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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과산 스트리머-75화 (75/106)

〈 75화 〉 즐거운 나의 집

* * *

“그랜드 캐니언 소탕 건은 감사합니다 챔피언.”

본인들을 위해서 소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입에 발린 말을 한다.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푸에블로족 마을은 그냥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상 기후와 강력한 디바인 파워가 감지되었다는 보고를 듣긴 했지만 혹시…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뉴욕 JFK공항에서 벌인 깽판을 경험한 뒤로 터너 국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나에게 있어 휴가 아닌 휴가 일정이 끝이 나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미국 내 최고의 히어로 팀이었던 그레이트 원의 해체 사건과 그랜드 캐니언에서 벌인 일 때문에 마지 못해서 터너 국장과 다시 마주 앉은 상황이다.

미국은 최고의 사냥개 무리를 놓친 지금 초조할 것이다.

지금이야 서부의 상황을 정리하느라 서로 힘을 합쳐서 활동하고는 있긴 하지만 망자들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뿔뿔이 흩어지겠지.

각자가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누구처럼 손님을 억압하진 않아서 말이지. 친우들을 위해서 토템을 세웠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겁니다.”

“크립티드를 막아낼 수 있는 토템입니까?”

“대협곡 내의 크립티드 중에서 토템을 뚫고 침입할 수 있는 개체는 없을 거요.”

동쪽으로 접근했다간 푸른 용이 분노해 침입자들을 벼락으로 모조리 태워 죽일 것이다.

서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하얀 호랑이가 갈가리 찢어발길 것이고.

남쪽의 붉은 새의 날갯짓이 일으킨 열풍에 검은 재만 남을 수도 있다.

북쪽으론 검은 거북이가 불러온 홍수에 익사 당할 수도 있고.

“…”

터너 국장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변방의 깡촌에 저런 귀한 것을 설치해두고 왔으니 탐이 날 만도 하겠지.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고 싶진 않기에 다시 한번 경고하기로 했다.

“먹음직스러워 보입니까?”

“예?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있지. 이 시대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흔치 않은 기회인데요.”

이렇게 경고를 해도 결국엔 들어 처먹질 않겠지.

나를 상대로도 간을 본 나라니 말 다 했다.

자국의 변방의 소수 인종 마을에겐 얼마나 더 가혹하게 대할 수 있을까?

발뺌하는 터너 국장의 넥타이를 움켜잡은 뒤 확 잡아당겨서 그의 얼굴을 내 앞까지 끌고 온다.

“잘 들어. 이건 경고가 아니라 통보야.”

“잠시만, 이거 놓고 얘기합시다!”

“터너 당신이 그렇지 않더라도 당신의 상부는 또 멋대로 일을 벌일 수 있겠지. 하지만 명심해, 내가 설치해 둔 토템엔 도덕적 양심이나 자비, 양심의 가책을 바라면 안 된다는 걸 말이야.”

내가 사신수에게 부탁한 것은 마을을 수호해 달라고 한 것이지 박멸의 대상은 굳이 크립티드로 한정 짓지 않았다.

사신상에 손을 대거나 마을에 침입한 적대 생명체는 가차 없이 박멸될 거란 소리다.

“알겠으니 제발!”

“혹여나 재주 좋게 침입해서 그들 중 한 명이라도 해를 입는 순간 난 챔피언이 아닌 친우를 잃어버린 미친 새끼로 이 나라를 다시 방문할지도 몰라.”

파앗!

꽉 붙잡고 있던 그의 넥타이를 풀어준다.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 꽤 충격이었는지 조그만 윽박질에도 벌벌 떠는 터너 국장.

그에겐 미안하지만 오로지 그에게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높은 양반들에게 대놓고 들어 처먹으라는 식으로 보내는 안내 방송이다.

“더 할 얘기가 남아있습니까? 터너 국장.”

“…잭 에반스가 미스터 손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 참 용감하기도 해라, 좋습니다.”

허겁지겁 방을 나서는 터너 국장.

나쁘지 않았던 나와 터너 국장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다.

터너 국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잭 에반스가 들어온다.

“잘 지냈어? 오늘은 애는 어쩌고 혼자 왔대.”

“당신은 여전히 재수 없군.”

“그 말은 사람들한테 항상 들어서 감흥이 없어. 서부는 어때?”

내게 농담도 하는 잭 에반스.

조급해 보이던 첫 만남 때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눈에 보이는 놈들은 전부 처리했는데 깊게 숨어든 놈들만 없애면 끝이야.”

“나머지 친구들은?”

“여전히 서부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지.”

“당신도?”

“클로에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해서 말이야.”

딸바보 납셨군…

그가 보호자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느끼는 것이 죄책감인지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떤가.

지켜야 할 소중한 이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열심히 사는구만.”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

“갈 시간이지. 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었어.”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챔피언.”

일어서려는 그때 질문을 건네는 잭 에반스.

그의 눈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또렷하게 빛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증거다.

“뭔데 그래?”

“당신은 인간으로 남을 건가?”

“토르 그 양반 참…”

수염쟁이 천둥신이 입은 더럽게 가벼워서 원.

자신의 챔피언에게도 쫄래쫄래 나에 대해서 털어놓았나 보다.

“그러도록 노력해야지.”

“왜지? 드높은 별이 되는 영광을 마다하는 건가?”

“반대로 물어보자. 평범한 인간이었던 당신이 천둥신에게 선택받고 나서 그레이트 원으로 활동했을 때 그 자리가 영광스러웠나?”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지.”

“다 상대적인 거야. 인간이든 성좌든, 결국.”

간다­

생각에 잠긴 잭 에반스의 어깨를 툭툭 친 뒤 방을 빠져나왔다.

“다 상대적인 거지.”

. . . . .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은 고요하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챔피언?”

“아뇨, 괜찮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편히 불러주세요.”

열심히 논 것인지 신나게 떠들어야 할 쌍둥이 자매도 조용히 잠을 자는 중이고

다른 일행들도 말없이 여행의 여운을 조용히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해결해야 할 일이 좀 많다.

협회에 찾아가서 아저씨한테 깨져야 할 테고 더 나가면 정부까지 방문해서

외교적 결례니 뭐니 귀찮고 복잡한 일들에 대해서 해명해야 할지도 모르지.

인터넷에서 떠도는 내 경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고

아직까진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칠대성 놈들도 남아있다.

“계속해서 업무의 연장이야…”

편하게 방송이나 하던 과거가 그립다 그리워.

그 평화롭던 일상을 박살 낸 놈들은 역시 용서할 수가 없다.

대협곡에서 명상 중에 살짝 들춰 본 미래에서 위압감을 풍기던 놈이 역시 놈들의 수장이겠지.

스승도 전성기 시절에 애를 먹었던 적수를 내가 다시 상대해야 한다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육체적으론 피로를 느끼지 않게 됐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복잡한 일은 뒤로 밀어둔 채 조용한 비행기 안에서 짧은 고요를 즐기기로 했다.

­We will be landing shortly. Please fasten your seatbelt…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기장의 안내 방송이 귓가를 때린다.

기지개를 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일행들도 모두 내릴 채비를 하고 있다.

“얘들아, 집에 갈 땐 구름 타고 가자.”

내 한마디에 모두 나를 쳐다본다.

“공항에서 나가면 악질 친구들이 많이 있을 거 같아서 그래. 다들 피곤하기도 할 테니깐 굳이 상대하고 싶진 않아.”

“그래요.”

“우진 님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오빠가 그렇다면 뭐.”

“형님도 성질이 많이 죽었군.”

잠시 후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고 우리는 차례대로 하차했다.

금각과 은각은 그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기에 둘을 안고 내리느라 고생 좀 했다.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근두운 술법을 걸어준 뒤 우리가 타고 갈 구름을 불러온다.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 .

정겨운 나의 집 화과산.

오랜만에 돌아온 화과산은 평소와 같이 나를 반겨준다.

엘레나는 마중을 나온 일레인과 함께 깐프 마을로 돌아갔고

대혁이는 그동안 쌍둥이를 돌봐주느라 고생해서 피곤할 것 같아서 며칠 동안 쉬고 가도 좋다고 했더니 냉큼 손님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손에 움켜쥔 간식들과 함께.

예은이와 유정이도 본인의 방으로 쉬러 갔으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다.

씻고 나온 다음 분신 놈이 있는 방송 부스로 발을 옮긴다.

똑똑.

­들어와.

방송은 안 하고 있나 본데.

분신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 방문을 여니 분신은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저것들은 또 뭐냐?”

그 옆엔 나와 똑 닮은 녀석들 여럿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똑같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보면 알잖아, 분신.”

“네가 소환했냐?”

“응. 명령을 하나하나 해 줘야 움직이는 단순한 수준이지만 성공했지.”

분신이 분신을 소환하다니, 이것이야말로 하청의 혁신이 아닌가.

“오오, 기특한데?”

“아 진짜! 아무리 네가 본체여도 형처럼 굴지는 말지? 선 넘는 거야 이거.”

나 손우진.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은 더 하고 싶어지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자식이 말이야, 기특해서 머리 좀 쓰다듬어 줬더니 튕기고 지랄이다.

필사적으로 내 손을 치우려고 하는 놈의 저항을 무시한 채 더 열심히 쓰다듬어 준다.

“아 좀!”

“꼬우면 네가 본체 하던가.”

“폭군 새끼…”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놈이기에 저항하던 녀석도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어디에 쓰려고 소환했는데?”

“여론 조작.”

“뭐?”

“키보드 부대라고. 너가 말했잖아, 손우진에 대한 적당한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면서. 이거만큼 확실한 일이 없지.”

기껏해야 분신 녀석이 방송을 통해서 일을 진행할 줄 알았건만

자신이 고생하기 싫어서 분신술까지 스스로 터득해 이런 일을 벌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내 분신이 맞는 거 같다 야.”

“칭찬 고맙네.”

“어휴 미친 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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