 근육이 찢어질 만큼 활시위를 당기고 아홉 개의 화살을 발사한다.
이모탈 킬러 (Immortal Killer), 신화 속 불멸의 존재들을 죽인 히드라의 사념이
자신의 삼촌 라돈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물어뜯을 준비를 한다.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급히 포스필드의 강도를 올리는 라돈이지만
녹색의 끈적끈적한 히드라의 사념이 라돈의 포스필드를 녹여 나간다.
녀석의 포스필드에 금이 가는 것이 보인다.
예은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하예은이 제공한 이 기회를 살려서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
머리카락을 뽑아 허공에 휘날린 뒤 입김을 불어넣는다.
화과산 오리지널 잔나비 소환술.
제천대성 비기 다중 분신술.
펑!
내 주위로 소환되기 시작하는 화과산 원숭이들과 내 분신들.
우리 원숭이 신만큼 대량의 분신을 내 맘대로 조종하기엔 무리가 있어 화과산 원숭이들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익숙한 일인 듯 여의 시리즈를 하나씩 뽑아드는 원숭이들.
"얘들아, 연장들 잘 챙겼냐?"
끼익! 끼익!
거대한 용 라돈을 보고도 대장 원숭이를 위해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녀석들.
아주 교육이 잘 되었다. 기특한 녀석들.
저 무식한 용이 머리가 백 개 있다면 나에겐 분신과 원숭이들이 있다.
"준비하시고…"
"던져!"
불멸의 용을 향해 날아가는 수많은 여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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