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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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예상보다 길어진 방송을 끝마치고 방문을 나선다.
끝에 가선 흡사 기자회견이나 청문회 자리가 된 것처럼 시청자들이 질문을 던져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미지의 영역이었던 성좌에 대해서 언급하는 순간 관심이 폭발할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이 정도일 줄이야.
아저씨의 말을 무시하고 모두 털어놓긴 했지만
회장 아재도 내 방송을 계속해서 보고 계셨다면 내일 만남에서 뭐라고 하시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이미 한가락 하는 놈들은 내가 언급한 내용이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 일인지 눈치챘을 게 뻔하니깐.
성좌에게 힘을 빌려서 이능력을 사용하는 강림 히어로 육체 단련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무투의 길을 걷는 녀석들은 초창기엔 신성이고 나발이고 몸으로 때워야 하는 상황이 태반이다.
강림 계열 히어로가 성좌급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선 소홀했던 육체 단련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무투 계열은 막대한 신성을 쌓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공적이나 수련이 필요한 셈이다.
“기는 법도 모르는 이들이 걸음마부터 배우고 싶어 하다니, 꿈도 야무지셔라.”
결론은 어지간한 히어로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다.
후원으로 질문한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주는 내 모습을 보고 이때다 싶어서 세계 각국에서 몰래 시청하던 놈들은 내게 아낌없이 지갑을 열어주었다.
시간이 없어서 큰 금액 위주로 대답을 해주었더니 나중엔 자기들끼리 경쟁이 붙어서
빠르게 원하는 대답을 듣고자 하는 놈들은 돈을 펑펑 써대기 시작했다.
이번 방송 한 번으로 두둑하게 벌 수 있었다.
정말로 이 손 선생은 강의에 재능이 있나 보다.
수강생들이 자발적으로 후원을 해 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 수강생 여러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열릴 것이지만 그 길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의 아름다운 도전에 열렬한 응원을!
시작을 도와준 대가는 달달하게 받아먹었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무렴.
거실로 나오니 예은이와 대혁이가 나와 있다.
“방송 잘 봤소,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형님은 히어로를 안 했어도 그 주둥이 하나만으로 대성했을 것이오.”
“내가 언변에 재능이 있긴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놈들을 털어먹다니 참…”
“어허, 털어먹었다니. 수강생들에게 수강료를 받은 거라고 해주지?”
이론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사물의 이치나 지식 따위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정리가 필요한 법이다.
존나게 강해지면 성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순 있지만 논리적으로 증명할 순 없다.
오늘 내 방송은 인간의 몸으로 성좌에 오르는 법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역사적 순간이다.
물론 이론을 안다고 해서 그걸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 아닌가?
개인적 역량이나 타고난 재능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방송에서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은 사실이에요?”
“응, 뭐 어떻게 보면 사실이지. 겸손 떠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예은이가 내가 방송에서 했던 말에 대해서 물어본다.
‘나는 말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야.’
시청자들에게 내 경지에 대해서 털어놓았던 그 말.
이도 저도 못하다는 것이 정확하게 내 처지를 설명해준다.
인간과 성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나는 과연 인간일까 성좌일까?
아직까진 지금 경지에 도달한 인간이 나 말곤 없기에
그 누구도 정확하게 규정해 줄 수가 없다, 전능한 성좌들조차도 말이다.
“그러니까 대혁이랑 예은이 너희도 지금부터 같이 수련하자. 같은 무투파로서 나 너무 외로워.”
“크하하하하! 형님이 지금 내게 수련 얘기를 하셨소? 그 단어는 나와 양립할 수 없소.”
“이 자식이 확 그냥, 천축행 한 번 더 찍을까 보다.”
“그러기엔 칠대성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무리요. 악당 녀석들 주제에 이럴 땐 도움이 되는고만 큭큭.”
아오 저 돼지 녀석을 그냥… 말하는 본새하고는.
“그러다가 한 대 맞으실 거 같은데…”
“정확해 예은아, 감히 형님의 귀한 제안을 돼지 녀석이 개무시해?”
“잠깐, 쿠에에엑!!!”
인간을 희롱한 돼지에게는 체벌이 필요하다.
돼지의 두툼한 목살을 두 팔로 휘감아서 조르기 시작한다.
. . . . .
다음 날.
유일한 내 상급자인 협회장님께 출장을 마치고 온 보고를 하러 협회로 향했다.
언제 봐도 으리으리한 히어로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내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들.
아무래도 어제 방송의 여파인가 보다.
나야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기에 평소처럼 안내 데스크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그, 그 손우진 챔피언님? 맞으시죠?”
“예. 협회장님의 호출 건으로 방문했거든요.”
“아아 넵!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합이 바짝 들어간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긴장한 채로 수화기로 들고선 몇 마디 통화를 마친다.
“바로 협회장실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 저기! 챔피언님!”
“네?”
“어제 방송 정말 잘 봤어요, 챔피언께서 그 정도 위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앞으로 더 힘내주세요!”
“하하, 응원 정말 고마워요.”
내 방송의 시청자를 현실에서 만나는 기분은 너무나도 오묘하다.
빠르게 화답해 준 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협회장실 층을 눌러버렸다.
미안하지만 안내원 아가씨, 내가 여기서 더 힘을 내서 성좌가 되어버린다면
칠대성으로부터 지상을 지킬 이는 아무도 없어요.
열렬한 응원은 부담이 됩니다.
오묘한 심정으로 도착한 협회장실.
들어가기 전 비서실에는 오늘도 회장님의 유일한 비서 한지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
“문제아 왔어?”
열심히 보던 업무를 멈추고 인사를 해주는 한지수.
그렇지만 그 인사에는 날이 바짝 서 있다.
“어쩐 일이냐? 우리 한지수가 반말도 다 하고.”
“너 상대로 점잔 빼는 건 포기했거든, 나만 손해기도 하고.”
“그래.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냐? 그나저나 아저씨는?”
“회장실 안에 계시니깐 얼른 들어가 봐.”
“알았다.”
안내에 따라서 회장실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한지수가 내 팔을 턱하고 붙잡는다.
“지수야, 다 큰 아가씨가 외간 남자 팔을 그렇게 막 함부로 잡고 그러면 안 되는…”
“시끄럽고, 손우진 너. 두 번 다시는 해외 출장 다녀오지 마.”
“아니 갑자기? 왜 그러는데?”
“몰라서 묻는 거야? 너가 저지른 외교적 결례나 무력 행위 때문에 협회로 항의 문서가 얼마나 왔는지 알고 그러는 거야?”
“야, 협회 좋다는 게 뭐냐.”
“할아버지를 때려 말려서라도 절대로 허락 안 해줄 거야… 내가 처리한 서류만 해도 몇 장이 되는데 나 대신 처리할 자신 있으면 나가시던가!”
“우리 이따가 얘기해! 아저씨 기다리신다!”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한지수의 손아귀에서 빠르게 벗어나서 협회장실 안으로 대피한다.
“휴우…”
“우진이 왔냐.”
회장실로 들어서자 우리 한 회장님이 나를 맞이해 준다.
“누굴 닮았길래 여자애가 무슨 저렇게 드세요. 저래서 시집이나 가겠어요?”
“내 아들놈이나 며늘 아가 둘 중 한 명이겠지. 설마 너 나한테 따지는 거야 지금?”
“아저씨의 오냐오냐 교육법도 한몫한 것 같거든요.”
“시끄럽고, 어제 방송에서 언급한 정보들은 전부 사실이냐?”
아니, 손녀나 할아버지나 이 한씨 집안은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는 것인가.
어째 한지수와 나눴던 대화의 데자뷰 같은데.
“예. 뭐 제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해요.”
“참 나, 손우진이가 어째 술술 털어놓는다 싶더니… 다른 이들이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 게지?”
“이론을 정립해 준 거죠, 이론만. 실천으로 옮기는 건 본인들한테 달린 거고요.”
“악독한 녀석…”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면 이제 가도 될까요?”
“가긴 어딜 가. 여기 내 옆에 앉아서 서류나 작성하고 가거라.”
“뭔 서류요? 전 그런 어려운 거 모릅니다.”
“우리 잘나신 챔피언께서 이번 출장에서 벌인 일이 얼마나 많은지 본인 서명이 필요한 서류도 꽤 많이 도착해 버렸는데 이걸 누가 작성해야 할까?”
“이런 양키 고 홈 자식들 같으니…”
밖에는 한지수가, 안에는 아저씨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얌전히 붙들려서 서류를 작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읽어보는 시늉이라도 좀 해봐라.”
“뭐 하러 그래요, 어차피 협회 실무진들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검토해봤을 거 아닙니까.”
“고 녀석 참, 말은 잘해요.”
읽지도 않고 서류를 휘갈기는 내게 면박을 주는 아저씨.
나는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를 본다.
대강 읽어보니 내가 미국에서 벌인 일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정도의 글로벌 히어로 협회의 문서들이었고 어제 있었던 방송에 대한 교차확인 정도다.
형식상의 내 서명이 필요하다고 하니 정말로 형식상으로 휘갈기고 있을 뿐이다.
“짜장, 짬뽕.”
“협회장이나 되셔서 점심 메뉴로 짜장 짬뽕이 뭡니까? 좀 더 쏘세요.”
“어쩔 수 없군. 고상한 손우진 군은 내버려 두고 혼자 먹든지 해야지.”
“탕수육도 시켜주세요.”
“귀찮은 녀석.”
그렇게 협회장 아재 옆에서 서명을 휘갈기고 있을 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아저씨의 손녀인 한지수가 식사를 가져 온다.
“지수 넌 안 먹냐?”
“…”
식사를 테이블에 놓은 한지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손을 빛낸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장막.
한지수가 모시는 예술의 신 뮤즈의 능력이다.
이 장막 속은 한지수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소리가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제 얘기해도 되겠지. 우진아, 부탁 하나만 하자.”
“뭘 말씀하시려고 이렇게 원천 차단까지 하시는데요?”
“네 힘으로 조사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블랙 요원들로부터 죽었던 자들이 다시 목격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게 뭔…
이런 거에선 남의 나라 트렌드는 안 따라갔으면 좋은데 말이야.
아저씨의 황당한 발언에 나는 재차 확인할 겸 질문을 건넸다.
“뭐 우리나라도 유행 따라갑니까? 미국 서부처럼 좀비 사태라도 발생한 거예요?”
“아니, 그것과는 달라.말 그대로 죽음이 확실시된 이들이 생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돌아온 게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