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대협곡
* * *
“크어어억…”
쿠우웅!
거대한 체구를 지닌 외눈박이 거인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넘어간다.
놈의 몸 정 한가운데에는 여의가 지나갔던 흔적인 동그란 구멍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놈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놈인가 보네.”
대협곡 그랜드 캐니언을 홀로 한가하게 거닐면서 알아낸 것이 있다.
고독 항아리가 된 대협곡에선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녀석들은 온갖 험한 꼴을 본 놈들이기에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판단이 서기 전까지는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몸에 상처가 많은 놈들은 나와 마주쳤을 때 경계를 풀지 않고 빤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덤벼들었다간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몸 안의 본능이 알아차렸던 거겠지.
영상을 찍기 위해서 온 그랜드 캐니언.
나에 관한 고찰 영상은 이미 찍어 두었고 내 능력을 보여줄 영상 하나만 찍으면 그만인데
이곳에서 어떤 영상을 찍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곳.
당연하게도 사람의 흔적 또한 찾아볼 수 없던 협곡에서 보이는 광경.
대협곡의 평야에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거대한 지렁이 같은 것이 아이의 뒤를 쫓고 있는 상황.
자세히 보니깐 아가리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커다란 뱀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어린아이는 타고 있는 커다란 소를 재촉하며 열심히 뛰어보곤 있지만 곧 있으면 따라잡힐 것이다.
“저 새끼도 참 애쓴다, 저 덩치에 기별도 안 갈 거 같은데 말이지.”
저 친구들을 추격하는 데 사용되는 에너지를 생각해보면 수지타산 맞지 않는 식사다.
탐욕스러운 놈 같으니.
이곳 대협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나만의 룰이 있는 법이다
사람을 공격한 크립티드는 배제한다.
내 눈앞에서 내가 세운 룰을 어긴 놈이기에 즉시 개입에 나서기로 했다.
쩌억!
탐욕스러운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뱀의 혀가 아이를 낚아채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빠르게 뛰쳐나가 뱀 새끼보다 먼저 아이를 낚아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본다.
“안녕.”
이런 오지에서 자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신기한가 보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커다랗게 동그래진 눈.
그렇게 놀랄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뒤를 봐야죠! 뒤요!”
아… 그쪽이었어?
아메리카 원주민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동양인이 고작 거대한 뱀 한 마리에게 밀리다니.
자존심이 상한다.
내 자존심을 구긴 대가는 녀석의 목숨으로 받아내기로 했다.
“커져라.”
주인의 명령에 따라 늘어나는 여의.
끼어든 불청객까지 한입에 삼키려던 뱀의 아가리를 떡하니 막아버린다.
늘어난 여의 때문에 강제로 입을 벌리고 있던 뱀은 자신의 치악력만 믿고 여의봉을 부숴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다.
케엑!
몇 번이나 여의를 뱉거나 씹어먹으려고 시도하는 놈.
결국엔 여의를 부수지 못한 거대 뱀은 곧이어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해서 죽고 만다.
탐욕스러운 놈다운 결말이다.
우웅!
“알았어, 너무 화내지 마.”
거대한 뱀의 입에 틀어박혀 있던 여의가 원래 크기로 되돌아온 이후에 내 손으로 돌아온다.
내 명령 때문에 온몸이 침 범벅이 된 여의가 짜증을 부리는 것이다.
손안에 물을 소환한 뒤에 여의를 닦아주면서 녀석을 달래본다.
무우!
저쪽을 살펴보니 등 위에 타고 있던 주인이 갑작스레 사라져서 놀란 들소가 주인 곁으로 돌아와서 아이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다.
“꼬마야, 너는 어디서 왔니? 이곳 출신이냐?”
“제 이름은 꼬마가 아니에요.”
소를 쓰다듬는 걸 멈추고 제법 당돌한 태도로 나오는 녀석.
“그러면 뭐 어린 늑대라던가 용감한 들소 정도?”
“저희 세대는 그런 이름이 아니거든요, 제 이름은 줄리아예요.”
너무 구식의 사고방식이었나.
아메리카 원주민식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줄리아.
“아 그러냐… 아무튼 반가워. 나는.”
“당신이 손우진이죠?”
먼저 내 이름을 언급하는 줄리아.
대협곡의 주민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뭐야?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어?”
“라디오를 통해서 당신에 대해 알게 됐거든요. 탐식의 뱀을 간단하게 해치운 걸 보니 제가 맞췄나 보네요.”
공항에서 벌인 짓이 미국 전역으로 보도되다니, 자중할 걸 그랬나.
그랜드 캐니언에서 사는 인디언 꼬맹이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나 보다.
“근데 넌 왜 여기서 저런 놈한테 쫓기고 있었냐?”
“추장님의 점지가 있었어요. 귀한 손님이 방문할 테니 무작정 마중 나가라고 하셨거든요.”
자신의 땋은 머리를 빙빙 꼬며 말을 이어 나가는 줄리아.
“그래서 점지된 손님이 탐식의 뱀인줄 알고 타이슨이랑 함께 다가갔는데… 제 착각이었던 셈이죠.”
“타이슨은 또 누군데?”
“이 아이요.”
무우우!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힘차게 우는 들소.
이름값에 걸맞게 강인해 보이는 녀석이다.
애초에 초식동물이 포식자의 추적 앞에서 주인을 버리지 않고 도망친 것부터가 대단한 녀석이기도 하고.
“넌 참 간도 크다. 저런 놈한테 다가갈 용기가 어서 나왔냐?”
“추장님의 점지는 틀린 적이 없으니깐 믿고 행할 수밖에요. 실제로도 이렇게 만났잖아요?”
“참나…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도 아니고.”
줄리아가 말하는 추장이라는 자도 히어로 같은 능력자인가?
예지 능력을 지닌 히어로는 흔하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 성좌 아폴론이 예지의 신으로도 불리긴 하지만 그의 능력을
인간이 사용했다간 눈이 멀기 때문에 그의 신도들과 챔피언은 쉽사리 미래를 점치지 않는다.
“그래서 저랑 같이 마을로 가시겠어요?”
“그래, 이것도 인연인데 가자 가.”
귀한 손님으로 맞이한다는데 가 봐서 나쁠 건 없지.
저 맑은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을 불러온다.
“와… 이게 하늘에 있던 구름이에요?”
“타볼래?”
“꺄악!”
줄리아의 옷 뒤를 잡아서 구름에 태워버린다.
자신이 탈 구름이란 걸 예상 못 한 줄리아가 소리를 꽥 지른다.
“놀라긴, 구름 처음 타봐?”
“구름을 타고 다니는 인간은 당신밖에 없거든요!”
“큭큭. 그런데 이 친구는 어쩐다.”
커다란 눈을 끔뻑이면서 나를 바라보는 들소 한 마리.
아메리카들소는 성질이 굉장히 고약해서 길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들었었는데
이 타이슨이라는 친구는 어째 눈망울부터가 순해 보인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걸까?
“이 친구한테 나 좀 태워달라고 부탁해줄래? 서로 바꿔서 타고 가자.”
“알겠어요. 타이슨, 이 사람이 추장님이 말씀하셨던 손님이야. 그를 태워주겠니?”
투욱 투욱.
자신의 앞발로 땅을 긁으며 내게 꼬리를 휘적이는 들소.
“아이가 허락해줬어요. 타고 가도 괜찮을 거예요.”
저것이 자기 나름대로 허락하는 표시였나 보다.
“그것 참 황송하군.”
마지막 야생의 자존심인지 그 커다란 몸집을 굽혀주지 않는 타이슨.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녀석의 등에 착지한다.
인장까지 얌전히 착용한 걸로 보아선 정말로 사람 손으로 길들인 들소인가 보다.
머리에 난 거뭇거뭇한 털을 만져보니 복슬복슬한 게 촉감이 꽤 좋다.
온종일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이랴! 가자 타이슨!”
무우우.
김빠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하는 들소.
아까까지만 해도 폭발적인 힘으로 힘차게 뛰던 놈이 사람을 차별하는 건지 서비스가 영 좋지 않다.
“야 타이슨, 이러기야?”
터벅터벅.
이젠 대답도 하지 않는 타이슨.
“저기요! 먼저 가지 말고 어떻게 타야 하는지 알려 주셔야죠!”
저 뒤에선 구름과 씨름 중인 줄리아가 나를 부른다.
아, 내가 구름을 조종하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아서 꼼짝도 못 하는 중인가 보다.
“그냥 가고 싶은 방향을 마음속으로 생각해! 네 의지에 따라서 움직일 테니깐!”
“제 의지로요? 꺄아아악!!!”
쏜살같은 속도로 치고 나가는 줄리아.
초보자가 다루기엔 어려웠던 걸까, 구름을 꽉 붙들고서 저 멀리 사라져버린다.
무우우우!!
“달려라 타이슨!”
자신의 주인이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놀란 들소가 그에 맞춰서 뛰기 시작한다.
“으어어어, 무슨 덤프트럭을 맨몸으로 타는 느낌인데!”
탑승객은 무시한 채 자신의 주인을 쫓아서 달리는 들소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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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재밌었다. 그치 타이슨?”
무우우!!!
폭격기처럼 달리는 동안 자신의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은 인간을 인정이라도 해주는 듯
대답해주는 타이슨.
“전혀 재미없었거든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채로 빼액 하고 소리 지르는 줄리아.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동물이 재밌었고 한 명만 재미없었으니 판정승이다.
“구름하고는 친해졌어?”
“네. 고맙게도 누구 덕분에 단기간으로 익숙해졌네요.”
“고맙긴 뭘.”
“칭찬 아니거든요. 후우, 정말로 라디오에서 듣던 대로 괴짜는 괴짜네…”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줄리아.
“대체 라디오에서 나에 대해 뭐라고 말했길래 그래?”
“당신이 최초의 인간 출신 초월자라면서 호들갑을 떨던 데요? 세상의 왕이 될 사람이라면서 말이에요.”
“뭐?”
이게 뭔 개소리야?
“세상의 왕? 잠깐만, 초월자는 또 뭔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줄리아.
“그들이 생각하는 초월자는 하늘에 계시는 신령님들을 말하는 거겠죠.”
초월자? 신령?
성좌를 말하는 건가?
공항 사건을 통해서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줄리아가 전해준 어질어질한 소식에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그러면 너희 추장님도 나를 초월자나 신령으로 생각하고 초대한 거야?”
“그건 추장님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저는 그저 손님을 마중 나가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이에요.”
그랜드 캐니언에서 만난 아메리카 원주민 소녀 줄리아가 전해 준 바깥 세상의 소식은 굉장히 왜곡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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