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격돌
* * *
밀레니엄 쇼크가 없었더라면.
평화로운 세상에서 동생 하영이는 내 눈앞의 모습처럼 성장했을 것이다.
훌쩍 커버린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생 하영이.
가슴은 뜨겁게 뛰더라도 머리는 차갑게 사고해야 한다.
이건 놈의 농간일 것이다.
“뭐야, 오빠 표정이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나랑 얘기 안 할 거야?”
“동생은 반가움을 표하는데 혈육인 네놈이 그래서 되겠는가? 하하!”
후우.
후우.
분노, 그리움, 슬픔 등 상반되는 오만가지 감정이 내면에서 휘몰아친다.
저것이 정말 진짜 나의 혈육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동생의 죽음을 욕보인 것은 변함없다.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듯
나의 누이는 이미 이승과의 연을 끊고 안식을 찾아 떠난 지 오래다.
그런데 저 무뢰한은 그 소중한 안식마저 더러운 손으로 파 해쳐 버렸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난 뒤 해야 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영아.”
“응?”
“오빠는 아직 할 일이 많아.”
지금 당장으로서는 동생의 안식을 더럽힌 저놈을 처죽이는 것부터 해야겠지만
그것 말고도 세상의 평화라던가 나름 거창한 임무도 남아 있다.
내게서 떠나간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나만의 영결식은 끝난 지 오래다.
“참! 만나자마자 일 얘기야?”
“등에 짊어진 짐을 모두 내려놓게 될 수 있을 때 반드시 찾아갈 거야. 그러니깐 이 못난 오빠를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것은 눈앞의 동생의 모습을 한 잡것이 아닌
미타찰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온한 날을 보내고 있을 내 동생 하영이게 보내는 약속이다.
나는 혼자만의 다짐을 끝마치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게 무슨 말…”
“파괴한다.”
화르륵!
오행의 신성한 흰색 불꽃이 카피의 발끝에서 피어올라 천천히 파괴해 나간다.
“오빠!!!”
“……”
“그만해!! 너무 뜨거워!!!”
“하하하하!!! 눈물 없인 볼 수 없구나!”
동생의 카피가 소멸하는 가운데 홍해아 놈의 재수 없는 웃음소리가 신전 내 울려 퍼진다.
“오빠!!! 하지 마!!”
“재밌지도 않은 내 동생 시늉은 그만 집어치워라.”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인 기분은 어떻지? 괴로운가 손우진? 크하하하하!!!”
내가 반응해주지 않으니 결국 실체를 드러내는 가짜 놈.
그때 홍해아가 가짜 놈의 곁으로 다가와 오행의 불꽃에 손을 갖다 댄다.
“휴우! 제법 더러운 불꽃을 다루는군. 지옥의 뱀이여, 이것으로 거래는 끝이오.”
“그래. 제법 좋은 거래였다고 큭큭!”
그렇게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동생의 모습.
잠깐이라도 성장한 하영이를 볼 수 있었으니 놈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까.
“생각보다 반응이 심심해서 재미가 떨어져. 성좌에 근접해지니 벌써 인간성이라도 상실한 게냐?”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던 내게 홍해아 놈이 말을 건네 온다.
“이딴 짓거리를 준비하려고 지금까지 죄 없는 사람들을 되살린 거냐?”
“그래. 모두 자네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느라 거친 시행착오일 뿐이지.”
홍해아는 다소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섭섭하군.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으면 동생과 행복하게 다시 지낼 수 있었는데…
기회를 차 버린 건 네놈의 선택이야.”
“나의 누이는 안식을 찾아 떠났다. 현세에는 더이상 돌아올 수 없어.”
“그것참 꽉 막혔구나! 하긴 지옥의 뱀 또한 영혼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대타를 준비했건만 …”
놈이 쫑알쫑알 떠들어 대봤자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그만 닥쳐라. 확실한 것은 오늘 넌 내 손에 죽는다.”
“호오! 감정이 사라지진 않았나 보군그래? 큭큭.”
“이건 예언이나 바람 같은 게 아닌 일방적인 통보야.”
“흐흐. 기껏 선물을 준비해 줬건만 홀랑 태워버리질 않나… 하찮은 인간 놈이 말이야!”
심장 속 깊이 잠재워 두었던 기아스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현재 나의 강렬한 의지에 반응해 잠에서 깨어나 버린 것 같다.
머리에 피가 좀 쏠린 것 같긴 하지만 뭐 어때?
가족을 욕보인 놈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제2의 제천대성이 되어도 좋아.
“와라. 처죽여주마.”
“이놈! 본좌 앞에서 건방 떨지 마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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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한대수는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들려온 불쾌한 소음에 눈을 돌렸다.
“참나. 뜬금없이 가만히 있던 액자가 왜 떨어지고 그래.”
그는 떨어진 액자를 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를 줍고 보니 액자의 겉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사진에 손상이 가면 안 되기에 한대수는 유리 조각을 탈탈 털어낸 뒤에
액자 속에 있던 사진을 빼내었다.
사진 속에는 혼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과 뾰로통한 표정의 손녀 한지수와 손우진,
셋이 사이좋게 찍혀 있다.
“고놈들 참…”
끼이익.
회장실의 문이 열리고 손녀이자 비서인 한지수가 안으로 들어온다.
“회장님? 무슨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봤어요.”
“아아 별 건 아니고, 책상 위에 가만히 있던 액자가 떨어지지 뭐냐.”
한대수는 문뜩 불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는 이 불안함을 제거하고자 손녀인 한지수에게 질문을 건넸다.
“지수야, 우진이한테서 아직 연락 온 거 없냐?”
“아직까진 챔피언한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마지막 소식은?”
“교단의 이단심문관인 안소정 씨가 구출되었단 소식 말고는 전혀요.”
“예상보다 시간이 지연됐는걸.”
자신도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
미신 같은 것을 전혀 믿지 않는 한대수는 불길한 징조를 애써 무시하기로 하였다.
괜한 마음에 한대수는 셋이 찍은 사진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때 따끔한 통증이 그의 손가락에서 전해져 왔다.
손가락에는 동그란 핏방울이 맺혀 있고 사진에도 핏자국이 살짝 묻어버렸다.
“쓰읍…”
“괜찮으세요? 유리 조각이 사진 위에 남아 있었나 봐요.”
“좋지 않아…”
“네?”
“아니다. 지수야 휴지 좀 가져다 주겠니?”
한대수는 자신의 예감이 괜한 기우이길 바라며 손우진 믿고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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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익!
화염의 검과 여의가 맞부딪히면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신의 수하와 달리 홍해아 놈은 근접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확실히 화염산의 주인 자리를 딱지치기로 얻어낸 것은 아닌가 보다.
하지만 기아스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지금 분노 도핑을 받은 나한테
홍해아는 근접전을 걸어오면 안 됐다.
후웅!
“파괴한다.”
나는 여의에 힘을 밀어 넣어 녀석을 저 멀리 날려 보낸 뒤 인을 맺어
홍해아를 향해서 파괴력의 조화를 부리는 불꽃을 다시 한번 피워 올렸다,
“놈! 지금 본좌 앞에서 조잡한 불을 부리는 것이냐!”
홍해아는 온몸에서 진홍색 불꽃을 피워올려 자신의 몸에서 피어오른 흰색의 불꽃을 싸그리
진화해버렸다.
“결집하라.”
“잔재주만 부리는 구나!”
물의 응집력과 홍해아의 진홍색 불꽃이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불을 꺼트리려 하는 자와 불태우려 하는 자의 승부.
나는 왼손으로 응집력을 유지한 채 홍해아 놈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하앗!”
홍해아는 내가 오행을 부리면서 근접전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크윽!”
여의가 아슬아슬하게 홍해아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타앗!
내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홍해아가 다급하게 나와 거리를 벌렸다.
지금 홍해아 놈도 깨달았을 것이다.
체술이나 힘에 있어서는 내가 우위에 있다.
여기에 나는 최상급 보패 여의금고봉까지 들고 있으니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체술로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놈이 삼매진화와 같은 최상급 주술을 사용하게 내버려 둔다면
홍수아 때와는 달리 내 안위를 보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까처럼 놈이 자신의 보패인 오행거를 준비할 시간을 쉽게 주어선 안 된다.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대요괴인 이 몸 앞에서 거들먹거려!”
“지금 와서 내가 두려운 거냐? 그러게 정도껏 했어야지.”
“이런 굴욕 용서 못 한다!!!”
손바닥 위로 화염 구체를 피워 올리는 홍해아.
이글이글 불타는 구체는 점점 크기를 불려가기 시작한다.
고열의 불꽃을 거대한 구체로 압축시킨 놈이 그 화염구를 내게 던져버린다.
“태양의 열기에 불타 죽어라!”
놈이 태양이라고 칭할 만큼 화염구의 위력이 어마어마해 보인다.
지하에서 저런 무지막지한 기술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놈을 욕하면서 빠른 속도로 구체를 지나쳤다.
거대한 질량을 지닌 만큼 속도는 느려터졌기에 쉽게 화염구를 제칠 수 있었다.
화염구를 피한 뒤 홍해아 놈에게 다가가 여의로 한 대 후려치려고 하는데
놈의 손바닥이 아직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 약아빠진 놈! 속였구나!”
“속이다니! 처음부터 불타 죽으라고 이 몸이 명하지 않았나!”
이 작은 태양을 여의로 막아냈다간 놈에게 뒤를 내주는 셈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야말로 놈이 바라던 바일 터.
“여의! 시간 좀 벌어줘!”
나는 홍해아 놈을 향해서 여의를 날려버린 뒤 인을 맺어 손에 물을 생성해냈다.
치이익!!!!
내 손을 감싸고 있는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이 작은 태양과 힘겨루기에 들어섰다.
무지막지한 몸집으로 나를 집어삼키려는 화염구.
“엄청 뜨겁잖아 이 빨갱이 초딩 새끼야!!”
주인 없이 홀로 싸우는 만큼 여의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 이 무식한 화염구를 처리해야만 해.
위기에 몰리자 급격하게 회전을 가속하는 심장 속 기아스.
방정떨기는!!!
지금 와서 맹약을 지키라고 제촉하는 거냐!
나는 내게 걸려있는 기아스의 맹약을 생각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