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대협곡
* * *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줄리아의 마을.
대자연 속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절벽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은 세상과 동떨어진 평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뭔가 평화롭네.”
“다 신령님들 덕분이에요. 저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신령님의 보호 아래에서 살고 있거든요.”
“너희 마을의 성좌들 말이야?”
“신령님들은 성좌가 아니에요.”
“아… 그러냐.”
그들이 믿는 신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들 입으론 성좌가 아니라고 부정하니 믿을 수밖에.
줄리아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잠시 멈춰 섰다.
“잠시만 연락해야 할 곳이 있어서 그런데 먼저 들어가 있어.”
“네? 그렇지만 이곳은 휴대 전화 전파가 잡히지 않는 곳인데요?”
“아아, 전화는 갖고 오지도 않았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줄리아.
궁금하다면 직접 알려줄 수도 있지.
[대충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거야]
“악!”
줄리아에게 전음을 보내니깐 화들짝 놀란다.
비명이 가식 없이 우렁찬 것을 보아하니 정말로 놀랐나 보다.
“놀랐잖아요!”
“큭큭.”
“정말… 볼일 다 보시면 저기 보이는 추장님의 집으로 들어가 보세요. 가자 타이슨.”
무우우.
내게 추장의 집을 알려준 뒤 타이슨을 보살피러 가는 줄리아.
뛰어오느라 지쳤을 들소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다.
그들을 보낸 뒤 나는 화과산에 있는 분신 놈에게 전음을 보냈다.
바깥세상에서 나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들어봐야 한다.
“빨리빨리 받아라.”
이 자식이 몰랐을 리가 없다.
내가 분신들의 숫자를 늘려서 타격을 받았을 때 그들과의 연결을 잠시 끊고 복구하지 않았더니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쩐 일이야]
녀석이 껄끄러운 목소리로 전음을 보내온다.
목소리 톤만 들어봐도 자기 스스로 캥기는 것이 있는 눈치다.
“야,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않아?”
[무슨 할 말]
“내가 너 말고 여기 먼 나라 친구한테 소식을 들어야겠냐?”
[아 또 갑자기 연락해서 왜 그러는데]
“뉴스쇼 말이야 새끼야.”
[하아…]
한숨을 푹 쉬는 분신.
반응을 보아하니 들킬 게 들켰다는 반응이다.
“네 도움이 필요해.”
[그냥 나 성좌요 하고 다니면 안 돼?]
“아주 들킨 마당에 막 나가겠다 이거지?”
나는 분신에게 그랜드 캐니언에서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들을 알려주었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신성의 관계.
내가 해주는 설명을 잠자코 듣고만 있는 분신.
“내 의지 하나로 틀어막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나를 성좌로 취급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러다가 정말로 승천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내가 승천한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 칠대성 놈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응?”
내 신성을 탐내고 있는 칠대성.
그런데 그 타깃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뜨게 된다면 놈들의 분노는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너를 부르려고 지상에서 깽판을 치지 않을까?]
내 사고방식을 이어받은 놈답게 대답이 알아서 척척 나온다.
그래서 더 괘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한테 성좌 해 먹으라는 소리가 나와?”
[아오 시발! 도움도 안 되는 칠대성 개새끼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분신이 칠대성을 씹어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사람들에게 적당한 인식을 심어 줄 프락치 한 명이 필요해.”
[설마 아니지?]
“맞아. 그게 바로 너야.”
. . . . .
분신에게 지시 사항을 알려준 뒤 연락을 끝마쳤다.
하기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놈에게 너만을 위한 긴고아를
천계에서 하나 더 받아오겠다고 설득을 했더니 조용해졌다.
본체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큰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정도는 따라야지.
화과산에 남아있는 녀석이 분신 중에 가장 똑똑하고 자아가 확고한 분신이기에 녀석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일을 해결한 뒤에 마을로 들어서니 나를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외지에 동양인이 덜컥 찾아왔으니 신기할 법도 하지.
그것도 마을 밖은 혈투가 펼쳐지는 야생 그 자체인데 말이다.
먼저 들어간 줄리아는 타이슨의 친구들로 보이는 들소 무리한테 여물을 주고 있다.
“통화는 다 끝나셨어요?”
“응, 본의 아니게 좀 길어졌네.”
“추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줄리아가 안내했던 추장의 집으로 향한다.
마을 초입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곳의 자연지기는 특히나 더 풍부한 것 같다.
마을을 지켜준다는 신령의 영향 때문인가?
그런 잡생각과 함께 문을 열고서 들어간다.
끼이익.
매끄럽지 못한 소리를 내는 문.
집 안은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아서 어두컴컴하다.
“계십니까?”
“이쪽이네.”
컴컴한 집 안에서 추장으로 추정되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불도 켜시지 않고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눈이 좋은 청년이로군, 그거 참 부럽구만.”
“눈 색깔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어서 마냥 좋진 않아요.”
“붉은 피가 흐르는 모든 생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끌끌.”
거실에는 추장의 상징물, 깃털 모자를 쓰고 있는 노인이 흔들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
그의 눈가에는 붉은 두건이 감싸져 있다.
이래서 집안의 불을 켜두지 않고 어두컴컴하게 있던 거구만.
나는 그의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당신이 찾던 손님이 제가 맞습니까?”
“흠… 그렇다네, 손우진 군. 나는 푸에블로족의 추장 올드 바이슨이라고 하네.”
늙은 들소(Old bison)라.
마을에서 키우는 들소가 이 푸에블로족의 상징물인가 보다.
“추장님을 보니 이제야 아메리카 원주민을 만났다는 느낌이 드네요. 줄리아는 영 세련되어서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래된 옛것에 애착이 가는 셈이지.”
색이 바랜 자신의 깃털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추장.
그 손길이 무척이나 정성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이 노인장, 아까부터 계속해서 눈이 보이지 않던 상태다.
허나 눈에 두건을 쓰고 있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 화안금정의 색깔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르신.”
“시력은 상실한 지 오래네.”
묻기도 전에 내게 선빵을 날리는 추장.
그에게선 어떠한 신성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말로 추장은 히어로와 같은 능력자가 아닌 건가?
능력자가 아니라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말이다.
“혹시 점쟁이십니까?”
“끌끌. 자네가 내 눈가를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는가?”
“본인 입으로 맹인이라고 하신 분이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은 멀었어도 귀는 닫히지 않고 열려 있으니 알 수 있지.”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 집에 존재하나 보군.
신성을 안구 쪽에 집중시켜 화안금정을 불러낸다.
남들이 본다면 내 눈동자는 점점 붉게 물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진실의 눈, 화안금정으로 집안을 살펴보니 이제야 비밀이 풀렸다.
“이 집엔 추장님만 있던 것이 아니었네요.”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귀는 열려 있다고 말이야.”
집안을 빼곡하게 채운 정체불명의 존재들.
자연지기와 비슷한 것들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상황이다.
그들에게 손을 내미니 내 손안에 착지한다.
경계심이 낮아진 건지 추장에게 붙어 있던 것들이 내게도 달라붙기 시작한다.
“이게 당신들이 신령이라고 부르는 존재입니까?”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의 모든 것들엔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왔다네.”
추장의 말을 경청하면서 손에 올라온 신령을 자세히 관찰한다.
“대지와 바람, 폭포와 하늘, 태양과 달 모든 것에는 인간과 같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존중하고 함께 살아왔지.”
뒤덮은 기운을 해쳐서 자세히 살펴본 그들의 모습은 요정과 닮아 있었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운지 화들짝 놀라서 손안에서 벗어나는 녀석.
추장의 귓가로 쪼르륵 달려간다.
“허허, 무례한 짓은 사양이라고 전해 달라고 하시는군.”
“거 멋대로 봐서 미안하게 됐수다.”
“아무튼 신령님들과 함께 있으면 자연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어.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그분들께서 얼굴을 비추어 주신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생김새는 자기들보다 연식 있어 보이는 추장에게 달려가 일름보 짓을 하다니.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얼추 알 것 같네요.”
“미안하지만 그 말은 듣지 않겠네. 이 눈먼 늙은이의 말벗이 되어주는 유일한 존재라서 말이야.”
“당사자들이 좋다는데 알려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고맙군.”
올드 바이슨 추장의 말을 듣고 이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신령이라 불리는 이들의 정체.
줄리아가 신령은 성좌가 아니라고 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들은 푸에블로족의 선조 때부터 쌓여온 믿음을 매개체로 만들어진 인공 성좌일 것이다.
대자연의 기운이 인간의 믿음과 만나서 탄생한 존재들.
그들의 어린 외견과 행동들은 정말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이들을 성좌라고 부르기엔 그들의 연식과 업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저를 부른 것도 결국엔 성령들의 부탁인가요?”
“아아… 그렇다네. 신령들께서 가장 밝게 빛나는 빛이 이 땅에 도착했다며 꼭 만나 보고 싶어 하셔서 말이지.”
“가장 밝은 빛이라…”
내가 보유하고 있는 신성에 이끌렸다니, 만들어진 존재라도 성좌는 성좌라는 건가.
“어쩐지 동족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네요.”
“자네는 자신의 힘이 껄끄러운가?”
“아뇨,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이 늙은이의 할아버지, 선대 추장께서 해주신 말씀을 들어 보게나.”
“예?”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존재한다네.”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서 말을 이어나가는 추장 어르신.
“성질이 더러운 놈에게는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거짓, 자만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네.”
“나머지 녀석은요?”
“기쁨, 평안, 사랑, 소망, 겸손, 친절, 진실, 그리고 믿음.”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풀어 헤치는 추장.
이내 붉은 두건이 스르륵 풀어지고 드러나는 그의 맨얼굴.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늑대들은 항상 굶주려 있기에 서로 싸우고 있지. 어떤 늑대가 이길지 궁금한가?”
“누가 이긴답니까?”
“자네가 먹이를 주는 놈!”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 추장은 다시 두건으로 눈을 감싼다.
스윽스윽.
“성질이 더러운 녀석도, 온전한 녀석도 결국엔 자네의 손에 들려 있는 먹이를 기다리는 늑대일 뿐이야. 항상 기억하게, 인생의 주도권은 자네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흔들의자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추장.
“눈이 멀었어도 마음의 눈은 뜨고 있었어야 했는데… 이 늙은이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로 아쉬워.”
“…”
“자네의 모든 건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네. 명심하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