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심해 방송
* * *
기존에 쓰던 계정이 아닌 미스터 손의 계정, 소위 말하는 부계정을 만들어
방송을 진행한다.
손우진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새내기의 신분으로 방송을 진행하니 홀가분하다.
내가 쓰던 원래 계정이 아니라 그런지 찾아오는 이는 별로 없다.
어두운 심해를 탐사하며 나만의 작은 스트리머를 찾아다니는 배고픈 아귀들이 몇몇
들어오는 것 말고는 유입조차 없는 방송.
시끌벅적한 기존의 방송도 재밌긴 하지만 잔잔한 경우도 나름 괜찮다.
챔피언의 유명세를 벗어던지고 누구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진행해나간다.
목소리를 들으면 시치미도 뗄 수 없기에 마이크는 진작에 껐다.
시청자들과 대화할 필요도, 방송용 콘텐츠를 준비할 필요도 없기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파이트 오브 히어로즈를 즐겨볼까 한다.
시청자들은 게임 방송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플레이하는 나야 재밌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선 히어로가 업계에 대해
입을 터는 게 더 재밌다나 뭐라나.
그래서 개인 방송에선 하지 않고 고아단의 패악질이 정도가 지나쳤을 때
기강을 잡는 협박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파이트 오브 히어로즈는 전 세계 히어로 협회와 협업하여 만든 게임이라
모든 캐릭터를 실제 히어로를 토대로 제작하였다.
현실 속 세계 각국의 유명 히어로들을 직접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답게
모델이 되는 히어로가 강해지면 게임 속 캐릭터도 비슷한 수준으로 업데이트한다.
때문에 파오히에 출연하려거나
파오히 속 자신의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수련하는 미친 새끼들도 있다.
“나도 그중에 한 명이긴 했지만.”
보육원을 벗어나 스승님께 수련을 받던 과거엔
어떤 오락거리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챔피언이 된다면 반드시 나를 사기 캐릭터로
출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곤 했지.
지금은 성좌 이수 과정을 밟는 중인데 이런 경우엔 어떻게 업데이트를 해줄까?
하지만 히어로 본인이 밝히기 전까진 멋대로 업데이트를 하지 않기에
게임 속 손우진이 더 강해질 일은 없을 거다.
웰컴 투 더 파이트 오브 히어로즈
배경음악과 함께 나오는 아나운서의 인사말.
배경음악을 잠깐 듣다가 온라인 플레이를 선택해 준다.
“캐릭터가 좀 늘어났네.”
모든 게임사가 그렇듯이 신규 히어로는 팔아먹기 위해서
양심 없는 성능으로 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파오히도 그렇다.
이 때문에 캐릭터가 새로 출시되면 모델이 된 히어로 역시 욕을 먹는 경우가 흔하디 흔하다.
캐릭터창을 구경한 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나를 선택한다.
손우진!
외국인 성우의 어색한 한국어 발음과 함께 등장하는 나.
저 정도로 발음해 주는 것이 어디인가?
대전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눈을 돌려 채팅창을 확인해 본다.
파오히는 방송하는 사람도 많은 만큼 이 심해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없나 보다.
채팅도 치지 않고 조용히 방송을 보는 시청자는 5명 정도.
그마저도 내 계정과 봇 매니저를 뺀다면 순수 시청자는 3명밖에 되지 않는다.
왜 나가지도 않고 여기서 이런 방송을 보고 있는 걸까?
아직까진 신분을 알아채도 지장이 없는 인원이기에
선글라스를 벗은 뒤 마이크를 켜고 한 번 말을 걸어본다.
“여러분, 대체 이 방송은 왜 보고 있는 겁니까?”
[???]
[헐 뭐야]
[혹시나 해서 봤는데 진짜 손우진이네]
“아니 이 새끼들은 어딜 가도 있네. 넌 조용히 방송이나 봐라.”
아무것도 몰랐던 시청자 두 명에 기존 시청자 한 명.
날 따라온 고아단 녀석보다는 나머지 두 명이 진짜 광기의 소유자가 아닐까.
이런 심해 방송에는 왜 들어오는 거야.
“나머지 분들은 반가워요. 요즘 안 좋은 일도 있었고 소란 일으키기 싫어서 그러니
조용히 시청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이런 건 혼자봐야지 ㅋㅋ]
[왜 나만…]
올렸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선 미스터 손으로 돌아온다.
대전 상대를 찾았습니다!
이 플레이어와 대전하시겠습니까?
때마침 대전 상대도 잡혔다.
수락을 눌러 첫 게임을 시작한다.
로딩 화면 이후 나타나는 상대방의 캐릭터, 그리스 금태양 안드리안이다.
“근본이 없네. 안드리안을 왜 격투 게임에 출현시켜?”
제정신인가 이 제작자 새끼들?
멀리서 번개를 던지는 놈을 격투 게임에서 어떻게 연출하려고 추가했지?
게임이 시작되자 컷신이 등장한다.
히어로의 외모 말고는 모든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게임답게 상대방의 의상 또한 화려하다.
근육질 상체에 쫙 달라붙는 흰색 민소매에 주렁주렁 매단 금색 목걸이.
전형적인 금태양의 관상이다.
하하하! 사내 녀석은 반갑지 않군.
실제 안드리안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성우분이 안드리안의 특색을 잘 살려서 연기했다.
내 캐릭터를 만들 때도 분명 나에게 하나하나 검수를 요청했는데
안드리안 놈, 이 꼴을 보고도 좋다고 허락한 게 분명하다.
내 컷신은 나의 대표 도발, 까딱까딱이 걸렸다.
아무런 말 없이 상대방을 비웃으며 손을 까딱이는 게임 속의 나.
내가 봐도 참 꼴 받게 도발한다.
Round 1, Fight!
안드리안 캐릭터를 살펴보자 체력창 말고도 이상한 창이 밑에 띄워져 있다.
저건 또 뭐야?
그때 내게 번개를 날리는 상대방.
안드리안의 번개는 현실과 달리 느릿느릿하게 날아온다.
하긴 고증을 지켰다간 모두 다 안드리안을 골라 번개만 날리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격투 게임에서 지랄 났네 진짜.”
육체로 대화하는 뜨거운 격투 게임에서 원거리 기술을 사용해?
이 새끼는 사도 그 자체이다.
번개를 막으면 어떻게 되나 궁금즘이 생겨 가드를 올려 막아본다.
하지만 번개가 닫자마자 캐릭터가 마비에 걸린 듯 가드가 강제로 풀려버린다.
그사이를 틈타서 내게로 다가온 안드리안.
이내 게임 속 손우진은 허공으로 떠올려진다.
맞을 때마다 정체불명의 창에 하얀색 게이지가 차오르는 것이 보인다.
격투 게임의 절대적인 원칙.
모르면 맞아야지.
금태양의 주먹에 두들겨 맞는 게임속의 나.
전격 기술을 중간중간 섞어서 때리는 걸 보면 현실 속 안드리안을 아주 잘 표현했다.
“캬! 진짜 잘 만들었다. 장사할 욕심이 한가득해 아주 그냥.”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땅에 내려온 게임 속의 나.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벌어진 체력 차이를 좁히기 위해 안드리안을 몰아붙인다.
원거리 능력을 사용한다면 사용할만한 거리를 벌려주지 말자.
히어로의 동체시력을 이용해서 막을 건 막고 때릴 건 때리는
이기적인 교환을 통해 비슷한 체력 상황까지 끌고 왔다.
서로 공중에 뜨거나 카운터가 날 시 끝나는 상황.
기본적인 원 잽과 하단으로 서로 견제만 주고받는다.
그때 과감히 다가가 팔괘 8장 곤을 내지른다.
바위처럼 변한 주먹으로 정권을 찌르는 게임 속 손우진.
하지만 안드리안 플레이어는 가드에 성공한다.
괜찮아, 딜레이 캐치는 힘든 기술이니…
흐하!
내 예상을 가볍게 무시한 채 몸을 반짝이며 발을 휘두르는 안드리안.
손우진은 또 한 번 공중으로 떠오른다.
안드리안의 전격으로 튀겨진 손우진의 체력은 걸레짝이 되어 버린다.
K.O!
“시발!”
[야발 ㅋㅋㅋㅋ]
[ㅋㅋ 안드리안의 디바인 게이지 시스템 모르셨나 보네]
[얘 파오히 존나 오랜만에 하는 거라 안드리안 모름 ㅋㅋㅋㅋ]
“아니 시발, 말이 안 되잖아요! 팔괘 8장 딜캐는 선 넘었지!”
[안드리안은 디바인 게이지룰 쓰면 프레임이 달라지는 기술이 몇 개 있어요]
[게이지 찼을 때는 조심하셔야 돼요]
[꼬우면… 아시죠?]
“독한 새끼들… 돈도 잘 버는 새끼들이 밸런스는 항상 개판이야.”
[인정 얘네는 ㄹㅇ 돈미새에요]
[그래도 고증은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더 열받음]
[ㅋㅋㅋㅋ 어질어질하죠?]
Round 2, Fight!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라운드를 시작한다.
내가 안드리안을 모른다는 걸 파악한 상대방은 뒤로 대시를 치며
전격을 날리는 더러운 수법을 펼친다.
나를 너무 좆으로 본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전격은 진작 파훼에 성공했다 자식아.
횡 이동으로 요리조리 전격을 피하며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힌다.
1라운드 마지막에 디바인 게이지를 소모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딜레이 캐치에 당할 일은 없다.
“내밀어, 내밀어 봐. 안 내밀어?”
큰 기술은 내밀지 않고 안전한 기술들로 압박해 나간다.
소금 맛이 느껴질 정도로 짭짤한 플레이는 상대방의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근접 거리에서 압박감을 느낀 상대방은 결국 하단 공격으로
이 상황을 타개해 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턱!
하단 공격이 막혀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안드리안은 팔괘 3장으로 솟아오른
물기둥을 맞고선 공중으로 아름다운 여행을 떠난다.
마지막은 휘두른 여의봉에 저 멀리 날아가는 안드리안.
K.O!
“저것 봐요. 이지 컴 이지 고 모르나? 날먹엔 한계가 있지.”
[와 어떻게 손우진으로 안드리안을 잡지?]
[너프를 하도 먹어서 s급 캐릭은 아니긴 한데 ㅋㅋ]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본방과는 달리 혼자서 열심히 도배하는 녀석을 보니 짠하다.
자기 동지들도 없는데 너는 이곳까지 찾아와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구나.
3명밖에 없는 시청자들.
하지만 진짜로 소통하는 느낌이 들어 본래 방송과는 또 다른 만족감을 준다.
미스터 손 방송도 나쁘지 않은데.
“안 좋은 캐릭터가 어디 있습니까? 다 파일럿 차이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1라운드를 가져간 상황.
디바인 게이지인지 날먹 게이지인지 적응은 끝났다.
더러운 안드리안 자식.
무투파 대표로서 이 게임은 절대 질 수 없다.
이번 판에 이기는 사람이 게임의 흐름을 가져올 것이다.
어느새 디바인 게이지를 거의 다 채운 상대방.
“뭐야? 왜 때리지도 못했는데 게이지가 차 있어요?”
[맞아도 차는 시스템이라서요]
[안드리안은 때려도 맞아도 이득이에요]
[안드리안은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그럴 수 있어, 조심하면 되지.”
아까 전 근접전의 참사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지
원거리 전격 말고도 중단 기술과 짧은 견제기를 남발하는 상대방.
잔뜩 쫄아있구만.
차근차근 막아가며 다시 거리를 좁혀나간다.
안드리안이 중단 기술을 남발하다가 캐릭터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딜레이 캐치 타이밍인가?
어퍼 기술로 안드리안을 건져 올리려고 시도한다.
Βροντ! (천둥이여!)
“이번엔 왜 또!”
분명히 딜레이 캐치 타이밍이였는데
디바인 게이지를 사용해서 나보다 먼저 기술을 내미는 안드리안.
이런 불공평한 기술은 대체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거야?
얼굴 한번 보고 싶다.
[내밀었죠?]
[게이지 찼을 땐 개기면 안돼요]
[뉴비 커엽네 ㅋㅋㅋㅋ]
공중에서 안드리안에게 두들겨 맞는 내 캐릭터를 보고 있으니 업데이트가 마렵다.
더러운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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