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부조리
* * *
스승이 때려잡은 요괴들부터.
제자인 내가 때려잡은 크립티드까지.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놈들이 증명한 바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는 놈들에게는 이게 처방 약이었다.
“난 성좌라고 해서 봐주고 그런 거 없는 줄 아쇼.”
<이런 건방진!!!=""/>
당돌한 내 발언에 청룡이 화를 낸다.
요동치는 대기가 푸른 용이 분노했음을 알려 준다.
그렇지만 청룡은 쉽사리 행동하지 않는다.
“쳇.”
크르릉…
내 의도를 파악한 건지 모르겠지만 청룡은 여기서 내 뜻대로 놀아났다간 손해를 본다는 걸 눈치채버린 건지
싸구려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나서 무력 행사라도 해줬으면 쉽게 풀리는 건데.
청룡이 도발에 넘어가 공격해왔다면 이를 막아낸 뒤 성좌가 인간들의 마을을 파괴하려 했다며 꼬투리를 잡아서 강제로 계약을 맺으려 했건만.
역시 사신수 자리는 딱지 치기로 얻어낸 것이 아닌가 보다.
“각박한 세상에서 좋은 일 좀 하면 어디 덧나냐! 이 마을만 지켜 달라는 거잖아!”
<억지 부리지="" 마라!="" 모든="" 성좌가="" 네놈의="" 스승처럼="" 한가한="" 줄="" 아는가!=""/>
“…거기서 치사하게 스승을 들먹이긴.”
새끼가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를 보려 하다니.
여기서 천계의 한량, 스승님은 왜 들먹이는 건가.
청룡을 협박하기 위해서 막상 여의를 부르긴 했지만 쉽게 휘두를 수도 없다.
이곳에서 청룡과 마음껏 싸웠다간 지키려고 했던 이 푸에블로족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 말이다.
그때 가서 사신수와 계약을 체결해 봤자 의미도 없다.
대치 상황에서 좀처럼 진전이 없는 상황.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이 꽉 막힌 용가리 녀석을 보고 있으니 라돈이 얼마나 합리적인 녀석인지 실감이 간다.
수면 보장만을 위해서 일하는 용이라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지?=""/>
청룡도 이 상황이 답답한 건 매한가지 인지 내게 질문을 건넨다.
“내가 제안한 계약을 들어줄 때까지.”
<하! 아버님의="" 말씀이="" 사실이었어,="" 이="" 원숭이="" 족속들은="" 후안무치해서=""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스승과 함께 싸잡혀서 욕을 먹는 건 억울한데 말이야.
나는 성실하게 일도 하고 돈도 버는 사회인인데 어떻게 스승과 비교를 하는가?
<그래서 네="" 아비가="" 원숭이="" 대장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말해주지="" 않더냐?=""/>
그때 하늘에서 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시나 오늘도 제자가 고생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자신이 욕을 먹으니 참지 못하셨나 보군.
<당신은!/>
화들짝 놀란 청룡이 화들짝 놀라서 하늘을 향해 도망치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어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려고! 그럴 순 없지!”
<크아아악! 어서="" 이거="" 놔라!!!=""/>
“못 놔!”
응집력으로 청룡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자 벗어나려고 하는 청룡과 힘 싸움이 시작된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이 장난 아니다.
그만큼 저쪽도 진심이라는 소리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여의가 부들부들 떨리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직접 내려오시게요!”
<잔말 말고="" 여의봉에="" 신성이나="" 넣거라=""/>
“알겠습니다!”
이 계약은 무조건 체결될 수밖에 없다.
청룡의 가장 큰 패착은 스승을 들먹인 점에 있지 않을까.
꿈틀대던 여의는 점점 형상이 변해간다.
익숙한 스승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여의.
신성을 꾸역꾸역 흡수할 때마다 점점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흥… 말해 보거라. 이 미꾸라지야,그래서 원숭이 놈이 어쨌다고?”
용궁의 악몽이 직접 지상에 강림하였다.
. . . . .
<저어… 손="" 행자시여,=""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허가한다. 제자와의 계약을 어기면 알고 있겠지?”
<알겠습니다…/>
스승을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진 청룡이 지긋지긋한 지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한다.
결론만 말하자면 계약은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
사신수들의 수장인 청룡이 굴복하니 나머지 사신수들도 줄줄이 계약에 꿰여버렸다.
청룡 자신도 스승이 직접 지상에 강림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건 스승님의 성격을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
우리 스승이 얼마나 옹졸하고 개차반인데 말이야…
퍼억!
“아아악!!!”
“불손한 생각이 여기까지 들린다.”
“제자 대가리 박살 내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오냐.”
여의를 매개체로 삼아서 지상으로 내려온 메탈 손오공, 스승님은 자신의 신체도 생각지도 않고 내 머리를 내리쳤다.
“아흐흐 진짜… 그건 그렇고 스승님 때문에 사신수들이 마을에 해코지를 하면 어쩌죠?”
“내 이름을 걸고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갑자기 한숨을 푹 쉬는 스승님.
“후우… 멋대로 내려온 것 때문에 상제가 꽤 화내겠어. 이런 계약 하나도 혼자 해결 못 해서 쯧.”
“참 나, 구경하고 계시다가 본인 욕이 들려오니 멋대로 내려오신 거잖아요.”
“시끄러워! 애초에 양놈들의 나라는 왜 찾아와서 고생이냔 말이다!”
콰앙!
스승이 그 무지막지한 주먹으로 내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는다.
“아아악!!! 빨리 돌아가서 혼이나 나세요!”
이대로 있다간 몇 대 더 맞을 게 뻔하기에 여의에 공급하고 있던 신성을 끊어버린다.
“이 자식이! 스승한테 인사도 안 하고…”
“뒷수습 좀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스승의 형체가 흐물흐물 변하더니 원래의 여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상계는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제천대성이라는 자가 직접 현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지상에 내려온 것은 사실이니깐.
성좌간의 협정 위반이다 뭐다 하며 상계가 뒤집혔을 테지만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 안 할 인물이 우리 스승이다.
나야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다.
사신수와 맺은 계약 덕분에 푸에블로족의 마을은 크립티드가 절대로 건들 수 없는 하나의 성역이 되어버렸다.
[무서운 친구들 다 갔어?]
고래들 싸움에 등 터지기 싫었던 정령들도 다시 슬금슬금 돌아온 모양이다.
실프가 슬그머니 다가와 안부를 묻는다.
“그래, 다 갔어.”
[어휴! 이 조용한 마을에 왠 소란이람]
“그러게나 말이다.”
[모두 너가 저지른 일인데 남 일처럼 말하긴!]
왱알왱알 조잘대는 솜사탕을 다시 옆으로 치운 채 마을로 돌아왔다.
“챔피언!”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줄리아가 추장과 함께 마중을 나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를 위해 직접 휠체어를 끌고 있는 줄리아.
“마을 안전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설치해 둔 석상 안으로는 크립티드가 들어오지 못해.”
“그거 참 다행이네요.”
“고맙소, 자네가 세운 석상은 마을 주민들이 관리하고 숭배하겠네.”
“뭐… 그렇게만 해준다면 별일은 없겠죠.”
마을을 강제로 수호하게 된 사신수들을 인간들이 믿고 따른다면 성좌 노릇은 해주겠지.
“대협곡에서 볼일도 다 봤고 마을 보안 건도 해결했으니… 이만 갑니다.”
휘익!
휘파람을 불어서 구름을 부른다.
이 머나먼 미국 땅에서 휘말린 사건에 얻어가는 것은 군식구뿐이다.
“벌써 떠나는 건가? 더 있다 가도 괜찮다네.”
“이별은 짧을수록 좋은 셈이죠.”
“허허! 그것 참 낭만 있는 말이로군.”
[바이슨! 우리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해!]
[다른 친구들이 네 눈이 되어줄 테니 걱정하지 마]
[흑흑…]
[음, 운디네 너무 울지 마라]
정령들 또한 자신들의 소통의 창구였던 올드 바이슨 추장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감사합니다 신령들이시여, 앞으로는 이 젊은 친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시길…”
바이슨 추장은 자신의 친우에게 축복의 작별 인사를 건넨다.
나는 정령들이 질질 짜건 말건 구름에 올라타서 출발할 준비를 마친다.
“손우진 씨!”
그때 나를 부르는 줄리아.
“왜?”
“세상은 변할까요?”
그 대협곡 속에서 겁도 없이 나를 찾아다녔던 아이의 두 눈은 밝게 빛나고 있다.
“변하겠지.”
“어떤 식으로요?”
“그건 인간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야. 너도, 그리고 나도 모두가 그렇지. 그럼 잘 지내.”
대협곡에서 깨닫고 간 사실을 줄리아에게 알려 준 뒤 구름을 출발시킨다.
이제 정말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 . . . .
“아쉽다!”
“벌써 집에 갈 시간이야?”
“이 녀석들이… 실컷 놀았으면서 더 놀고 싶어?”
“응!”
“여기 엄청 재밌는 거 많아!”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아쉬운 소리를 하는 금각과 은각.
볼일을 다 마치고 돌아온 숙소에서 일행들과 다시 만나니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만 피어있다.
근심 없이 미국 여행을 실컷 즐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너희들은 나 없이 재밌게 놀았냐?”
“나는 말이오, 어느 정신 나간 나라가 한번 더 형님의 심기를 거슬러 줬으면 하오.”
“미친 놈.”
“있잖아요, 대혁 오빠 식비가 얼마나 나왔는 지 알아요?”
“엄청났어요! 우진 님!”
“야 오대혁!”
일행들과 몇 마디 안부를 나눈 뒤에 옥상으로 올라가 분신들을 소집했다.
“넌 나 대신에 재밌게 놀았냐?”
“큭큭, 남의 돈으로 노는 것만큼 재밌는 게 없지.”
일행들과 지냈던 분신이 얄밉게 대답한다.
“너희들은?”
“이상 무. 서부 사태는 끝난 것 같아.”
그레이트 원 감시 겸 서부 상황을 지켜보려고 보내놨던 분신들 또한 답변을 마친다.
“돌아와 이 자식들아.”
나를 대신해서 일행과 행동하던 분신 놈들을 모조리 역소환 해버린다.
펑! 펑! 펑!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분신들.
이놈들이 겪은 일들과 감정, 기억들이 모조리 내게 흘러들어 온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책임 있는 쾌락?
본체인 나는 말이야,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 분신 놈은 아주 그냥 동생들과 신나게 놀다 왔구만.
각자에게 주어진 시련을 통과한 그레이트 원을 지켜보는 기억도 보인다.
잭 에반스 놈은 아주 그냥 영화 한 편을 찍다 왔네.
끼이익.
그렇게 영화를 감상하듯 분신들의 기억을 살피고 있을 때 옥상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뭐하고 계세요?”
“뭐야, 예은이냐.”
분신들의 기억에 취해있는 내게 예은이가 다가와 안부를 물어본다.
“금방 내려갈 건데 왜 올라왔어?”
“그냥요.”
“싱겁긴. 뭐 하고 있냐면 분신들의 기억 좀 살펴보는 중이야.”
“아저씨도 같이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하하! 같이 과업 하기 싫다고 했던 하예은 양은 어디로 갔나 몰라.”
“아 진짜! 여기서 옛날얘기는 왜 꺼내는 건데요!”
창피하다는 감정을 숨기려고 하는 듯 내 등을 툭툭 치는 예은이.
그렇지만 그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진짜 잠깐만.”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
“진짜 아파서 그래.”
“아저씨!”
“큭큭큭.”
그렇게 잠깐 투닥거린 뒤에 찾아온 고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입이 자연스레 다물어졌다.
이 적막감이 싫어서 내가 먼저 선뜻 입을 열어본다.
“예은아 있잖아,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뭔데요?”
옥상에선 바람이 불어 예은이의 긴 머리가 휘날린다.
“우리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지?”
“음… 아저씨랑 저랑은, 8살 차이죠?”
“근데 왜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야?”
내 입으로 말하면 쪼잔해 지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둘이서 얘기하는 일은 오랜만이기에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왜 나는 하예은에게서 아저씨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가?
“아저씨는 아저씨죠.”
“아니 나도 아직 20대 후반이고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
“… 설마 아저씨 지금 오빠 소리 듣고 싶으셔서 그러는 거예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건 아니고 정상적인 호칭, 예를 들어 대혁이처럼 선배라던가.”
“우진 오빠.”
하예은의 기습 공격에 잠시 몸이 흠칫한다.
“와! 지금 입꼬리 올라간 거 다 봤어요?”
“진짜 안 웃었는데?”
“지금도 올라가 있는 데도요?”
“내가 좀 웃는 상이긴 하지.”
“후후, 진작 좀 부탁 하시지 그랬어요.”
“안 웃었다니깐!”
길었던 출장이 그렇게 끝을 향해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