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과산 스트리머-20화 (20/106)

〈 20화 〉 스위치 오프

* * *

저승의 왕이 거주하고 있는 궁전의 문을 열어본다.

“얼레?”

가벼운 마음으로 밀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대문.

참 재미있는 장난을 해 두셨군.

“아저씨 저쪽을 보세요.”

대문 옆을 살펴보니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위로 친절하게 구멍의 이름까지 적어 두었다.

나약한 자들을 위한 입구.

대문도 열지 못할 약한 존재라면 알아서 기어서 들어와라, 이건가.

저승의 왕답게 몹시 오만하고 자신감 있는 대문이다.

“너도 저쪽으로 들어가긴 싫지?”

“네. 절대로 사양이에요.”

성좌의 챔피언들이 기어서 들어가기엔 체면이 구겨지니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야 한다.

“서로 문 한 쪽씩 맡아서 열자.”

“그래도 되는 걸까요?”

“애초에 신들을 위한 대문 같은데 인간 두 명이 힘 좀 합쳤다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

적어도 톤 단위는 될 것 같은 이 대문을 한 쪽씩 붙들고 열 준비를 한다.

“존나게 무겁네 진짜!”

쿠우우우우웅­

본격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하자 열리기 시작하는 궁전의 대문.

하예은이 무력 쪽에 특화된 챔피언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이 더럽게 무거운 문을 나 혼자서 열고 있었어야 할 테니깐.

고정하는 장치도 없는지 힘을 조금이라도 줄이면 원상태로 되돌아가려 한다.

참 배려심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강자의 문이다.

“타이밍 맞춰서 한번에 들어가자!”

이 무거운 문을 밀고 있느라 대답할 힘도 없는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하예은.

힘을 최대한 끌어내서 문을 밀어낸 뒤 안으로 몸을 던진다.

콰앙­!

문 주제에 웬만한 것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기세이다.

거센소리와 함께 다시 닫히는 대문.

하아하아­

서로 땅에 엎드린 채 숨을 고르는 우리.

괜히 자존심 한번 챙겨보려다가 힘만 빼버렸다.

“얌전히 개구멍으로 들어올 걸 그랬나 봐.”

“그래도 그건 절대 용납 못 해요...”

우리가 힘이 없지 가오가 없나!

이런 마인드구나 하예은. 역시 영웅신의 챔피언다운 마음가짐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성좌의 취향에 맞춰 꾸며진 궁전 안을 걷기 시작했다.

수많은 양초들과 붉은색 카펫, 고풍스러운 궁전 기둥.

좀 더 걷자 망자들이 줄을 서서 명계의 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우리도 줄을 서야 하나?”

“업무를 보고 계실 텐데 그래도 줄을 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줄을 서는 곳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

개구멍을 통해서 들어온 곳과 정문을 통해서 들어온 손님용 통로로 나눈 건가.

우리는 붉은색 카펫이 깔린 곳으로 향했다.

쾅 쾅 쾅

족히 건물 5층 높이는 될 것 같은 책상.

그 위를 쳐다보니 심연을 담은 듯 새까만 흑발과 수염을 지닌 남성이 지루한 얼굴로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다.

명계의 왕, 하데스다.

­음?

망자들이 줄 서 있는 곳만 바라보다 우리를 발견한 저승의 성좌.

대문을 그렇게 튼튼하게 지었으니 이 줄은 쳐다도 보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호오! 오랜만에 손님으로 방문한 이들이 있군.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곤 우리를 맞이해준다.

“힘과 영웅의 신 헤라클레스의 챔피언이 저승의 성좌께 인사드립니다.”

­하하하! 조카 녀석이 벌써 화신을 지닌 건가. 우리 집 강아지와 드잡이질을 하던 게 어제 같은데.

저승의 성좌가 웃을 때마다 궁전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역시 자신의 영역 내에선 절대적인 힘을 지닌 것이 성좌다.

대체 헤라클레스가 과업을 수행한 시절이 언제길래 어제 같다고 하는 걸까.

이것이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는 성좌들의 시간관념인가.

­이리 올라오거라.

우리에게 거대한 손을 내미는 명계의 왕.

태산과 같은 손을 밟고 올라서니 우리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같이 데려온 이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자네는 누구인가?

“이 녀석의 과업을 도와주러 온 제천대성의 챔피언입니다.”

­동방 출신 천덕꾸러기 성좌의 아이로군, 다른 지역 저승의 성좌들이 학을 떼고 싫어하길래

익히 들어는 보았네.

왜 창피함은 내 몫일까.

서역의 신이 들어볼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니,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인사를 마친 뒤 하예은이 명계의 왕에게 본래 목적을 꺼낸다.

“명계의 왕이시여, 저는 영웅신의 챔피언으로서 과업을 수행하고자 명계를 방문했습니다.”

­흐음… 가능하겠느냐? 나의 조카는 별종이라 쳐도, 인간의 힘으로

명계의 문지기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만.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시련이라면, 극복할 것입니다.”

­하하하! 조카의 아이답구나. 그래, 너의 배포는 인정하마.

명계의 문지기 케르베로스와 싸우는 것을 허락한다.

주인의 허락을 받아냈지만, 조건을 따져봐야 할 시간이다.

“왕이시여,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궁금한가?

“저는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영웅신의 챔피언을 위한 과업이다.

라돈이야 부득이한 사정으로 황금사과를 획득하기 위해

본래 신화와 달리 대결을 펼치게 되었지만, 케르베로스의 경우는 생포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하예은 본인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3번의 기회를 주도록 하마. 단 3번만 과업에 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머리당 한 번의 기회를 주는 명계의 왕, 인심이 후하군.

“알겠습니다. 하예은, 신호를 주면 그때 개입하도록 할게.”

“네 아저씨, 그럼 과업을 수행하러 가보겠습니다. 왕이시여.”

­아이야... 혹시 본인을 작은할아버지라 불러 줄 수 있겠느냐?

“네?”

명계의 왕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하는 하예은.

작은할아버지라니, 장난스럽게 하예은을 헤라클레스의 딸이라고는 불러 댔지만

성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장소가 장소다 보니 직계 가족의 방문은 정말 드물어서 말이지.

명계의 왕인 집안의 큰 어른을 뵙기 위해선 죽는 방법밖에는 없다.

저승에는 가족이라 해봤자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 말고는 없으니 외로울 법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그맣게 말하는 하예은.

“그… 작은 할아버님.”

­하하하하!

궁전이 떠나가라 웃어대는 저승의 성좌.

이 정도로 웃는데 건물이 흔들릴 정도라니, 대체 성량이 어떻게 되먹은 건가.

얼마나 웃은 건지 눈을 훔치는 하데스.

­오랫동안 잊고 지냈지만, 가족은 언제 만나도 좋군.

이 석류 좀 먹고 가거라. 네 능력을 올려 줄 거란다.

“죄송하지만 그건 거절할게요.”

­쯧, 내 이야기는 너무 퍼진 것도 문제구나.

자연스럽게 블러핑을 쳐 하예은을 저승으로 끌어들이려는 명계의 왕.

자상함 속에 숨긴 계략을 간파해버린 챔피언.

무섭다 이 올림포스 가족들.

“살벌한 대화구먼.”

­혹시 자네도 생각 없는가? 자네 정도의 무력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네. 하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도 천수를 누리다 오고 싶네요.”

­이래서 살아있는 놈들이란.

“누구에게나 제안을 하시던 대답은 항상 똑같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흐흐흐, 속여먹은 이는 내 아내 말고는 없구나.

내 뒤편으로 가면 저승의 문이 있으니 그곳에 가 명계의 문지기를 만나거라.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명계의 왕이 안내해준 곳을 따라 하예은과 나는 저승의 문을 향해 떠났다.

. . . . .

왈!

억세 보이는 검은색 털에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폭포와 같은 침줄기.

바위와 같은 앞발에 목을 두르고 있는 가시 목줄.

짖는 소리는 천둥과도 같다.

명계의 문지기 케르베로스.

처음 본 소감으로는 역시 존나게 크다.

이곳 저승의 존재들은 다 이런 건가?

건물 성좌 심지어 집을 지키는 애완견마저 크다.

“허… 막상 눈으로 보니깐 이제야 실감이 나는데?”

케르베로스 앞으로 다가가는 하예은.

하예은의 냄새를 맡는 지옥견.

서로 탐색전을 하는 건지 아직 충돌하지는 않는다.

으르르르릉­

이내 하예은의 신성을 느꼈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삼두의 경비견.

하예은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면 저런 반응은 당연한 거다.

내 쪽으로 다시 다가오는 하예은.

“성좌께서 저지른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본데?”

“괜히 성질만 건드린 거 같기도 하네요.”

이내 갖고 왔던 무장을 다 내려놓곤 네메아의 사자 가죽만 챙기는 하예은.

“명심해, 내가 전투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는 딱 3번이야.”

쾅쾅­

검은빛 갈기를 지닌 사자의 얼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손에 맹수의 건틀렛을 장착한 채 맞부딪히는 하예은.

저 멍멍이를 작정하고 팰 생각이다 이 녀석.

황금 사과 과업 이후 신성도 증가했고 새로운 장비도 획득했군.

나쁘지 않아.

해볼 만한 싸움이다.

“이번에는 혼자 힘으로 과업을 완수하고 싶어요.”

“그래, 심정은 알겠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네, 아저씨.”

준비가 끝나자 서로 마주 보는 두 야수.

오랜 악연을 다시 만난 지옥견의 심기가 크게 불편해 보인다.

마지막 과업을 완수하려 하는 이 새로운 영웅 또한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기세를 떨친다.

타앗­

자리를 박차고 케르베로스를 향해 뛰어나가는 하예은.

이에 질세라 이 작은 인간을 향해 앞발을 휘두르는 케르베로스.

이내 두 맹수의 손아귀가 부딪힌다.

콰아앙­!

이내 충격파가 주변을 뒤집어 놓고휘몰아치는 바람에내 머리는뒤엉키며 흩날리기 시작한다.

"살벌하다, 살벌해."

지상으로 끌고 가려는 인간과 끌려가기 싫은 저승의 짐승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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