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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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 국장은 내 연락을 받고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통화하던 중에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일 처리 진행 과정에 대해서
술술 털어놓았는데 국장 모르게 납치 시도 계획을 세웠던 놈들은
모두 해임당한 뒤 성좌의 얼굴에 먹칠을 한 죄로 힘마저도 회수당했다고 한다.
성좌와 크립티드의 등장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 성향은 색이 바랬나 싶었는데
아직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말다니, 이걸 CIA답다고 해야 하나.
나는 터너 국장에게 미국행을 선택한 대신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영상을 찍는 데 필요한 장소를 대여해 줄 것.
모두가 타고 갈 수 있는 전세기를 보내올 것.
미국에 도착해도 절대로 구질구질하게 들러붙지도 간섭하지도 말 것.
그는 조건을 듣고선 그걸로 괜찮겠냐며 흔쾌히 수락했다.
이보다 더한 걸 요구해도 그는 수락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받아들였을 테지만
부하 직원에 치이고 국가에도 치였을 터너 국장이 불쌍해서 이 정도로 끝낸 것이다.
내가 가진 힘을 보여주기 위해 눈에 채이는 크립티드 몇 마리 정도는 토벌할 순 있겠지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식의 요청을 들어주는 건 사양이다.
한 번 들어줬다간 다른 국가에선 미국도 해줬는데 우리도 좀…
이런 식의 아쉬운 소리가 나올 게 뻔하니 말이다.
끌려다니는 건 이제 사양이다.
“그렇게 됐으니깐 넌 남아서 대기해.”
“…하다 하다 이제는 집 지키는 경비견 취급이냐.”
“어쩔 수 없잖아, 막을 수 있는 인원이 너랑 라돈뿐인데.”
“너도 알겠지만 먼저처럼 놈들이 칠대성을 직접 불러오는 건 내 힘으론 막을 순 없어.”
약한 소리를 하는 분신 녀석.
나를 배경으로 만들어졌으면 허세라도 부려 봐야지, 남자가 말이야.
그깟 칠대성이 대수인가, 대수이긴 하지.
“그땐 근두운 타고 올 테니 그동안에 입이라도 털어서 시간이라도 벌어야지 어쩌겠냐.”
“너 때문에 내 방송의 콘텐츠는 마르질 않겠어.”
“그러고 보니 너 엘레나가 이름도 지어줬다면서? 뭐라고 했더라, 진우?”
“시끄러! 언제까지 분신이라고 불릴 수는 없잖아.”
“크크, 뭘 또 그리 열을 내시나.”
괜히 이름이 생긴 것에 발끈한 놈이 큰소리를 친다.
방송을 돌려보면 이름이 생긴 것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고 했던데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방송을 돌려봐야지.
분신에게 전달사항을 전하고 나선 이제 준비를 하기로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각자 준비할 것이 많기에
아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챙길 것이 있다며 여자들은 쇼핑을,
나는 방문 허가증을 받아야 해서 협회에 방문하기로 했다.
허가라고 해봤자 아저씨의 동의만 받으면 그만인지라 협회장실로 향했지만
아저씨의 손녀, 비서 아가씨만 자신의 자리에 앉아 사무를 보는 중이다.
“지수 지수 지수야.”
“…”
내 깐족거림에도 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데 성격을 모를까.
그러나 아저씨의 비서 역할로 계속 점잔을 빼는 것이 괘씸했기에
오늘 숨겨져 있던 본성을 끄집어 내볼까 한다.
마침 아저씨도 없어 보이는데 잘 됐다.
“아저씨 어디 가셨냐?”
“협회장님은 잠시 외출하셨어요.”
“자기 할아버지한테 딱딱하게 협회장님이 뭐냐, 손녀면 애교도 부리고 그래야지.”
탁!
“챔피언. 죄송하지만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구분해 주세요.”
“왜 소정이나 너나 어른 행세를 하려는지 모르겠다. 서로 편하게 살자 편하게.”
그렇게 점잔빼던 안소정도 결국 예전처럼 오빠를 찾으며 빼액 소리를 질렀는데
한지수 너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자.
“더 물어보실 게 없으면 나가주세요.”
“싫은데? 여기서 아저씨 기다릴 건데?”
“…마음대로 하시던가요.”
한지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소파에 드러눕는다.
“역시 협회장실이 좋긴 좋아, 입구에 있는 가구부터 다른 게 느껴지잖아.”
“볼일이 있으시면 그냥 저한테 말씀해주시죠? 제가 처리해 드릴 테니 빨리 해결하고 가세요.”
“오오, 지수 네가 하기에는 조금 벅찰 텐데.”
“말씀해주시죠, 손우진 챔피언?”
“정말로 해도 되나?”
“예. 상관없습니다.”
“알았어. 나 미국 갈 거야.”
“미국으로… 네?”
말을 하다 말고 눈이 동그래지는 한지수.
저렇게 보니 아저씨의 얼굴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손녀가 맞다.
“미국 간다고. 빨리 협회 허가증 발급해줘.”
“잠깐만요! 뜬금없이 미국은 왜 가신다는 거죠?”
“이것 봐, 해 주지도 못하네.”
“이런 중요한 사항은 다 절차와 과정이란 걸 거친 뒤에…”
“해 줘.”
“미국 방문은 비서인 제가 혼자서 결정할…”
“해 줘.”
“사람이 말을 하면…”
“해 줘.”
한지수의 얼굴에 새빨간 딸기가 붉게 피었다.
속으로 카운트 다운을 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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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진 이 새끼야! 아까부터 사람 속 그렇게 긁을래!!!”
버럭버럭 화를 내지르는 게 누구에게서 배운 건지 안 봐도 알겠다.
저 모습은 누가 뭐래도 아저씨의 직계 가족이 맞다.
“이야! 우리 한지수 예전 성격 그대로네.”
“야!!!”
벌컥!
“뭐가 이렇게 시끄럽나?”
“어휴, 오셨어요?”
때마침 협회장 아재가 도착하셨다.
아저씨는 손녀의 얼굴이 분노로 가득 찬 것에 잠시 흠칫하시더니 시선을 내게로 돌린다.
괜히 불똥이 튀기 싫으시다는 거지.
“또 우진이 네놈이 깐족거렸냐?”
“지수 얘가 계속 점잔 빼잖아요. 서로 못 볼 꼴 다 보고 자란 사인데 말이죠.”
아, 웃참에 실패하신 아저씨.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황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신다.
문제는 손녀가 그 모습을 봤다는 사실이지만.
“할아버지!”
흠흠!
뜨끔한 아저씨가 괜한 헛기침만 내뱉는다.
손녀에게 쩔쩔매는 할아버지라, 너무 오냐오냐 키우셨어.
“자자, 진정들 하고. 그래서 우진이 네놈은 중앙정보국 문제로 찾아온 거지?”
“오오, 역시 협회장 위치에 있으니 정보가 들어오시는 건가.”
“허, 남의 나라에서 그리 깽판을 쳤는데 모른 척하기가 더 힘들지.”
블랙 요원들을 통해 아저씨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하긴 사람 많은 동물원 한가운데서 단체로 얻어맞고 터너 국장까지 찾아왔으니
모를 수가 없었겠지.
“터너 국장한테 안 쓰는 땅 좀 빌려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미국 좀 다녀올 테니 우리 한 회장님이 힘 좀 써주세요.”
“뭐 하러 미국까지 가냐? 한국에도 노는 땅이 얼만데.”
“그냥 전부 털어놓을 거예요. 유출된 영상으로는 감이 안 오는 듯하니 몸소 협박해 줘야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 때문에 미국에 가서 힘을 쓸 생각이더냐?”
“예. 괜히 땅 귀한 한국에서 그랬다간 욕만 처먹습니다.”
“흐음… 그래 알겠다.”
아저씨는 잠시 고민하시더니 허락을 해 주신다.
“우진이 네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보군.”
“그냥 눈앞의 적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온 거죠. 제가 다른 걸 신경 쓰기엔 제 코도 석 자잖아요.”
복해대성 교마왕의 경우 내가 자신의 무대 바다로 찾아갔기 때문에
자만하여 일 대 일 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교마왕 놈이 여의주를 털려 먹은 순간부터 놈들도 더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이다.
“네 말대로 한 번쯤은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허가증을 발급해 줄 테니 잘 다녀오거라.”
아저씨는 손녀에게 손짓 한 번으로 서류를 대령하게 만든 뒤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
허가증을 발급해 주신다.
아저씨 특유의 화끈한 일 처리는 언제 봐도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제가 없는 동안엔 제 분신 놈과 라돈이 한국을 지킬 거예요. 그래도 칠대성이 직접적으로 하계에 내려온다면 바로 달려올 테니깐 걱정하지 마세요.”
“흐으,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라돈을 데려온 게 도움이 될 줄이야…”
“다 제가 혜안이 있어서 데려온 거 아닙니까?”
“혜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어! 서울 시민들 무마하느라 협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는 하는 소리냐!!”
역시 한지수도 원조는 이길 수가 없네.
미국 가기 전에 한 회장님 호통을 안 듣고 같으면 아쉬울 뻔했는데 듣게 되서 다행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아무튼 애들이랑 잘 다녀올게요.”
“에휴. 너 때문에 늙는다…”
한숨을 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나를 붙잡는 아저씨.
“잠깐, 미국에 가기 전 법사님을 찾아뵙거라. 안 그래도 협회로 너를 찾는 연락이 왔거든.”
“…마법사요?”
“새끼가 마법사 같은 소리 하고 있어.”
“…혹시 자은사?”
“그래 임마.”
“하아…”
“땅 꺼지겠네. 왜 그렇게 한숨이야?”
“법사님이 불러서 좋을 게 전혀 없어서 말이죠.”
자은사의 법사님이 부른다.
나를 찾을 법사님은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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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의 고도, 시안시 남동쪽 교외에 있는 자은사.
허가증 발급을 다시 받기 귀찮다고 해서 도망쳐 보려 했지만 이미 그쪽에서 발급을 받아둔 상태란다.
그곳을 향해 구름을 타고 가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하나 떠올리는 중이다.
예전에 대혁이와 빡빡이라고 험담을 한 게 들켰나?
아니면 최근에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
나도 모르게 구름 위에서 참회의 시간을 갖는 중이다.
고도를 낮춰 사원에 착지한다.
오자마자 나를 반기는 스님의 동상.
성좌의 모습을 한 동상은 내 속도 모른 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동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 머리에 나타나지도 않은 긴고아가
저릿하게 울리는 환상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사원에 들어서자 귓가에는 은은한 목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법당으로 찾아가 문을 벌컥 열어 인사부터 건넨다.
“할렐루야!”
똑 똑 똑!
내 인사말에 뚝 그쳐지는 목탁 소리.
목탁을 두드리던 스님이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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