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되풀이
* * *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 아휴, 그거 참 고생이 심하셨습니다.”
“후우… 그래도 오공 군에게 털어놓으니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삼장법사님의 하소연이 어느새 끝났나 보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우선은 이곳에서 탈출부터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탈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법사님을 꼬드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말이죠, 이거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걱정부터 앞섭니다.”
“예?”
“서천은 까마득하게 먼 곳인데 초장부터 이런 큰일을 당하셨으니… 조심스럽게 말하는 건데 포기하시는 게 어떠신지?”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유약하던 인상이 한순간에 변화한다.
승려의 눈에는 곧은 심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흐음…’
이렇게 유약해 보여도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될 성인?人이라는 건가.
마음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포기를 종용해봤지만 단호한 거절이 되돌아왔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도술에 꽤 소질이 있는데 봉인만 풀어주신다면 구름을 타고…”
“오공 군. 그것 역시 안 되는 일입니다.”
내 또 다른 제안에도 고개를 젓는 삼장법사님.
이것들은 모두 원전에서도 스승님이 제안했던 것들이다.
역시나 이야기의 큰 틀은 변하지 않나 보다.
“왜요? 그냥 경전 하나 구하러 가는 길 아니었습니까?”
“시작은 그러했지요. 하지만 관세음보살께서 제게 내리신 명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 참 깐깐도 하셔라.”
“그런데 오공 군은 이 오행산에 오랜 시간 동안 갇혀있었을 텐데… 어찌 그런 자세한 것까지 알고 있습니까?”
“어 그게 말이죠… 하하! 법사님, 제가 누굽니까? 한때 천계를 들쑤시고 다닌 대요괴 제천대성 아닙니까? 제 귀는 항상 열려 있지요.”
“오호! 오공 군은 정말로 신통한 면이 있었군요.”
본의 아니게 과거의 인물에게 정체를 들킬 뻔했네.
사람 좋은 법사님은 얼토당토않은 내 답변에 설득당한 모양이다.
“그러면 법사님,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또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거라면…”
“아뇨! 법사님의 깊은 불심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도 이 상태로 서천행은 큰 무리라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끄응…”
근심이 섞인 신음을 내뱉는 삼장법사님.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대신에! 이 손우진이 법사님의 서천행에 함께 하겠습니다.”
“손우진?”
“아하하! 오공이요 오공 내 정신 좀 봐.”
“예? 아니 그게 무슨…”
“이 손오공, 사실 오행산에 갇히게 된 이후로 제가 저지른 사고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구라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내 혓바닥.
이 순진한 승려를 구워삶아야지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으니 열심히 아가리를 놀려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부처의 뜻을 따르는 법사님을 만나게 된 것은 드디어 제게도 속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삼장법사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최대한 불쌍하고 순진한 눈망울을 유지한 채로.
“법사님. 부디 제게 한 번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오오! 오공 군! 당신도 드디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된 것이군요!”
삼장법사께서 내가 내민 손을 덥석 붙잡는다.
‘거의 다 왔다!’
이제 허락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서 그 입으로 주문을 외워 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십시오!
“…”
“법사님?”
들려오지 않는 대답.
나는 무언가 기류가 이상한 것을 느껴 내 손을 붙잡은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삼장법사님은 입을 뻐끔 벌린 채로 움직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저기요? 여보세요? 뭐여 이게. 대체 뭔데!”
그대는 어디에 던져 놓아도 생존할 수 있겠군요.
그때 하늘에서 아주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세음보살!”
손우진, 도와주러 온 이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헤헤 보살님, 알고 계셨습니까?”
당신은 정말…
스승님의 이름을 빌려서 이번 기회에 까불어 볼까 했는데 한방에 무산된 나의 꿈.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제가 왜 과거의 시간대에 있는 스승님의 몸에 들어온 건가요.”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설명할게요. 이곳은 현실이 아닙니다.
“네?”
당신의 육신은 현재 다른 세계에서 온 또 다른 오공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다른 세계의 스승님이라뇨!”
이곳은 그의 심상 세계… 를 찾아… 빠져…
“보살님!”
하늘에서 들려오던 관세음보살님의 목소리가 뜨문뜨문 끊기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그 목소리마저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나를 찾아온 성좌 관세음보살.
그녀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죽기 전에 기아스의 맹약이 발동한 건가?
다른 세계의 스승님이 내 몸을 차지했다니 그건 또 뭔 일인데?
“대체 뭐냐고…”
“함께 합시다!”
“깜짝이야!”
이 세계를 찾아왔던 관세음보살님의 영향력이 사라지자마자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나 보다.
삼장법사께선 때늦은 대답을 내게 들려주었다.
“어이쿠! 너무 놀라는 거 아닙니까? 오공 군.”
“…하하.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러는 겁니다.”
기존의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삼장법사의 도움으로 오행산에서 탈출한 뒤 뒷일을 생각해보려 했는데 정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다시 한번 천축을 다녀오게 생겼다.
일단 확실한 건 내 몸을 차지하고 있다는 또 다른 스승님이 홍해아를 잡아두고 있을 것이라는 점.
그 둘은 아주 상성이 좋지 못하니 싸울 것이 뻔하다.
그때 동안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옴 마니 반메 훔…”
“씨발 개 좆같은 세상…”
“오공 군.”
“죄송합니다…”
오행산의 봉인 부적을 떼기 전에 염불을 외우던 법사님이 내게 꾸중을 한다.
귀도 밝은 양반 같으니라고…
삼장법사님의 꾸중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땅에 푹 처박았다.
나의 광대 짓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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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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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공 군, 자유를 되찾은 기분은 어떠합니까?”
“끄응! 뭐, 나쁘진 않네요.”
저 무거운 산을 수백 년 동안 짊어지고 있던 스승의 노고를 직접 체험시켜 줄 줄이야.
또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스승의 사랑에 이가 갈린다.
“그런데 법사님. 법사님 눈에는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어떻게 보이다뇨? 이곳엔 참회하는 바른 청년만이…”
“아니 은유적인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겉모습을 애기하는 겁니다.”
“음… 사실 이런 훤칠한 청년의 정체가 손오공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땐 깜짝 놀랐지 뭡니까?”
“……”
법사님의 말을 듣고 얼굴을 더듬어 봤지만 평소의 내 얼굴 형태와 일치하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괴인 스승님 몸뚱이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건가.
“우선 사부님.”
“예? 오공 군, 사부라뇨 그게 무슨.”
“저를 꺼내 주신 은사님께 사실 사부라는 호칭은 과소하지요. 하지만 그 은혜를 생각해 저는 법사님을 사부로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허허!”
“사부님께서도 말을 낮추시지요.”
“큼! 그래도 되나 오공?”
“어휴 그럼요.”
이 울보 법사님의 비위를 잔뜩 맞춰 준 다음 나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사부님… 현재 자금이 어느 정도 남아 계십니까?”
“…그게 말이지 오공 군, 요괴들의 습격으로 인해서 내게 남은 것은 이 백마 한 필이 전부라네.”
사실 이 백마 한 필이라도 건진 게 다행이지 보통의 승려였다면 종자들이 잡아 먹힌 시점에서 사이좋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삼장법사께서 쌓은 전생과 현생의 공덕으로 인해 수많은 신들이 보살펴주고 있으니 망정이지
어떻게 보면 운빨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인간에게 자금줄을 맡겼다간 파국의 시작이다.
이 좆같은 천축행을 두 번이나 다시 떠나는 숙련자 입장에서 궁핍하게 다니고 싶진 않다.
“허어! 이 제자에게 할 일을 주시려고 했던 통찰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응?”
“역시 사부님은 삼장법사라 불리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 그런가? 하하! 금칠이 너무 과하네, 오공 군.”
“우선은 이 기분 나쁜 산에서 내려가시지요. 내려가면서 제가 계획을 하나하나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일단은 내려가고 얘기하도록 하세.”
나는 삼장법사님을 백마에 태운 뒤 말의 고삐를 쥐고선 오행산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중간중간 삼장법사님의 법력에 이끌린 요괴 놈들이 한둘 튀어나왔지만
내 사심이 가득 담긴 꿀밤에 쥐어 터진 다음 호다닥 도망쳐버렸다.
법사님께선 그것을 보시고선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 태도가 아주 훌륭하다며 칭찬해주셨지만 말이다.
나로선 원전의 이야기를 전부 꿰뚫고 있으니 우리 스승님과는 달리 살생을 피한 것이다.
괜히 트집 잡힐 일을 내가 멍청하게 할 리가 없지 않나.
정답지를 모두 보고 온 놈이 문제를 틀리면 그놈이 병신이다.
“오공 군, 그래서 그 계획이라는 게 대체 뭔가?”
“예. 부처의 뜻을 따르는 사부님께선 재화를 탐내시면 안 되지만 저는 아니지 않습니까?”
“으음… 오공 자네도 나를 따라서 불가에 입적한 것이 아니었나?”
“어휴 사부님. 제가 사부님의 큰 은혜에 감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또 다른 얘기죠.”
“흐음…”
“미숙한 저는 수행이 부족해 아직 절 봉인한 펑키파마… 아니 붓다를 섬길 생각은 없습니다.”
“… 그리 듣고 보니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 알겠네, 자네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내게 주어진 또 다른 고행이겠지.”
손우진이 아닌 손오공의 입장에서 행동하려 하니 개소리와 거짓말이 아주 절로 나온다.
나쁜 짓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했는데 평소에 단련해둔 주둥아리가 매끄럽게 일을 해낸다.
“저는 사부님의 고행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저만의 방법으로 재화를 모을 생각입니다.”
“그게 어떤 방법인가?”
“큰손들의 힘을 빌려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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