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부조리
* * *
“음… 환경 조건은 나쁘지 않은데.”
하늘 위로 올라와서 살펴보니 북쪽으론 거대한 폭포가 자리 잡고 있고
남쪽은 탁 트인 것이 지리적 여건도 상당히 괜찮다.
[뭘 보고 판단하는 거야?]
솜사탕 실프가 내 곁으로 와서 질문을 건넨다.
한시라도 입을 쉬지 않으면 가시가 돋는 건지 말하지 않는 모습을 만나 이후로 본 적이 없다.
“양키 요정이 오행의 이치를 알 리가 있나.”
[양키는 또 뭐야?]
“그런 게 있어.”
[아앙, 궁금하니깐 알려 줘!]
솜사탕이 옆에서 투덜거리는 걸 들으면서 마을에 설치할 진법을 고민해본다.
마을을 지키는 신령이 한둘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정령들의 부재는
이 대협곡 속 각박한 환경에선 큰 전력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그에 범접하는 존재들을 남기고 가야 한다.
마을의 지리와 환경을 보고 떠오른 한 가지 방법.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신상四??다.
네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영물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계약을 맺은 후에 형상을 담아낸 석상을 마을의 방위에 설치하는 것이다.
사신수는 각자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기에 이 자기 멋대로에 주관이 강한 정령들보다 마을을 지키는 데 있어서 유리할뿐더러 전투력도 뒤처지지 않는다.
이 쥐방울만 한 친구들의 기운을 담보 삼아서 사신수들과 계약을 시도해봐야겠다.
답사를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오니 줄리아가 우리를 반긴다.
“보고 오셨나요?”
“응, 다행히도 마을 구조가 좋네. 이 계약이 성공하면 크립티드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이 정도로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챔피언은 친절하시네요.”
“미국인들 사이에서 내 인식이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본래 직업은 히어로거든.”
“참, 그레이트 원 소식은 들으셨나요? 지금 라디오에서 그들의 소식을 다루고 있어요.”
“개입한 장본인이 모를 수가 있나, 내 귀는 항상 열려 있거든.”
껴안고 있는 라디오를 가리키는 줄리아.
‘팀 그레이트 원의 공식적인 해체를 선언합니다. 본인 잭 에반스 외 5인은…’
그곳에선 그레이트 원의 해체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기자 회견을 진행 중인 잭 에반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부에 덩그러니 떨어진 팀 그레이트 원은 전원이 시련을 통과하긴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각자 느끼고 깨달은 것은 서로 달랐고 더는 같은 팀으로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팀의 해체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더 많은 보수와 우대로 그들의 결별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제 팀 그레이트 원 그들에게 돈은 협상의 무기가 될 수 없었다.
나에게도 그레이트 원을 말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좌와 계약을 맺은 것이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간 내정 간섭이 될 수 있다고 둘러대며 유유히 빠져나온 상황이다.
“어련히 잘하겠지. 솔직히 다섯 명 전부 통과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런 게 있어. 됐고 방범 장치 설치하러 간다.”
속사정을 궁금해하는 줄리아를 뒤로 하고 마을의 네 방위에 석상을 만들러 가기로 했다.
. . . .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닮은 것 같아?”
[하나도 안 닮았어]
[전혀]
[죄송하지만… 비슷하진 않네요]
[음, 자네는 조각에 소질이 없는 것 같군]
“다들 냉정하구만.”
정령들의 평가가 아주 처참하다.
석상들을 세울 위치를 선정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게는 사신수의 형상을 돌덩이에 담아낼 미적 감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은 자신 있는데 말이지…
땅에 그려낸 청룡의 모습과 조각한 용의 석상을 비교해봤지만
사실 내가 생각해도 양심이 없는 수준으로 조각해 놓았다.
계약하려고 온 그들이 화를 내고 돌아가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처참한 형상을 지닌 사신상.
석상 조각은 첫 도전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 그림대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별일 아니라는 듯 툭 질문을 던지는 실프.
이런 건방진 솜사탕이.
“가능하겠어? 이게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거든.”
[흥, 노움 이 흉물은 치우고 새롭게 만들어 줘]
[음, 알겠다]
내가 만든 청룡상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곧이어 새로운 돌이 솟아오른다.
“야! 그래도 내가 만든 거는 남겨 둬야지! 너도 실패하면 다시 해야 한단 말이야!”
[아쉽게도 그럴 일 없네요]
살랑살랑 공중에서 움직이던 솜사탕은 땅바닥에 그려진 청룡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곧 작업에 들어간다.
슈우욱! 슈우욱!
솜사탕한테서 뿜어져 나온 살벌한 바람이 돌덩이를 갈기갈기 조각낸다.
조그만 정령은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조각을 시작한다.
깎여나가는 돌덩이의 모습이 내가 만든 투박한 석상보다 모양새가 잡힌 모습이다.
살아있는 용의 형상을 점점 닮아가는 조각상.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나름 쓸만한 구석이 있다.
“잘하는데?”
[흥, 이 정도는 우습지 운디네!]
[네에]
자신의 친구 물의 정령 운디네를 부르는 실프.
물방울 모습을 한 운디네는 용 조각상을 향해서 고압의 물줄기를 발사한다.
쎄에에엑!
물줄기를 맞은 조각상의 표면은 한눈에 봐도 맨질맨질하게 변한 것이 보인다.
[샐러맨더 물기 좀 말려줘]
[대장도 아니면서 명령하지 마]
[빨리!]
틱틱거리면서도 순순히 따라주는 불덩이.
샐러맨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는 청룡 석상의 물기를 깔끔하게 말린다.
정령들이 합동해서 만든 사신상.
분하지만 내가 만든 것보다도 더 정교하고 멋있게 만들어냈다.
[자 완성! 어때?]
“그래 인정할게, 잘 만들긴 했네.”
[흐흥, 더 칭찬하라고]
누가 봐도 기분이 업 된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겠다.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솜사탕.
역시 아이들은 칭찬에 약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었는데 계약을 안 해줄 수가 없겠지.”
이제는 석상의 주인을 부를 시간이다.
동쪽을 수호하며 오행의 기운 중 생명의 상징 나무?를 관장하는 성스러운 용.
청룡을 부르기로 한다.
사신상에 손을 대고 생명의 힘, 적응력을 불어 넣는다.
꾸역꾸역 적응력을 흡수하고 있는 사신상.
그 주위로는 풀과 나무, 꽃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녀석들이 사신상이 머금은 적응력에 감응하는 것이다.
“오행의 주인 손우진이 명하노니 생명의 용은 응답하라.”
쿠르릉!
맑았던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검은 구름은 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솨아악.
[우와앗! 갑자기 웬 빗줄기야]
[에이씨… 재수 없게 진짜]
[여러분, 이건 그냥 비가 아니에요! 생명의 빗방울이에요!]
[음, 땅이 촉촉해지는 건 싫은데 말이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
용이 등장할 전조 현상이다.
쏟아지는 소나기와 요란하게 울리는 천둥과 내리치는 번개.
거센 바람은 용이 지상에 내려온다는 것을 친절하게도 알려준다.
걱정과는 달리 빠르게 응답해 준 모양이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용의 모습.
동쪽의 수호자, 청룡이 지상에 강림했다.
<누가 이="" 몸을="" 불렀는가?=""/>
“나다 이 새끼야.”
한껏 무게를 잡는 놈.
자신을 이리도 쉽게 부를 만한 존재는 지상에 몇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러고 싶을까.
<하! 어느="" 건방진="" 녀석이="" 감히="" 사신수인="" 이몸에게="" …=""/>
그 건방진 녀석의 기운을 감지하고선 말이 급하게 끊어지는 청룡.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모양이다.
“진짜 비싸게 군다. 내가 이렇게 멋진 사신상도 만들고 기운까지 불어넣어 줬는데 말이야.”
[우리가 만들었거든?]
“삼자는 잠시 빠져 있어.”
[진짜 이렇게 못 된 인간은 처음이야!!!]
계약이 오고 가야 할 진지한 장소에 끼어든 솜사탕 녀석을 옆으로 치워둔다.
<실례지만 귀인께선="" 손="" 행자와는="" 무슨="" 관계이신지…=""/>
“어휴 손 행자님이요? 혹시 저희 스승님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
모든 용들은 용궁의 지배자 용왕의 자식들이다.
일찌감치 사신수로 활동해왔던 청룡 또한 핏줄은 용왕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
자신의 가족들과 아버지에게 우리 스승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 증거는 내 앞에 굳어 있는 이 거대한 파란 용의 태도가 증명하고 있다.
대뜸 용궁으로 쳐들어가 훔쳐온 최고의 보물 여의봉도 모자라서
스승이 내게 물려준 자금관, 황금쇄자갑, 보운리만 해도 용궁산이 아니겠는가?
그 악명 높은 제천대성 손오공의 제자.
저놈도 내 정체를 알게 된 이후 한 번 견적을 내봤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뻐겨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을걸…
섣부르게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 녀석의 패착이다.
한 번 내려온 이상 나는 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청룡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도 말이다.
“뭘 그렇게 쫄고 계시나, 난 막돼먹은 우리 스승님과는 달리 개념인이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거래 하나 합시다.”
탁!
청룡 사신상의 매끄러운 등허리를 탁하고 친다.
“이곳에 네 개의 사신상을 설치할 텐데 모든 사신수들이 이 마을을 수호해주길 원한다.”
<이 먼="" 타지의="" 국가까지="" 관리하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횡포="" 아니오!=""/>
“내 성의를 거절하시겠다?”
<그 조건으로는="" 당신과="" 계약할="" 수="" 없소,="" 이건="" 본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신수들도…=""/>
“내 호의가 이런 식으로 거절당하다니 참 아쉽구만, 여의야.”
주인의 부름에 하늘에서 슉 하고 떨어진 여의.
<잠깐! 그="" 흉악한="" 보물은="" 대체="" 왜="" 부른="" 건가!=""/>
용궁 출신 여의를 보고선 기겁을 하는 청룡.
자신의 아버지 용왕에게서 여의의 활약상을 들었나 보다.
이 여의금고봉을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태도다.
혼자서 네 마리의 영물과 육체적 계약을 맺으려면 진심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스승이 물려 준 용궁의 방어구 시리즈까지 불러와서 착용해준다.
“스승께 배운 것이 있는데 이거 하나면 모든 이들이 친절하게 부탁을 들어줬다고 하더라고.”
툭.
툭.
<백호! 현무!="" 주작!="" 보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지상으로="" 내려오라!!!=""/>
“혼자 감당할 수 없으면 빨리빨리 부르는 게 본인한테도 좋을 거라고 이미 말했어.”
손에 든 여의를 맞은편 손에 툭툭 치면서 청룡에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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