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스위치 온
* * *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린다.
자신은 살아 있다고 증명하는 심장의 자기주장이 들린다.
그리스 금태양이 뺏어갔던 신체의 생체 신호들을 되찾아 온다.
손가락, 발가락, 뼈마디, 근육들이 원래 주인을 반기듯 아우성을 친다.
이내 암전된 두 눈엔 빛이 들어오고 입에는 달콤한 맛이 맴돈다.
소프트 넥타르인지 뭔지, 신들의 음료를 제때 먹였나 보다, 금태양 녀석.
“Καλημερα! 칼리메'라!”
(좋은 아침이네!)
“얼굴 좀 치우시지?”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이 금태양 녀석이라니, 기분 한번 끝내주군.
“으아!”
기합 한번을 내지른 후 몸에 이상이 있나 한번 확인해보도록 한다.
손마디를 우드득, 다리를 쭈욱, 허리와 골반을 투드득.
오랜만에 주인이 명령한 지시를 이행하느라 비명을 지르는 내 몸.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아.”
“하하하! 그동안 자네들을 돌본 나는 죽을 맛이라네.”
“죽을 맛은 무슨, 집안의 큰 어르신 만나기 싫어서 여기 남은 주제에.”
뺀질이 자식, 분명 명계의 왕과 만나기 껄끄러우니 여기 남은 것도 있을 거다.
옆에 누워 있는 하예은도 슬슬 정신을 차리는 낌새를 보인다.
녀석이 일어나기 전에 일 처리가 잘 되었나 확인해볼까.
명계의 문지기, 케르베로스가 담겨있는 두루마기를 펼쳐본다.
앞발에 얼굴들을 얹은 채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케르베로스.
“쓰읍!”
경고를 보내자 애써 시선을 피하는 멍멍이 녀석.
“하루만 참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 거니깐.“
”호오, 이것이 케르베로스로군.“
”두 번, 그것도 같은 인간에게 끌려왔으니 심기가 불편한 상태야.“
”으음…“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멍한 눈으로 일어난 하예은이다.
넥타르가 맛있었는지 괜히 입맛을 다신다.
”물에 희석해도 꽤 맛있었나 본데?“
"신의 음료가 괜히 신의 음료겠나."
과업도 끝났고 저런 천상의 맛을 지닌 넥타르를 나 혼자 한 병 꿀꺽할 수 있다.
이번 과업은 그렇게 힘든 편도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오히려 이득인가?
"이 녀석도 드디어 진정한 무투 히어로의 길을 걷게 됐네."
"참, 형제의 그 무투파 자부심은…"
"신성을 날로 받아먹은 응애 히어로들이 무투의 길을 어찌 아리오?"
"형제! 그건 쉽게 흘려들을 수 없군! 날로 먹다니!"
강림파 녀석,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니 저렇게 크게 반응하는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무투야 말로 히어로의 본질이거늘.
"조용히 해주세요, 두 분."
"네."
"미안하네."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 머리가 아픈지 한 방에 제압해버리는 하예은.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는데 지금부터라도 말을 잘 들어둬야지.
"그래서 형제, 이번 과업의 참여로 보상은 어떤 것을 받았나?"
"응? 아아, 뭐 별건 없어."
넥타르 한 병은 온전히 내가 다 마시고 싶다.
절대 들키면 안 돼.
"그거 아는가 형제? 자네는 거짓말을 굉장히 못 한다네."
"아니, 신경 꺼!"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무엇을 받으셨길래 연속으로 과업에 참여하신 건지."
그리스 콤비의 계속되는 압박에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넥타르 한 병이요?"
"정말 엄청난 욕심쟁이로군, 그 귀한 걸 혼자서 꿀꺽하려고 하다니."
"너희도 맛봤으면 알 거 아니야! 희석한 음료도 얼마나 맛있었는데."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맛본 게 굉장히 아쉬울 정도로 맛있다.
그런데 원액 백 프로 넥타르는 얼마나 맛있겠는가?
"하…이 불쌍한 챔피언의 일용한 양식을 빼먹고 싶니?"
"네."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 아니겠는가?"
다들 말은 잘해요.
. . . . .
소환용 두루마기를 건네줘봤자 도술을 배운 적도 없는 하예은은 케르베로스를 불러낼 수 없다.
결국 다시 또 그리스로 같이 끌려가게 되었다.
"신기하군, 아퀼라는 나를 태우는 것도 아주 싫어하는데 형제는 거리낌이 없군."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거래가 있었거든."
철저히 여자만 태우기를 고집하는 천둥새가 얌전히 있자 신기한 모양이다.
내 덕분에 이세계 엘프 태워봤으면 승차 거부를 하면 안 되지.
"그래서 예은아, 과업도 다 끝났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고민되겠지.
저 심정 이해할 수 있다. 성좌가 걸어 온 길을 똑같이 걸어봤는데 달라진 점은
별로 없는 것 같고, 혼란스러워질 시기이다.
"성좌의 길을 똑같이 걸었으면 이제부터 시작이지. 신성을 쌓는 것에 집중했던
시간은 지나갔고 그 신성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해."
"아저씨는 어떻게 수련하셨는데요?“
"난 고행길 동안에 하도 싸워서 그 과정을 동시에 해결했어."
"…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사실을 말해줘도 이렇게 반응하다니.
석가의 챔피언과 후배들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다 보니 훈련이 안 될 수가 없다.
"나도 다시 훈련 좀 할까 봐."
"아저씨는 지금도 충분히 강하지 않아요?"
내 전투력은 히어로나 빌런, 인간 측에선 강한 편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번에 라돈과 싸우면서 아직 더 부족하다고 느꼈거든."
"하하! 8톤짜리 쇠봉을 우주공간에서 불러내는 사나이가 약한 척을 하는군!"
정통 무투파 대표가 우리 후학을 위해서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 끼어드는 금태양.
이래서 응애 히어로란, 인간찬가의 미학을 모른다.
"그게 정상적인 사용법이냐, 주무기로 휘두를 수 있는 근력을 길러야지."
"역장만 해제하는 디크립터를 담당하면 그런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네."
"디크립터고 지랄이고, 혼자서 괴수 잡던 놈한테 그런 역할군 말해봤자 의미 없거든?"
후배를 위한 덕담의 시간은 그리스 금태양의 난입으로 인해서
누가 더 잘났니? 시간으로 변질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보니 도착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야, 도시 중앙에 이상한 게 생겼는데? 아크로폴리스는 어디 갔어?"
"부서졌다네."
"부서졌어요."
기원전 건물들이 박살 났다고? 유럽 문명의 출발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튀르크 전쟁과 그리스 독립전쟁을 겪으면서도 크게 훼손된 모습으로 서 있던 인류의 역사가
사라졌다는 소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머리를 부여잡으며 사라진 인류 역사를 위해 비명을 지른다.
내 비명에 깜짝 놀라는 일행들.
"아니, 자네 고향이 무너진 줄 알겠네."
"또 장난치는 걸 거예요."
하예은의 정곡에 아크로폴리스를 위한 장송곡을 멈춘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내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 같다.
"아니, 너희가 너무 담담하게 말하길래 내가 대신 울어준 거야."
미친놈을 쳐다보듯 나를 바라보는 올림포스 챔피언들.
그러지 마라, 이 감성이 매마른 자들이여.
역사 속 신전들은 크립티드의 소행으로 인해 사라진 모양이다.
아테네의 중앙에 솟아있던 아크로폴리스는 어디 가고 그 자리엔
거대한 고층 건물들이 우뚝 자리 잡고 있다.
"이걸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냐. 올림포스 빌딩?"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올림포스 신전이에요."
성좌 분들이 트렌드에 좀 민감하게 반응하시네요.
이런 건물을 못 지었던 신화 속 시절엔 어떻게 참으셨대.
"취향이 확고하시네. 이렇게 지어도 된다고 허락은 받은 거야?"
"오히려 성좌들께서 반기시던데요."
역시 대기업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올림포스 12신을 상징하는 12개의 빌딩을 한 곳에 때려 박다니.
우리 성좌도 서울 알짜배기 땅에 있는 산을 멋대로 강탈하긴 했지만, 말이 안 나올 정도네.
아퀼라에서 내린 우리는 영웅신의 과업을 담당했던 가정의 여신 헤라의 신전으로 향하였다.
가정의 신전.
빌딩 안으로 들어오니 업무를 보는 모든 이들이 전부 여성들이다.
"안드리안, 모든 여성분들이 너를 벌레 보듯이 쳐다보고 가는데?"
"여기는 나도 껄끄러운 곳이라 어쩔 수 없다네."
그리스 최고 주신도 자신의 아내에게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이 녀석도 헤라 여신의 신도들에겐 옴짝달싹 못 하는구나.
그런 우리를 향해 전형적인 비서같이 생긴 아가씨가 다가온다.
검은 정장에 올림머리, 그리고 쓰고 있는 안경은
누가 봐도 나 비서요,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유노 여신께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하하 토니아! 날 맞이하러 온 것이오?"
"챔피언 여러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철저하게 안드리안을 무시한 채 우리를 안내하는 토니아라는 여성.
녀석은 손을 내민 채로 굳어있다.
꼴 좋다 느끼한 금태양 새끼.
굳어있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힘내 안드리안, 인생이 뭐 내 맘대로 될 리가 있나."
"아저씨도 저런 분이 취향이셨군요.“
총구를 나에게 돌리는 하예은.
"아니 나는 왜!“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빤히 쳐다보시던데요."
"외국인을 처음 봐서 그런 건데?"
"안드리안도 외국인이에요."
이쯤 되면 이 아이가 다른 의미로 무서워진다.
여신의 비서를 따라서 건물 상층으로 올라가자 여신의 석상이 위치한 곳에 도달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암사자와 암소, 그리고 공작.
모두 여신을 상징하는 영물들이다.
여신의 석상에 신성이 깃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들리는 미성.
<어서 오세요,="" 챔피언여러분.="" 그리고="" 안드리안="" 너는="" 왜="" 온="" 거니.=""/>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가정의 여신은 한 놈에게 유독 쌀쌀맞다.
이걸 자기 업보라 해야 하는 건지…
여신의 신전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난봉꾼 금태양 안드리안이였다.
<케르베로스는 성공적으로="" 생포해="" 오셨나요?=""/>
"지금 여기서 꺼내도 되죠?"
소환 두루마리를 펼친 뒤 봉인되어 있는 지옥의 마수, 케르베로스를 불러 낸다.
두루마리에서 열기가 흘러나오고 그 거대한 몸을 끄집어 내는 케르베로스.
『크르르르르』
누가 봐도 심술이 난 걸 알 수 있듯이 열 받은 녀석의 상반신이 방을 뒤덮는다.
<손우진! 알겠으니="" 그만="" 집어="" 넣으세요!=""/>
"네이네이."
계약서에 주입하던 신성을 거두어 녀석을 다시 두루마리에 가둔다.
<하아…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조용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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