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성폭행 학원 강사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바람에 운영하던 학원은 공중분해 되었다.
스타강사로 이름 날리며 번 돈은 명문가와 결혼하는 동생들의 결혼 비용과 학원 폐업으로 인한 손해배상으로 모두 날려버렸다.
건우를 성폭행범이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웠던 여학생의 아버지에게 염산 테러를 당해 얼굴은 흉측하게 변했다.
더 이상의 사회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20살부터 40살이 넘을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동생들을 돌보았지만, 건우가 힘들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있어주지 않았다.
세상이 증오스러웠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걸까?
동생들이 미웠다.
자식처럼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정말 헌신적으로 살았는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그렇게 일찍 돌아가셔서 준비도 안 된, 고작 20살의 나이에 동생들을 키워야 했는지.
“콜록콜록.”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골방에 누워 기침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건우를 고소했던 여학생의 집안은 정말 가난했다. 소송을 걸어봤자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동생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아무도 모르게 살던 집을 처분하고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물론 동생들에게는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사를 했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외로웠다.
힘들었다.
고독했다.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가 또 슬퍼졌다.
어느 순간 밥을 먹을 힘조차 없어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생기지 않았다.
생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냥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미웠던 동생들도 그리웠다.
왠지 모르게 원망하는 마음이 옅어져 갔다.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이 그렇게 변한 것도 결국 내가 잘못 키워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죄송했다.
그리고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겨우 20살이었다.
겨우 20살….
난 겨우….
그는 그렇게 작은 골방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고독사였다.
***
“으아앙, 으아앙.”
건우는 귀를 뚫고 들어오는 요란한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 전 이사했던 작은 골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방이 낯설면서도 왠지 익숙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꿈인가 싶어 무의식적으로 얼굴과 몸을 더듬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으아앙, 으아앙.”
그 와중에 문밖에서 들려오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대체 누가 저렇게 구슬프게 우나 싶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이 나왔다. 거실 또한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거실 구석 소파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펑펑 울고 있었고, 두 명의 소년이 어쩔 줄 몰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인지 세 쌍의 눈동자가 건우에게 향했다.
그와 그들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큰오빠, 으아앙.”
어린 여자아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큰오빠’라고 외치며 그에게 달려왔다. 무의식중에 그녀를 안았다.
어리둥절하고 황당했다. 정신을 차리고 여자아이와 두 소년을 찬찬히 살폈다.
‘맙소사.’
어이없게도 20여 년 전 어린 모습의 그의 동생들이었다.
아무리 강산이 두 번씩이나 변할 만큼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귀엽고 앳된 동생들의 모습은 잊을 수 없었다.
“꿈이구나. 죽은 줄 알았는데 꿈을 꾸고 있구나. 동생들을 그리워하다 보니 이런 꿈을 다 꾸는구나.”
“훌쩍. 꿈이라니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훌쩍.”
품에 안겨 건우의 혼잣말을 들은 막내 은우가 훌쩍이며 물었다.
“아니야. 꿈을 꾸느라 우리 은우가 우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오빠가 미안해. 그런데 우리 은우 왜 울고 있었어?”
꿈에서지만 어린 막내를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웠다. 죽기 전에 꾸는 마지막 꿈이라면 즐기고 싶었다.
“배고파. 히잉.”
“배가 고파? 엄마는 어디 갔길래 우리 은우 배가 고파?”
“훌쩍훌쩍. 엄마 있어? 엄마 없는데. 오빠가 그랬잖아. 엄마아빠 하늘나라 갔다고. 그래서 오랫동안 은우 만나러 못 온다고.”
아차 싶었다.
하필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상황을 꿈꾸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일곱 살인 막내에게 죽음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래서 부모님은 하늘나라 가셨고, 쉽게 만나기 힘든 거리에 있다고 설명했던 기억이 났다.
“그랬지. 미안해. 오빠가 엄마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엉뚱한 소리를 했네.”
“히잉. 엄마아빠 보고 싶다. 으아앙. 엄마. 으아앙. 아빠.”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은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예전 스무 살의 그였다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지금의 건우는 10년 넘게 동생들을 돌본 베테랑이었다.
“은우야. 울지 마. 오빠가 얼른 맛있는 밥 만들어 줄게. 은우가 좋아하는 계란프라이랑 치즈 계란말이 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계란? 웅. 알았어. 빨리빨리 해줘.”
울음을 그친 은우를 뒤로 하고 재빨리 주방으로 향했다.
쌀을 깨끗이 씻고, 밥통에 올렸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본적인 음식재료들은 있었지만, 채소들은 오래 방치되어서 그런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나마 감자와 양파는 상태가 괜찮았다. 냄비에 물을 담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불을 켰다. 그다음 능숙하게 계란을 풀고 치즈를 섞은 다음 두툼한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둔 냄비의 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다. 다시마를 건지고 냄비는 계속 끓게 두었다.
김치통을 꺼내 물에 살짝 씻은 후 막내가 먹기 좋게 잘라서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약하게 불을 켰다.
기름을 살짝 두른 다음 프라이팬에 기름이 잘 묻어나게 키친타올로 문지르듯 닦아냈다.
동그란 모양을 유지한 완숙을 좋아하는 은우, 노른자를 터트려서 익힌 프라이를 좋아하는 정우, 반숙을 좋아하는 동우.
각자의 취향에 맞게 능숙하게 계란프라이를 만들었다.
그사이 끓고 있는 냄비에서 멸치도 건져낸 다음 적당히 썬 감자와 양파를 넣고 조선간장을 넣고 후추를 살짝 뿌렸다.
마지막으로 계란을 풀어주면 감잣국 완성.
삐빅.
냄비 속의 감자가 익을 때 즈음 전기밥통에서 취사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후후. 오늘도 밥과 동시에 반찬이 완성되었네.’
꿈이지만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동생들을 위해 하는 요리였다.
처음 음식을 만들 때만 해도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지금의 건우에게는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쉬운 요리일 뿐이었다.
밥과 국을 그릇에 담고 작은 접시에 각자의 취향에 맞는 계란 프라이를 옮겨 상을 차렸다.
처음에 만들어 놓은 계란말이도 식탁 가운데 두고 고개를 드니 동생들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우와. 큰오빠 짱.”
감탄하는 은우.
“큰형. 미국에서 혼자 살았다더니 요리 실력 많이 늘었네.”
능숙한 요리 솜씨를 단지 미국에서 생활한 덕분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정우.
“그나저나 어떻게 우리 계란프라이 취향까지 알고 있는 거야?”
누가 미래(?)의 검사 아니랄까 봐 예리한 질문을 날리는 동우.
“아… 그게. 있지. 엄마가 전화로 맨날 너희 먹는 이야기를 하셨거든. 하도 자주 들었더니 너희 식성이 귀에 박혀버렸네. 너희도 참 어지간하다. 계란프라이 하나도 그렇게나 식성이 다르니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겠어?”
능숙한 요리 솜씨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주절주절 둘러대다가 실수로 엄마 이야기를 꺼냈고, 식탁 위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사실 건우는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쩝쩝. 우와 오빠. 계란프라이도 맛있고, 치즈 계란말이도 맛있어. 작은 오빠, 막내 오빠도 얼른 먹어봐.”
그래도 다행히 철없는 어린 막내 덕분에 분위기는 금방 회복되었다.
동생들은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다.
맛없을 리가 없었다. 학원 강사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아침 식사는 꼭 건우가 챙겼고, 그러다 보니 동생들 식성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동안 꿨던 꿈과는 뭔지 모르게 달랐다.
지금 꾸고 있는 꿈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촉감도 느껴졌고, 식감이나 냄새도 현실에 가까웠다.
의대를 진학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생물학을, 그것도 수석으로 이수한 과학도였다.
그런 그도 지금 겪고 있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대체 뭘까? 꿈을 총천연색으로 꾸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촉각과 후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이게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일인가? 혹시 죽음을 앞두고 꾸는 마지막 꿈은 이렇게 생생한 건가? 이런 꿈을 마지막으로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고….’
그리 설득력 없는 이론이었지만, 성격상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을 정당화시키지 않고는 꿈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 너무너무 생생했다.
그립고 아련했다. 알 수 없는 뿌듯함에 눈물이 날 뻔했다. 이 자리에서 괜히 눈물을 보였다가는 식사 분위기를 망칠 수 있어 겨우겨우 참았다.
이 꿈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지만 최대한 많이, 최대한 길게 꾸었으면 하는 게 지금 그의 바람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제일 먼저 알아본 일은 자신이 꾸고 있는 꿈속의 정확한 시간이었다.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휴대전화가 자고 있던 방에 놓여 있었고, 홈버튼을 누르자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지며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2014년 9월 7일 오전 10시 30분.’
날짜를 보니 예전 기억이 돌아왔다. 부모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할머니는 몸져누우셨고, 고모는 혹시라도 큰일이 생길까 봐 할머니 댁에 머물렀다.
사정은 외가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슬픔과 비탄에 빠져 미처 건우와 그들 남매를 챙기지 못했다.
아침에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막내를 위해 어렵게 밥을 지었지만, 미국에서 매일 식당을 이용했던 그가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리 만무했다.
맛없는 반찬들 때문에 은우가 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엄마를 다시 불러오라며 생떼를 부리는 바람에 4남매가 얼싸안고 울음을 터트렸었다.
건우가 친척들과 부모님 친구들의 도움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이유가 바로 이날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서러움.
세상천지에 4남매만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위기감.
막내가 배고파 우는데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무력감.
이런 감정의 조각들이 친지들에 대한 서운함을 넘어서서 원망으로 번져버렸다.
평소라면 이런 감정기복은 없었을 테지만, 부모님을 잃었다는 절망감이 그를 평소와 다른 조금은 편협한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마흔이 넘어 돌이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친척들은 너무도 충격이 컸었고, 부모님의 지인들은 친척들이 알아서 챙기리라 믿었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자식을 잃는 경험, 오빠나 동생을 잃는 아픔, 친구를 잃는 아픔.
그런 큰 아픔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당연히 경황이 없었을 것이고 4남매에 대해 잠시 잊었다고 해서 서운해하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었다.
“그땐 나도 많이 어렸구나.”
건우는 예전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땐 정말 세상 무서울 것 없었다. 주변에서 수재다 천재다 치켜세워주니 자신이 정말 잘났다고 믿었었다.
조금 거만한 모습도 있었을 테고, 공부만 잘했을 뿐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
꿈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놀라고 미안한 얼굴로 황급히 찾아온 고모를 보며 ‘내가 다 할 수 있다. 알아서 한다’며 어쩌면 매몰차게 느껴질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돌려보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가시가 돋친 반응을 했는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고모는 예전 기억과 똑같이 놀라고 미안한 얼굴로 황급히 그들을 찾아왔다.
“미안해. 할머니가 앓아누우셔서 거기에 신경 쓰느라 너희 밥 챙겨줄 생각도 못 했네. 고모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 배고팠지? 내가 얼른 밥해줄게.”
문을 열어주자마자 밥부터 챙겨주려는 고모의 고마운 모습이 그때는 왜 그렇게 미웠을까?
고모 나이 고작 서른아홉 살. 마흔 살까지 살았던 건우보다 어렸던 그녀. 첫사랑의 아픈 실패 후 결혼도 하지 않고 할머니를 모시며 열심히 살았던 사람.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항상 고모에게 고맙고 미안해했었다. 당신이 모셔야 할 할머니를 고모가 모시고 있어서 미안했고, 마흔 가까운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인 모습이 안쓰럽고 애틋하다고 하셨다.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왔다. 스무 살 나이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마흔이 되어서 보니 그녀는 아직 젊고 예뻤다.
그리고 착했다. 그런 고모의 마음에 대못을 박듯 차갑게 돌려보냈으니,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왜 그렇게 물끄러미 봐?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고모가 너무 놀란 눈을 하고 있어서.”
“그럼 놀라지. 안 놀라? 너희 할머니가 정신 차리자마자 그러시더라. 지금 내가 여기 있으면 애들 밥은 누가 챙겨주냐고.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달려온 거야. 많이 배고팠지? 고모가 미안해.”
고모가 미안해.
그 말에 가슴이 찌릿찌릿해졌다.
형이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
건우가 항상 동생들에게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진실 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동병상련을 느껴서일까? 갑자기 눈물을 쏟을 뻔했다.
눈물을 참으며 고모가 들고 있는 찬거리 봉투부터 건네받았다.
“할머니가 아프신데 당연히 돌봐드렸어야지. 그리고 밥은 걱정하지 마. 고모는 몰랐겠지만, 미국에서 자취생활 하면서 요리 솜씨 엄청나게 늘었으니까.”
“뭐? 건우 네가 요리를?”
“그럼. 왜? 내가 요리를 한다니까 이상해?”
“당연히 이상하지. 언니가 너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얼마나 걱정했는데. 세상에 공부밖에 모르는 샌님 최건우가 요리라니. 언니오빠가 이 사실을 알면 정말 편히 눈감으시겠다. 흑. 크흠. 어머. 주책없게 내가 왜 이러니.”
마흔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 감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건우가 요리했다는 이야기에 놀랐다.
그리고 건우의 얼굴을 보다 죽은 오빠의 얼굴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동생들도 고모도 부모님의 죽음이 주는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건우도 가슴이 아팠지만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마음이 무뎌졌다.
“그러게. 주책없이 왜 울고 그래. 고모 울면 애들도 울 거야. 그러니까 그만 울고. 식사 전이지? 어서 큰조카가 만든 스페셜한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그래. 조카들 앞에서 고모가 울면 안 되지. 더군다나 은우도 있는데. 어휴. 우리 건우가 언제 이렇게 듬직해졌을까? 그럼 큰조카가 만든 스페셜한 아침 한번 먹어볼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식탁이 있는 주방으로 향하는 고모의 모습이 짠했다.
‘원래 이렇게 돼야 했었는데. 그렇구나. 이게 내가 꿈을 꾸는 이유구나. 살아오면서 후회스러웠던 일들은 모두 털어버리라고. 훌훌 털어버리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라고 이런 꿈을 꾸는구나. 그동안은 믿지 않았지만, 어쩌면 정말 신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에 이런 꿈을 꿀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짧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겠지만 꿈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맛있다. 된장국이 어쩜 이렇게 담백해? 게다가 이 계란찜은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어? 세상에. 이건 오믈렛이네. 이런 귀여운 오믈렛이 다 있어? 정말 맛있어 보인다.”
고모는 자리에 앉자마자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고모 안 돼. 이건 큰오빠가 은우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거야. 그지 큰오빠?”
“그럼. 은우를 위해 만든 특별한 오믈렛이지. 그래서 동우랑 정우도 입맛만 다시고 못 먹잖아.”
“그것 봐, 고모. 이건 내 거니까 다른 것 먹어.”
“흑흑. 은우야. 고모가 이 오믈렛 정말정말 먹고 싶은데. 딱 한입만 먹으면 안 될까?”
“음… 그래 좋아. 대신 딱 한입만 먹어야 해.”
“와! 고마워. 은우야. 역시 우리 은우는 착하다니까. 어디 그럼. 음… 우와. 정말 맛있다. 어쩜 나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것 같아. 그런데 건우야.”
“왜?”
은우 몫으로 만든 귀여운 오믈렛을 뺏어(?)먹던 고모는 음식을 먹다 말고 건우를 불렀다.
“너 미국에서 공부는 안 하고 요리만 했니?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해. 이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봐. 너 사실은 하버드대 의대에 다니는 게 아니라 어디 요리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거지? 응?”
“하여간 빈약한 상상력 하고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매일 식당 밥만 먹다 보니 허기가 져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인터넷 찾아보며 이것저것 레시피 찾아보며 만들어 먹었어. 그러니까 맛있으면 그냥 맛있다고 해. 멀쩡한 의대생을 요리지망생으로 둔갑시키지 말고.”
“으앙. 고모 나빠.”
“윽! 은우야 왜 울어? 고모가 왜?”
“고모가 은우 꺼 세 번 먹었어. 내가 한 번만 먹으라고 했는데. 치. 고모 나빠. 으아앙.”
“호호호. 이를 어떡해. 은우야 미안. 오믈렛이 너무 맛있다 보니 자꾸 먹었네. 어쩌지. 미안해. 고모가 미안해. 대신 밥 다 먹으면 비요뜨 먹자. 고모가 우리 은우 좋아하는 비요뜨 사왔거든.”
“비요뜨? 비요뜨 뭐?”
“당연히 비요뜨 초코링이지. 우리 은우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히히. 그래. 알았어. 고모. 그럼 은우 밥 한 번 더 먹어도 돼.”
“뭐? 아이고. 우리 귀여운 은우. 고마워. 호호호.”
고모와 은우가 정겹게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동우와 정우도 마찬가지인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처음 느껴본 따뜻한 온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