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외전 별들의 의회
* * *
별들의 의회.
위대한 성좌들의 모임.
밀레니엄 쇼크로 인간들의 세상에 성좌들이 개입하게 된 이후로
각자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이들은 조율의 장을 탄생시켰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해야 할 만큼 커다란 안건이 생겼을 때 소집되고는 한다.
하지만 의회에선 같은 성좌라고 해도 서로의 급이 같을 수는 없는 법.
여태껏 인간의 믿음을 양분으로 삼던 이들이 그러하듯이
이 연회에선 인간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성좌가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하… 귀찮아서 원.”
자신의 옆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등장한 이.
그렇지만 그 천박한 행품과는 달리 거물급인 성좌.
천계의 문제아 제천대성 손오공이 이번 의회 소집에 천계 대표로 홀로 참가하게 되었다.
모두 제자 놈 때문이다.
손오공은 자신을 귀찮은 일에 빠뜨린 제자 손우진을 향해 투덜거렸다.
여태까지는 초청장이 와도 가볍게 무시했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이번 의회는 손오공 그대의 제자로 인해 열린 것이니 의회에 참석해 스스로 해결하고 오시오.’
천계의 최고 늙은이 옥황상제의 부탁 아닌 부탁이 그를 강제로 참석하게 만들었다.
본래 별들의 의회엔 천계 대표로 상제의 오른팔인 이랑진군 혹은 태상노군이 참여했고 자신은 그저 호위 정도나 섰으면 됐는데 손오공 본인이 대표로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성좌라는 놈들이 엉덩이가 무거워야지 쓸데없는 안건으로 오라 가라 하는 건가.
손오공은 만사가 귀찮은 채로 터벅터벅 의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 분기의 의회장은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가 맡고 있기에
그가 거주하고 있는 올림포스 산맥까지 찾아오느라 손오공은 심통이 단단히 났다.
“위대한 별을 뵙습니다! 신분 확인을 위해 초청장을…”
“야.”
“예?”
자신의 붉은 눈을 부릅 치켜뜨는 손오공.
심술이 난 성좌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버린 올림포스의 병사가 잔뜩 쫄아버린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름 영웅 출신으로서 신들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성좌의 앞에선 태양 앞 반딧불이 신세다.
“넌 여기 신 중에 누구를 믿나?”
“그… 그게.”
“어허, 이것 봐라. 빠르게 대답 안 나오지?”
“아닙니다! 저는 주신 제우스 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거물급 성좌가 갑작스레 건넨 질문에 혼이 나간 병사는 올림푸스의 수장 제우스를 언급하고 만다.
“털보? 그래, 뭐 꼴에 주신이니까 그럴 수 있어. 나머지 놈들은 그냥저냥이라는 소리지?”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여기 떨거지 신들은 참 슬프겠어.”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면 뭐? 새로운 주신을 믿는 쪽이야? 너 믿음에 문제 있어?”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뭔데 새끼야 빨리 확실하게 말 안 해?”
“그, 그게!”
“우리 쪽 아이를 괴롭히는 건 그만두셨으면 해요.”
그들의 뒤에서 들려오는 미성.
병사를 놀려먹던 손오공은 불청객의 방해에 뒤를 돌아본다.
길게 흘러내리는 풍성한 금발에 새하얀 피부, 반쯤 뜬 눈은 고혹적이다.
몸짓 하나하나가 기품과 관능이 흘러넘치는 여인.
올림포스 12신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천계의 고약한 원숭이를 저지한다.
“언제부터 애 엄마가 되셨지? 내 당신의 아들내미를 몰라봤군 그래.”
하지만 손오공은 올림포스의 미의 여신을 눈앞에 두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손오공은 엄연히 요괴 출신.
인간의 미적 감각을 모조리 때려 박은 이 여신을 봤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아프로디테도 그런 손오공의 태도를 알고 있기에 미의 여신으로서 오기가 나서 만날 때마다 밀어붙이는 것이다.
“성좌 손오공.”
“흥, 재미없는 여편네 같으니.”
손오공은 흥이 깨졌는지 병사를 갖고 놀던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선다.
결국 끝까지 초청장을 건네주지 않은 성좌를 두고 안절부절 못하는 병사를 아프로디테가 다독여준다.
“그의 신분은 제 이름으로 보장할 테니 그대는 걱정하지 마세요.”
“흐으! 정말 감사합니다, 아프로디테 님!”
이제야 한시름 놓는 병사를 두고 아프로디테는 저 멀찍이 걸어가는 손오공을 쫓아간다.
“이봐요! 손오공!”
열심히 쫓아가 보지만 이 원숭이의 발에는 기름이라도 바른 건지 술술 나아가는 것이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다.
사랑과 미의 여신은 자신의 말을 개무시하는 고약한 원숭이를 계속해서 부른다.
“오공! 야! 이 원숭이 놈아!”
원숭이 소리에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손오공.
갑자기 멈춰 선 손오공 때문에 아프로디테는 균형을 잃고 그와 부딪힌다.
“아흑!”
“왜?”
미의 여신이 코를 감싸 쥐고 있든 말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손오공.
그런 그의 태도에 열받은 여신이 좀전의 고풍스러운 태도는 어디 가고 그를 빼액 쏘아붙인다.
“그게 지금 절 걱정하는 태도에요!”
“아니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엄한 데 트집이야!”
“당신 때문에 부딪힌 건데 조금은 걱정해 줄 수도 있잖아요!”
“내가 왜!”
“그야 제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기 때문이죠!”
“넌 내 취향 아니라니까!”
“야!!!”
.
.
.
“그대는 어찌 의회 소집 때마다 미의 여신과 붙어 다니는군. 허허!”
이번 의회장인 올림포스 최고 주신인 제우스가 미의 여신과 제천대성이 함께 입장한 모습을 보고 능글맞은 표정으로 놀려댄다.
“닥쳐 이 금태양 자식아.”
미의 여신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느라 손오공은 회의 시작도 전에 기운을 다 뺐다.
그런 속도 모르고 자신을 놀려대는 털보 놈이 얄미워 손오공은 제자가 알려준 것을 써먹는다.
“금태양?”
“그래, 내 제자 놈한테 배운 거다.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흠! 나중에 본좌의 아이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제우스는 손오공이 했던 금태양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챔피언 안드리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속을 긁는 단어인 것 같다.
“거지 같은 올림포스 같으니.”
“호오! 그건 최고 주신으로서 가볍게 넘겨선 안 될 말이로군! 어느 부분이 자네 마음에 들지 않은 겐가?”
손님의 투정에 고객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는 올림포스 최고 주신.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사실 올림포스는 문제 될 거 없지. 왜냐면 그냥 의회에 참석한 것이 싫으니까!”
“허허! 어찌 인생에 하고 싶은 일만 있겠나, 자네의 인내심은 저 먼 옛날 서역에 두고 왔나 보군.”
“시끄러워, 내 그래도 이 넥타르 때문이라도 참는다.”
의회를 시작하기엔 아직 참석하지 않은 자들이 많다.
자신이 이곳에 일찍 온 이유.
그것은 여기가 바로 올림포스이기 때문이다.
제자 놈을 그리스 영웅 신에게 팔아먹으면서까지 얻어낸 이 신묘한 영약.
서역 것들이 빚은 술 주제에 맛이 제법 기가 막힌다.
손오공은 이번 출장의 주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넥타르 술병을 쪼르륵 기울인다.
“허허허! 그것 참 다행이로군, 회의를 시작하기 전까진 마음껏 즐기시게나.”
벌컥벌컥!
손오공은 자신의 앞에 준비된 신들의 음료 넥타르를 술잔에 따른 뒤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사실 이것을 위해서 참가한 것이나 다름 없는 바.
만약 넥타르조차 없었다면 상제의 명이고 뭐고 자신은 도망쳐서 참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술이 마르지 않는 병을 계속해서 들이붓는 그런 손오공 앞으로 그때 누군가 다가온다.
“오공, 이번 의회에서 당신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잘 알고 있죠?”
“아 진짜 보살님까지 술맛 떨어지게 왜 그러십니까?”
젠장, 오늘은 날이 텄군.
손오공은 속으로 불경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중생을 구원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이번 의회에 참석한 자애와 자비의 상징 관세음보살이 그의 앞에 떡하니 서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참석했다는 것은 이번 의회 안건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알려준다.
“오공 당신의 아이 일이잖아요. 스승으로서 힘이 되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압니다.”
“준비해 온 답변들이 있나요?”
“아뇨, 뭔 답변을 준비해요. 그냥 즉각적으로 말하면 되는 거지.”
“하아…”
이 대책 없는 원숭이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진다.
성좌가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자신의 제자인데도 이렇게 한가로운 태도라니.
보살께서 그러거나 말거나 손오공은 계속해서 술을 홀짝인다.
“크으!”
“오공.”
“예이예이.”
“손오공.”
옛 직속상관이었던 여인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부른다.
화를 내기 일보 직전이구나.
눈치가 빠른 손오공은 황급하게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고 대답한다.
“예.”
“대책은 알아서 준비해 두셨죠?”
“우진이 놈에게 피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공이 스스로 잘할 거라고 믿어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공 그대가 취하지 않는 걸 아니깐 음주하는 건 뭐라 하진 않을게요, 다만…”
“본분을 다하라 이 말이시죠?”
“…신주??에게 주는 관심만큼 제자를 챙겼으면 하네요.”
관세음보살은 영악한 원숭이를 두고 다시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간다.
방해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손오공은 다시 넥타르가 든 술병을 슬금슬금 기울인다.
의회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이곳에 온 본전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