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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과산 스트리머-23화 (23/106)

〈 23화 〉 스위치 온 오프

* * *

<과업의 여정이="" 모두="" 끝이="" 났군요.=""/>

하예은의 과업을 끝마치는 여신의 목소리.

내 천축기행은 가끔 무모한 짓이라며 놀림감이 되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하예은이 더 정도가 심하다.

네메아의 사자, 히드라, 라돈, 케르베로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신화 속 최강의 혈통을 지닌 괴수 가족들과

한 번씩 싸워 본 셈이다.

하예은이 생긴 것도 곱상하고 미디어에 노출이 안 되어서 그렇지 충분히 미친 짓이 맞다.

사실 무투의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으론 할 수 없는 짓이긴 하다.

<어머? 이번="" 여정에서="" 유물이="" 하나="" 망가졌군요.=""/>

“그…케르베로스와 과격하게 싸우다 보니 망가졌습니다. 죄송해요.”

“심하게 과격하긴 했지.”

나를 조용히 쳐다보는 하예은.

괜히 찔려 어색한 변명을 내뱉는다.

“케르베로스 말이야, 케르베로스.”

무투파 대표가 후배에게 자유롭게 말도 못 하는 이 현실이 안타깝다.

정말로 무투파 대표 자리를 물려 줄 때가 되었다.

<후후. 챔피언,="" 당신이=""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었군요.=""/>

여신님, 댁의 남편을 보면 당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두 여인의 등쌀이 무서우므로 내 속마음은 조용히 입안을 맴돈다.

<이번 과업을="" 성공한="" 보상으로="" 영웅신의="" 아이에게="" 새로운="" 유물을="" 선사할게요.=""/>

석상의 앞으로 내려오는 한 줄기 빛.

빛이 사라진 뒤 그곳에 나타난 올림포스의 유물.

<기존 유물인="" 방망이가="" 없을="" 때도="" 싸울="" 수="" 있도록="" 이="" 건틀릿을="" 준비했어요.=""/>

기존 하예은이 소유한 네메아의 건틀릿도 굉장히 흉악한 장비였다.

사자의 머리 형상을 본뜬 철제 건틀릿은 어떤 무기 없이도 그 자체로도 흉기라는 말.

하지만 여신이 내려준 이 새로운 건틀릿은 그 이상이다.

뭐라고 해야 할지, 날 것의 야수를 장비로 만든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헤라 여신님, 이 유물은 대체?”

여신이 선사한 유물의 생김새를 보고 하예은도 당황한 모양이다.

<좀 전에="" 케르베로스와="" 계약을="" 맺은="" 유물이에요.=""/>

날카로운 손톱.

건틀릿을 감싸고 있는 심연을 담은 듯한 야수의 털.

야수의 털을 휘감고 있는 쇠사슬.

케르베로스의 앞발을 닮은 듯한 건틀릿이다.

하예은이 이 야수의 앞발을 손에 착용해 본다.

착용자의 뜻에 따라 꿈틀거리는 야수의 발톱.

<막대한 신성을="" 소모하게="" 되겠지만,="" 유사시에는="" 잠깐="" 케르베로스를="" 불러낼="" 수="" 있어요.=""/>

“생긴 것만 봐선 부를 시간도 없이 찢어발길 기세인데요.”

저걸 건틀릿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케르베로스의 앞발을 미니어처화 한 느낌이다.

“헤라 여신님 감사합니다. 마음에 쏙 드는 유물이에요.”

“예은아, 너를 상대하는 괴수들은 차라리 사자의 건틀릿이 그리울 거 같은데.”

저 발톱에 찢기느니 두들겨 맞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먼 과거="" 그이의="" 아들에게="" 내렸던="" 과업을="" 인간으로="" 몸으로="" 완수하다니,="" 훌륭합니다.=""/>

하예은의 12 과업 수행을 칭찬하는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

<더 정진해서="" 저의="" 영광(헤라클레스)이="" 되어주세요,="" 영웅신의="" 챔피언이여.=""/>

“나이가 드신 건지 너그러워지셨네요, 영웅신의 이름을 싫어하지 않으셨나?”

<꼭 이렇게="" 초를="" 쳐야겠나요!="" 손우진!=""/>

내가 볼 때는 나이를 먹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한 질책이 분명하다.

. . . . .

“다들 고생 많았다.”

“형제도 수고 많았네.”

“다들 고생 많았다.”

“하하!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가?”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손우진.

이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안드리안은 손우진의 어깨를 짚어 몸통을 돌려본다.

안드리안을 바라보는 손우진,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이미 떠나셨어요.”

하예은은 벌써 눈치챈 것인지 안드리안을 저지한다.

장난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 손우진의 분신이다.

“다들 고생 많았다.”

“하하하! 어떻게 넥타르 한 모금이라도 먹어볼까 했건만 늦었군.”

“안드리안은 그걸 뺏어 먹고 싶어요?”

뛰는 안드리안 위에 나는 손우진이 있었다.

넥타르를 사수하기 위해 분신을 세워 두고선 이미 화과산으로 떠난 손우진.

이 구질구질한 금태양을 향해 하예은은 작은 핀잔을 준다.

“아버지 제우스께서도 쉽게 주시지 않는단 말일세…”

“정당하게 과업을 이뤄낸 뒤 드세요. 아퀼라 님, 내려와 주세요.”

천둥 신의 전령을 부르는 하예은.

자신의 담당 챔피언보다 하예은의 말을 더 잘 듣는 아퀼라는

하예은의 부탁 한 번에 두 명의 챔피언을 태우러 내려온다.

이내 이 둘은 손우진의 거처 화과산으로 향한다.

. . . . .

분신을 세워둬서 금태양을 가볍게 제친 나는 집으로 빨리 돌아왔다.

화과산의 본래 우두머리, 스승님의 성역에 들어가 권리실행에 들어가도록 한다.

“저 왔습니다.”

<저승에 보내도="" 살아="" 올="" 정도는="" 되었군.=""/>

“덕분에 인생 첫 죽음도 경험해보고, 정말 감사하네요.”

영웅들은 살아서 저승을 방문하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반쯤 죽은 상태로 방문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신이 알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시던데요?”

크흠.

괜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쓸 때 없는 헛기침을 내뱉는 스승님.

<젊은 날의="" 치기였을="" 뿐이다.=""/>

“그래서 제 넥타르는 언제 주십니까.”

안부는 이쯤이면 됐고 방문한 본래 목적을 이야기한다.

<괘씸한 놈.="" 그놈의="" 술이="" 먼저다="" 이="" 말이냐?=""/>

“그러는 스승님 당신께서도 술 하나에 제자를 몇 번이나 팔아먹으시지 않았습니까.”

<한 마디를="" 안="" 지는군,="" 대체="" 이놈을="" 왜="" 거뒀을꼬!=""/>

화가 난 원숭이의 기분에 맞춰서 나타난 긴고아.

“스승님, 폭력 멈춰!”

내 빠른 사과에 긴고아를 거두는 성좌.

이내 돌원숭이 석상의 손아귀엔 검은색 술이 담겨있는 병 하나와 복숭아 뭉치가 들려있다.

<어서 갖고="" 빨리="" 나가거라.="" 네="" 놈이랑="" 대화하면="" 골이="" 다="" 아프다.=""/>

“이 복숭아는 뭡니까 스승님?”

<내 오랜만에="" 서왕모의="" 과수원을="" 털었다.="" 제자="" 놈이="" 먹었다고="" 말하면="" 조금은="" 봐주겠지.=""/>

천상의 여신께서 직접 재배하는 귀한 천도복숭아를 또 털어버린 망나니 원숭이.

그 귀한 복숭아를 훔쳐 먹어 불로불사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도둑질을 하십니까.

“그런데 인간이 먹게 되면 불로장생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그건 9천="" 년="" 산="" 복숭아들이고,="" 이것은="" 그="" 정도로="" 여물지는="" 않았다.=""/>

“뭐, 주신 것이니 식구들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렇게 스승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 뒤 성역 밖으로 나왔다.

나 혼자 다 먹기엔 복숭아는 넉넉하게 많은 상황.

넥타르는 양보 못하더라도 복숭아 정도는 줄 수 있지.

깐프마을 사람들, 예은이와 안드리안에게 나눠줘야겠다.

복숭아 한 아름을 안고 깐프마을로 내려갔다.

“우진 님 이건 뭐예요?”

“웬 과일이냐, 손우진.”

복숭아를 들고 찾아온 나를 맞이하는 깐프 남매 일레인과 엘레나.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일단 받아. 천상에서 온 귀한 과일이니깐.”

화과산 돌원숭이가 서왕모의 밭에서 마음대로 훔쳐 온 것이긴 하지만.

“이런 것을 주어도 되는가?”

“괜찮아, 스승께서 먹으라고 했으니 먹어도 되겠지.”

먹은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범이 될 뿐이다.

“잘 먹을게요!”

“고맙다 손우진.”

고맙긴, 책임이 분산되니 서왕모께 혼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따가 화과산에 하예은과 금색 양아치 한 놈이 올 예정이거든,

내가 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을에서 맞이해 줄 수 있을까?”

“알겠다. 손님으로 맞이하지.”

“당연히 가능하죠.”

“고마워, 그럼 부탁 좀 할게.”

난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넥타르를 마셔야 하거든.

깐프에게 손님 접대를 맡겨둔 뒤 다시 우리 집 수렴동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마셔 볼까.

텀블러에 얼음을 가득 채운 뒤 넥타르가 담긴 술병 마개를 연다.

뽕!

마개가 열리자 올라오는 향기.

역시 신의 음료라 그런지 향기부터 신경 썼나 보군.

마치 신화 속 천지창조를 빗어낸 듯 심연의 색깔을 담고 있는 넥타르.

회색빛 술을 술잔에 따르자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온다.

이런 기적의 술을 매일 마시는 올림포스가 부러워지네.

“캬아!”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신의 음료.

가사 상태에서 안드리안이 먹인 희석 넥타르는 비교도 안 된다.

연회에서 넥타르가 빠지지 않는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을 맛이다.

맛을 천천히 음미해 봤으니 이제는 들이부을 차례.

손은 쉬지 않고 넥타르를 술잔에 채운다.

내가 기억하는 기억은 여기까지다.

. . . . .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다.

마지막 기억은 넥타르를 끊임없이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눈을 떠보니 나는 욕조 안에서 잠들었는지 이곳에 들어와 있다.

“어마어마하네.”

초인의 신체 능력마저 상회하는 숙취라니.

이걸 매일 물처럼 마시는 신들은 대체 얼마나 튼튼한 간을 갖고 있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신성을 불러일으켜 몸에 남아있는 취기를 쫓아낸다.

기운과 함께 몸에서 피어나오는 술기운.

남아있는 술기운마저도 달콤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반나절을 꼬박 잠들었다.

지금쯤이면 예은이와 안드리안 모두 도착해있겠네.

두 명의 동료들을 맞이하러 나가보자.

깐프 마을에 있는 동료들을 찾으러 가는데

마을 근처에서 레인저들이 금태양을 묶어둔 채 끌고 가고 있다.

“뭐하냐? 이 금태양 녀석아.”

숲의 파수꾼 깐프 레인저들의 실력은 우수하지만

성좌의 챔피언을 쉽게 제압할 정도는 아니다.

그 말은 이 금태양 녀석은 레인저들이 여성 깐프인 것을 확인하고 일부러 잡힌 것이다.

“하하! 형제여, 이제야 일어났군그래.”

“진짜 여자에 미친 놈. 너는 어휴…”

이 침입자가 나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깐프 레인저들.

“혹시 저희가 실수한 것이 아닌지… 산의 주인이시여 용서하소서.”

“아냐, 이놈이 미친 거지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나에게 들키자마자 줄을 끊어버리고 그 즉시 일어나버리는 그리스 금태양.

“그나저나 형제의 신성이 증가한 것 같군. 넥타르는 맛있었나?”

녀석의 말을 듣고 내 안의 신성을 확인해 본다.

숙취를 몰아낼 때는 몰랐는데 정제되지 않은 신성이 내 몸을 돌아치는 것이 느껴진다.

“오오, 괜히 신의 음료가 아닌데?”

“기운을 갈무리해서 신성을 흡수하게나. 나는 그때 동안 이 아가씨들과 얘기 좀 하고 있겠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따라 와.”

“하하하하하하!”

속내가 들키자 웃어버리는 호탕한 금태양.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지내다니, 자네 나와 모시는 성좌를 바꿀 생각은 없는가?”

“네가 긴고아 맛을 한 번 맛본다면 그 말을 할 수 없을걸.”

원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야, 이 금태양 놈아.

갈 때까지도 레인저 깐프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금태양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깐프마을로 향한다.

“아저씨, 일어나셨네요?”

“응, 엄청 맛있긴 한데 넥타르가 생각보다 엄청 독하더라.”

“저도 다음 과업은 넥타르를 받아 봐야겠어요.”

나의 넥타르 후일담을 듣고서는 자기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는 하예은.

후배에게 괜한 바람을 불어 넣은 게 아닌가 싶다.

“깐프들에게 복숭아는 받았어?”

“네, 맛있게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아저씨.”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뭐.”

그리고 예은아, 너도 이제 공범이야.

서왕모의 분노를 받아 낼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은이만 데리고 수렴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안드리안 놈은 떠날 때까지 시도해보겠다며 깐프 마을에 머문다고 하여서

홀로 남겨두고 왔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엘프들은 꽤 보수적인데

안드리안 같이 파격적인 금발 태닝 양아치를 좋아할 여성 엘프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부모님 혹은 세계수에게 호적을 파일 것 같은데.

아무튼 알아서 하겠지.

하예은은 12 과업도 끝났겠다, 이제 무투의 출발선을 뛰쳐나간 상황이다.

이제 어떻게 하려나, 궁금해진 나는 예은이에게 질문을 건넨다.

“예은아, 이제 현장으로 복귀할 거냐?”

“아저씨.”

나를 부르는 하예은.

“왜 그래?”

“저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

“저 한동안 화과산에서 신세 좀 지면 안 될까요?.”

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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