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격돌
* * *
나에게는 아직 기아스의 맹약이 존재한다.
스승인 제천대성의 힘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맹약.
하지만 사용하면 할수록 내 존재는 제천대성에 덮어 쓰이게 되어 사라지고 만다.
천계에 다녀온 뒤로 수련을 통해 힘을 길러 그에 의존하지 않고 싸울 수 있게 되었지만
더 강한 힘이 필요해진 순간이 찾아오자 기아스가 맹렬한 유혹을 보내오고 있다.
자신과 맺은 맹약을 이용하라고 말이다.
“크윽! 이 사채업자 같은 놈아 제발 닥치고 있어!”
홍해아와 나는 각각 서로의 공격을 받아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내가 이 거대한 화염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 사이에 놈은 여의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녀석의 주특기인 삼매진화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나는 라돈 레이드 때처럼 이번에도 불가 쪽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천수관음이시여!”
땅에서 솟구치는 새하얀 손들이 화염구를 감쌌을 때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중생의 모든 것을 살피는 관세음보살의 신성한 손에 뒤덮인 화염구는
점점 크기가 줄어들고 힘을 잃기 시작한다.
손들을 따라 점점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홍해아의 화염구.
나이스 보살님!
제멋대로 카피한 기술이긴 하지만 이래저래 불가 쪽에 도움을 받는 일이 꽤 많다.
숙련된 승병들은 다섯 개에서 열 개 정도의 손을 소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알 게 뭐냐.
처음 시도한 기술이라곤 해도 나에겐 그것을 바쳐줄 막대한 신성이 있었다.
화염구를 제압한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와 비슷한 시간대에 여의를 떨쳐낸 홍해아가
어느새 오행거 한 채를 소환해 두었다.
“여의! 돌아와!”
“시건방진 인간 놈 주제에!”
혼자서 열심히 놈을 상대한 여의를 내 품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인간인 내가 자신과 비등비등하게 싸운 사실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건지
자신의 주특기인 삼매진화를 사용하려고 한다.
“불장난은 지긋지긋하니깐 그만 좀 하자.”
쿠우웅.
나는 장악력을 사용해 수레 밑의 바닥을 움푹 꺼뜨려서 땅에 반쯤 잠기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수레의 문이 열리지 못하니 삼매진화를 뿜어댈 수 없을 것이다.
“감히 본좌의 수레를!”
“네 잘난 불장난도 모두 받아줬으니깐 이제는 내 차례다!”
여의를 굳게 쥐고 놈에게 다가간다.
홍해아도 지속된 소모전으로 더는 화염구를 펑펑 남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관계로 이제부터는 체술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다.
“평천대성의 적장자인 이 성영대왕 홍해아를 무시하는 것이냐! 이놈!”
이글거리는 불의 검을 뽑아 든 놈이 내게 달려든다.
치이익!!!
맞부딪히는 여의와 불의 검.
스승님이 서역행 시절 홍해아와 싸웠을 때 고전했던 것은
삼매진화라는 최상위 주술 하나 때문이지 체술이나 무력 면에선 압도적이었다.
녀석과 싸워보니 나도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녀석이 휘두르는 불의 검 자체는 뛰어날지 몰라도 휘두르는 방법은 형편없다.
그래서 아까 전부터 나와 근접전을 하길 피한 것이다.
불을 다루는 능력은 최상급일지라도 체술은 아니라는 거겠지.
퍼억!
“크악!”
“그 잘난 요괴님께서 하찮은 인간한테 처음으로 맞아 본 소감은 어때?”
“닥쳐라!”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적하자 심히 발광하는 홍해아.
그렇지만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눈먼 칼에 당할 내가 아니다.
“커헉!”
“인간의 존엄성을 조롱한 죄.”
여의로 놈의 정강이를 후려쳐서 먼저 자세를 무너뜨린다.
“생명을 경시한 죄!”
“아아악!”
“그리고 내 동생 하영이를 모욕한 죄!!!”
내 앞에서 깝죽거린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퍼억! 퍼억!
홍해아의 두 뺨을 여의가 왕복으로 왔다 갔다 지나가고 홍해아의 코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분이 풀릴 때까지 수십 차례 후려친 결과 홍해아 놈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
“후우…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남았냐?”
“……”
아까 까지만 해도 신음을 뱉어대던 놈이 조용하다.
하도 얻어맞아서 얼굴은 퉁퉁 붓고 피범벅이 된 홍해아는 내 질문에도 답하지 않는다.
“크크…”
“뭐가 우습지?”
“크하하하! 마지막 말은 네놈이 남겼어야지.”
“뭐?”
“영원의 불꽃을 피워 낼 준비는 끝났다.”
홍해아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에선 점점 열기가 느껴진다.
아.
이 녀석도 자기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준비해 두었구나.
수레는 눈속임용이었다.
놈은 수레 없이도 삼매진화를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역시 주입식 교육은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엔 한계가 있단 말이야.
녀석의 눈, 코, 입에선 빛이 나더니 곧이어 오행의 이치를 거스르는 불이 피어오르고
화염은 순식간에 가까이 있던 나를 덮쳐왔다.
콰아아!!!
.
.
.
악신의 신전 속 어두운 지하공동이 꺼지지 않는 불길로 가득하다.
삼매진화는 손우진을 집어삼키고도 배를 채우지 못했는지 주위의 것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불을 뿜어대고 있던 홍해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의 눈, 코,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홍해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불꽃의 향연을 보고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하하하하!”
이렇게 하나의 악연을 본인의 손으로 정리하였다.
그것도 놈의 제자를 삼매진화로 처리한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홍해아는 안일하게 대처한 손우진을 마음껏 비웃었다.
“크흐흐 멍청한 놈. 화신과 싸우게 하면서 수레를 의식시킨 것은 옳은 판단이었어.”
놈의 스승인 손오공이 자신의 제자에게 본인의 약점을 설명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홍해아 본인은 그것까지 생각해두어 일부러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그의 예상보다 손오공 놈의 제자가 무식하게 밀어붙여 당황하긴 했지만
그 녀석의 자만감이 결국 화가 되어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았는가?
“무식한 인간 놈 같으니… 퉷! 이 정도로 당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야.”
입가에 남아 있던 핏덩이를 내뱉는 홍해아.
그는 손우진이 복숭아로 회복하기 전에 해치웠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승리한 것은 본인이니 괘념치 않기로 했다.
처음 계획이었던 제천대성의 제자 영입은 물 건너갔지만 차기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이미 아버지의 대업에 가장 큰 방해 요소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스산하게 불타고 있는 불꽃을 뒤로하고 홍해아는 거처로 돌아가기로 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홍해아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멈춰서 버렸다.
그의 고개는 삼매진화가 계속해서 불타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건 말도 안 돼…”
“그 뽀글이 친구, 꽤 듣기 좋은 말을 만들었더군.”
“어떻게 삼매진화를 바로 코앞에서 뒤집어쓰고도 살아있는 것이냐!”
“완전히 이 몸을 위한 칭호이지 않나!”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거침없이 걸어나오는 이.
손우진이다.
하지만 평소의 손우진과는 사뭇 다르다.
건들거리는 모습과 다소 오만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 꼬맹이 친구… 상황을 보아하니 네가 이 몸뚱이의 주인을 애먹인 거겠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쯧쯧. 심히 불손한 자 같으니.”
“커억!”
홍해아는 자신을 눌러 찍는 기운에 절로 무릎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인간 놈이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이런 무지막지한 요기를 풍기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요기는 과거에 마주친 적이 있다.
“끄으윽! 네놈이 어떻게!!!”
빠각!
손우진은 들고 있는 여의로 홍해아의 머리를 내리치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홍해아가
충격을 받고 털썩 쓰러졌다.
“버르장머리 하고는. 내가 네 친구냐? 응? 더 쥐어 터져 볼래?”
“끄아아악! 커헉!”
삼매진화를 사용하느라 몸도 성치 않은 상황에 여의금고봉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은 홍해아.
그 충격으로 인해서 입에선 피가 절로 토해져 나왔다.
저 말투며, 요기며, 무식한 손버릇.
과거의 악몽이 스멀스멀 홍해아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저런 행동거지를 할 놈은 한 명뿐이다.
손오공!
홍해아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정체 모를 손우진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여의를 들어올렸다.
그 낌새를 눈치챈 홍해아가 다급하게 말을 꺼내왔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라!”
“기다려라?”
“…제발 기다려주십시오!”
“큭큭. 그래, 그 정도 태도라면 들어줄 수 있지. 짖어 봐.”
“크윽…”
홍해아는 굴욕감을 속으로 씹을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만 손우진이 속 안에 들어있는 저놈의 정체가 제천대성 시절의 손오공이 맞다면
최대한 비굴하게 굴어야 한다.
조카뻘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개망나니 시절의 제천대성이 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놈에겐 자비심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제천대성 손오공 맞습니까?”
“호오! 처음 보는 아해가 어찌 나를 알아봤을꼬! 너, 진작에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구나?”
자신의 가설이 확실해졌다.
홍해아는 저 육신에 들어가 있는 영혼이 제천대성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원래의 주인인 손우진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당신이 들어가 있는 육신의 주인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놈은 분명 불타 죽었을 텐데!”
“흐흐 목숨을 노리는 사이였군? 무슨 조화가 일어난 것인지는 이 몸도 알 수 없다. 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불구덩이 속에서 깨어나 아주 기분이 나쁠 뿐이야.”
“그렇다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천대성이시여!”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으니 짧게 끝내.”
“저는 평천대성 우마왕의 적장자 홍해아입니다!”
“호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