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우리 소통해요
* * *
정해뒀던 약속의 시간은 어느새 모두 흘러가고 마지막 날.
안소정에겐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
그동안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해서 걱정이 되었지만
자기 나름대로 무아지경을 완성하려는 노력이라 생각해서 간섭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자신의 수도복까지 정갈하게 차려입은 동생.
이 내기에서 동생의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짧게나마 가르침을 주었던 예은이도 함께 한 상황.
“그런데 그건 왜 들고 왔어?”
“이게 내가 찾은 해결책이야.”
“아니 저기요… 진짜로 실물 책을 들고 오셨는데요?”
평소대로라면 전투 망치만 들고 있어야 할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성경책.
“설마 지금 그거 들고 싸우려고?”
“응.”
“그래,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준비했겠지.”
“그래도 소정 언니 나름대로 방법을 찾으신 거 같네요”
“나중에 가서 수틀린다고 둔기같이 휘두르는 건 아니겠지?”
“자자, 두 분 다 빨리 올라가세요.”
마음의 평안을 찾으라고 했더니 성경책을 들고 올 줄이야.
방안에서 들려오던 소정이의 중얼거림은 성경 구절을 읊는 소리였나 보다.
별나도 이런 별난 동생이 없다.
우리는 말 없이 함께 대련장 위로 올라간다.
마지막 기회이고 간절한 만큼 전력을 다해서 덤벼올 것이 분명할 것이다.
대련장 위에서 다시 마주 선 나와 안소정.
“준비가 끝나면 언제든지 시작해도 돼.”
“알았어.”
“마지막 기회인데 자신 있어?”
“후우.”
쿵.
소정이가 길게 한숨을 내뱉고 전투 망치를 땅에 닿도록 내려놓는다.
“……”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곤 품에 성경을 안고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구절이 끝나자마자 눈을 뜨는 안소정.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 끝에는 더이상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좋은 눈동자야.
파앗!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아지경의 경지에 도달한 소정이가 나와의 거리를 좁히고
그 무지막지한 전투 망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른다.
부웅!
“어이쿠. 신앙심으로 마음을 다스릴 줄이야, 이제야 좀 이단심문관 같으시네요.”
“그분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거 단단히 작정하고 왔나 본데.”
말로 현혹하는 작전도 더는 통하지 않겠네.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성경 구절로 귀를 틀어막고 내면의 평정심을 유지 중이다.
어떤 감정이나 잡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에 몸을 움직이듯.
나를 향해 날아드는 전투 망치의 궤적에선 가족과 같은 오빠를 공격한다는 망설임도, 다음 공격에 대한 계획 그 어느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후웅!
콰앙!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안소정에게 밝은 기운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진다.
흔들리는 마음은 성인의 가르침으로 다스리고 그에 대한 신앙심을 이용해 신성을 쌓는다라.
부족한 점을 이런 식으로 보완해 올 줄이야.
점점 내 템포에 맞춰서 피할 곳을 하나둘씩 틀어막는 소정이.
이러다간 정말로 얼굴로 오 변호사와 면담할 수도 있겠다.
“성장했구나.”
동생들의 성장은 언제 봐도 반가우면서 아쉽다.
언제까지 돌봐줘야 할 것 같던 동생들이 나를 따라 하나둘씩 보육원을 떠나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어 연락이 뜸해졌더라도.
결국엔 내겐 동생인데.
시원섭섭한 기분이 내 몸을 감돈다.
내 곁의 친구들이 언젠가는 모두 품을 떠나가겠지만 현실에 안주해선 안 되겠지.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여줘야 할 차례다.
“부름에 응하라, 내 오랜 벗이여.”
성좌의 충실한 심복이자 지금은 챔피언의 벗이 부름에 응한다.
우주 공간에서 떠돌고 있다가 내 손안으로 소환되는 여의금고봉.
그 묵빛색 새까만 철봉이 뿜어대는 흉흉한 기운에 소정이도 공격을 멈추고 바로 뒤로 물러난다.
“단 일 합, 받아낼 수 있으면 소정이 네 승리야.”
“……”
지금까지는 공격에 대응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지만 지금의 소정이는 자격이 있다.
이제 발걸음을 막 떼기 시작한 후대를 위해 더 높은 경지를 보여줄 차례.
화과산 모든 원숭이의 왕 미후왕美?王에서 천계의 선인들과 맞먹는 제천대성??大?까지.
석가의 가르침에 따라 득도에 이른 투전승불戰??.
그리고 그런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인 내가 동생을 위해 여의를 휘두른다.
묵빛의 철봉에 모여드는 금색 기운.
화과산 꼭대기, 그곳에 있는 거대한 돌덩이에서 벼락을 맞고 태어난 돌 원숭이.
그의 탄생을 담고 있는 기술.
손오공 오리지널.
뇌격雪?
삐이이
황금빛 맹금이 대련장의 천장을 박살내고 안소정을 향해 떨어져 내려온다.
그 사나운 울음소리는 당장이라도 소정이를 집어삼키려 한다.
“크으윽!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사나운 기세에 평정이 흔들릴 뻔한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곧이어 충돌하는 두 신성.
황금빛 맹금과 성직자의 믿음이 형상화한 하얀색 망치가 충돌한다.
.
.
.
.
빛이 있으라.
방금 상황은 그 태초의 천지창조와 같았다.
번쩍이는 섬광 속에서 다시 나타난 안소정.
“하아… 하아…”
“와… 내 동생이지만 진짜 독하다 독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뇌격과 충돌하다니 말이야.
충격이 컸는지 망치를 하늘에 치켜든 채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다.
하긴 얘는 어릴 때부터 남다르긴 했어.
“소정 언니! 괜찮으세요!”
밑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예은이가 허겁지겁 대련장 위로 올라온다.
그리곤 나를 휙 쏘아본다.
“아저씨!”
“잠깐만, 먼저 말하겠는데 아무런 피해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무시무시한 기술을 사용하시면 어떡해요!”
“하아 하아… 괜찮아 예은아 조금, 조금 놀라서 그래…”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고 하는 하예은을 소정이가 말린다.
“괜찮아? 조절은 잘한 거 같은데 다친 데는 없지?”
“…내가 이긴 거 맞아?”
“그거부터 물어보냐, 그래. 너가 이겼어.”
“하하! 하아…”
소정이는 자신의 승리를 내게 인정받자마자 웃어 보인 뒤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완전한 패배다.
소정이가 쓰러지자마자 참관인이었던 예은이에게 뒤지게 혼났지.
뇌격은 소정이와 충돌하기 직전에 대부분의 기운을 거두어서 아주 미약한 상태로 충돌한 것인데 아무리 말해봤자 알아주지 않았다.
아니 그걸 왜 안 피하냐고…
뇌격의 기세에 조금이라도 자리를 옮기거나 했으면 적당히 놀리다가 인정해줬을 텐데
저 무식한 여동생은 그 사나운 황금빛 맹금을 보고서도 한 발자국도 피하지 않았다.
독한 것.
인정한다 인정해.
“넌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쉽게 포기하지 않았지.”
“다 오빠 덕분이야. 내가 누굴 보고 자랐겠어.”
“그만 떠들고 입이나 벌리십시오.”
“호호! 한 번 더 당해도 되겠네! 챔피언이 손수 챙겨주고 말이야, 너무 좋다.”
“크윽…”
동생을 위한 내 과한 욕심이 잘못된 것은 맞기 때문에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봤더니
오늘 하루 자신의 병 수발을 들으랜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니라고 따져 봤지만 현재 상태는 심신미약이래나 뭐래나.
하지만 나도 잘못한 것이 있기에 얌전히 이 꾀병 환자에게 죽을 먹여준다.
너무나도 지독스러운 우리 동생.
“오빠.”
“왜!”
“그래서 어느 정도로 봐준 거야?”
“뭐가?”
“마지막 공격 말이야. 나도 정말로 믿음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도망쳤을 거야.”
“하, 너희 성좌도 우리 대련 좀 봤어야 했는데. 뭐, 기운은 거의 다 거두긴 했지.”
동생 죽일 일 있나.
소정이가 성좌 급도 아니고 뇌격의 본래 기운을 인간이 정통으로 맞았다간 재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겠지.
천계의 성좌들 사이에서도 두려워하던 것이 우리 스승의 여의금고봉.
그런 놈으로 스승의 기술을 재현해서 보여준 것만 해도 큰 경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도움은 됐고?”
“응?”
“그걸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잖아. 이제 어지간해선 무아지경의 평정심이 풀리는 일은 없을걸.”
“흐응. 그거 정말 고맙네요.”
“또 성경책을 매개체로 삼아서 신성을 순환시키는 방법은 괜찮은 발상이었어. 아주 잘했어.”
갑자기 내 이마에 손을 올리는 안소정.
“나보다 오빠가 어디 잘못된 거 아니야? 무슨 일로 칭찬을 다 해주지?”
“아 진짜!”
죽을 남김없이 싹싹 먹여준 다음 방을 나왔다.
내 앞에선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정신적 충격에 오늘 하루는 푹 쉬고 계획에 대해선 내일 이야기 하기로 했다.
“야, 이리 나와.”
……
“여의. 너 말하는 거 맞아.”
슉!
다시 내 앞에 나타난 여의.
그렇지만 이번엔 내 손안으로 오지 않는다.
“아오! 너 혼자 그렇게 쏙 빠져나가니깐 좋냐?”
우웅!!!
“온전히 내 잘못이라고? 너도 출력 조절 안 한 건 사실이잖아!”
웅!!!
“크아악! 이 돼지 녀석이 빨리 안 내려와!”
충실한 심복, 오랜 벗 다 취소다.
나는 한참을 여의와 잘잘못을 따져가면서 실랑이를 하였다.
. . . . .
“챔피언, 빨리 서명하신 다음 낭독해 주세요.”
“크윽… 나 손우진은 비밀 임무에 대한 유인책 역할을 유일교의 이단 심문관 안소정에게 위임합니다…”
“다른 참관인 분들도 똑똑히 들으셨죠?”
“우진이가 지는 날도 있네.”
“네에.”
“크하하하하!”
“오빠는 정말…”
“아저씨가 판 자기 무덤이에요.”
참관인이라고 해봤자 아는 얼굴들뿐.
쌍둥이, 대혁이, 유정이, 예은이가 이 내기의 참관인으로 찾아와 주었다.
“야 너희 잘 알지도 모르면서! 사실상 대련은 내가 이긴 건데 소정이가 노력해서 봐 준 거지!”
“아저씨 입으로 일 합만 버틴다면 소정이 언니 승리라고 말하셨잖아요.”
“크흠!”
“역시 날조와 선동으로 승부를 보는 형님답구려, 크하하하케엑!”
“이 돼지 녀석이 아까부터 사람 성질을 건드리고 있어!”
“싸워라! 대혁이도 얼른 반격해!”
“힘내! 더 세게 조르는 거야!”
“예은아, 내가 이 광경만 벌써 몇십 년째야.”
“…저도 조금 있으면 이제 익숙해질 거 같아요.”
잠시 참관인과 소란이 있었지만 빠른 인정을 받아내고 놓아주었다.
“그래서 유인책 담당 안소정 씨, 버러지들 유인은 어떻게 하실려구요? 방송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맞아, 말 나온 김에 빨리 끝내러 가자.”
“뭘?”
“방송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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