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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가라사대-3화 (3/256)

제3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꿈을 꾸기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매일매일 행복해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또한 언제 이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 매일매일 불안해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건우는 자기가 꾸고 있는 꿈이 진짜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죽기 전에 꾸는 꿈이라서 이렇듯 생생하다고 가정을 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오감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꿈이라니 이게 있을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이렇게 오래도록 꿈을 꾸는 게 가능하긴 한 거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납득해야 하지. 난 분명 죽었는데.

아니, 죽어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꿈을 꾼다는 건 살아있다는 의미잖아.

그럼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건가?

아니지. 아니야. 혼수상태라면 이렇게 완벽한 오감을 느끼는 꿈을 꿀 리가 없지.

그럼 대체 뭐지? 꿈이 아닐 수도 있는 건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잖아.

설마 이전에 겪었던 기억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던 건가?

그 고통스럽고 참담했던 기억이 전부 꿈이라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그 기억들이 전부 꿈일 수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이 대체 뭐야?’

“뉴스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낮 12시경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 중이던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입니다.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인이 탑승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탑승자는 모두….”

“283명”

“283명이며 전원 사망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던 건우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숫자가 튀어나왔다.

한번 보면 사진을 찍듯 모두 기억하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세 번 보고 들으면 완벽하게 암기하는 정도의 기억력은 가지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항상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요행수에 가까운 로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큼지막한 사건사고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014년 9월에 있었던 비행기 사고에 대해서도.

“그래 283명. 숫자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내가 지금껏 겪었던 기억은 전부 사실이라는 의미잖아. 설마 회귀…는 말이 안 되고. 결국, 지금 나는 과거로 돌아간 꿈을 꾸고 있다는 이야기네. 꿈이라. 꿈.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행복하지만 불안한 꿈.”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가정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건우는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그리고 후회가 남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지나고 어느덧 꿈을 꾸기 시작한 지 20일이 지났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봐야 정신병자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했다.

이전 시간이 꿈이든, 지금이 꿈이든. 이전 시간이 데자뷔든, 아니면 정말 미친 생각이지만 지금 그가 과거로 회귀한 것이든.

이제 사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건우가 있는 세상이 현실이면 좋겠지만,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설사 꿈이라고 해도 벌써 20일이 지났다. 그렇다는 건 이 꿈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현실이든 아니든 지금 세상은 그에게 계속 지내야 할 곳이다. 꿈에서 깬다고 해도 죽기밖에 더하겠나?

이제부터는 이 세계가 현실이다 생각하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아쉽겠지만, 혹시라도 현실이라면 예전처럼 불우한 마지막을 맞고 싶지 않았다.

아니, 꿈이라고 해도 꿈에서만큼은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동생들을 고모에게 부탁하고 부모님이 계신 납골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앞에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어요. 두 분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네요. 그런데 정말 이상해요. 마지막으로 봤던 사진은 누렇게 색이 바랬는데, 지금 보고 있는 사진은 거의 새 사진이네요. 아! 낯설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정말 오랜만이다. 성폭행범 누명을 쓴 이후로는 처음이니까.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저, 지금 굉장히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요.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라 저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어요.”

“다행히 지금은 결심했어요. 꿈이든 현실이든 열심히 살아보려고요. 예전처럼 바보같이 말고.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요.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보고 싶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동생들을 잘못 키워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 가지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공부만 잘하면 훌륭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 생각이 틀렸더라고요.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계속 자랐으면 그렇게 못나게 크지 않았을 텐데. 결국, 제가 부족했나 봐요. 그래도 이해해주세요. 어렸잖아요. 겨우 스무 살이었어요. 뭐가 중요한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실수하지 않으려고요. 솔직히 이번에는 동생이고 뭐고 다 버려버리고 제 꿈이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버릴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 잘못이잖아요. 제가 잘못 키워놓고 누굴 원망하겠어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 도망 안 가요. 이번에는 정말 잘 키워보고 싶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흐뭇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 지금 너무 억울해요.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상황이 꿈이든 현실이든, 왜 하필 지금이에요. 며칠만 앞당겼으면 두 분 다 돌아가실 일도 없었잖아요. 흑흑. 돌아가는 김에 며칠만 더 빨랐으면 우리 가족 불행한 일도 겪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잖아요.”

“아버지, 어머니 정말 보고 싶어요. 지금 제 기분이요. 두 분 버리고 혼자 살아 돌아온 느낌이에요. 그래서 너무너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흑흑.”

부모님의 사진 앞에서 한참을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건우는 어느 순간 슬픔을 이기지 못하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건우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만 있었다.

***

“큰오빠. 으아앙”

납골당에서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자 은우가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뛰어와 안겼다.

“어이쿠. 우리 은우. 왜. 누가 우리 은우 울렸어?”

“으이이잉. 큰오빠!”

“왜 그래. 은우야.”

“큰오빠 어디 안 가지?”

“응? 내가 어딜 가? 왜. 누가 뭐라 그래?”

“응. 고모가 아까 전화로 그랬어. 큰오빠 미국 가야 한다고. 근데 안 갈 거지. 응? 엄마, 아빠처럼 멀리 가면 안 돼. 알았지!”

“그럼 당연하지. 오빠가 이렇게 예쁜 우리 은우를 두고 어딜 가겠어. 걱정하지 마. 아무 데도 안 갈 테니까.”

울고 있는 은우를 달래며 고개를 들어보니 동우와 정우도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더 이상 부모님도 안 계신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건우밖에 없는데, 혹시라도 건우가 미국으로 갈까 봐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미안해, 건우야. 아까 너희 할머니와 잠깐 통화를 했는데, 그걸 애들이 들었나 봐. 내가 조심성 없이 전화하는 바람에 밥도 안 먹고 너 오기만을 기다리더라.”

울먹이는 은우를 보며 고모가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응.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네. 안 그래도 대학 문제 때문에 어른들하고 상의하려고 했어. 고모가 할머니랑 외할머니 그리고 외삼촌 좀 불러줘. 내가 찾아봬야겠지만, 애들 두고 어딜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

몇 시간 후 할머니와 외할머니, 외삼촌 그리고 외숙모까지 집에 모였다.

동생들은 밖에서 놀게 하고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으나 은우가 도무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그냥 다 같이 의논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서 건우의 거취 문제에 대해 의논을 나눴던 적이 없었다. 그냥 남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만 했다.

외삼촌과 고모, 그리고 부모님의 친구분들까지 그를 도와주겠다며 미국으로 떠나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아예 만남 자체를 거부했었다.

“우리를 모이라고 한 것 보니, 너도 네 거취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이 끝났나 보네.”

다들 모이자 외삼촌이 대표로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아까 고모에게 얼핏 들었지만, 어른들은 제가 미국으로 돌아가길 원하시는 것 같네요.”

“그렇지. 솔직히 아깝지 않으냐? 그냥 의대도 아니고 하버드대 의대다. 그곳에서 몇 년만 고생하면 세계적인 의사가 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팽개칠 생각은 아니지? 네가 걱정하는 게 학비라면, 그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나나 네 고모도 어느 정도 모아둔 돈이 있고, 너희 아버지 친구들도 도움을 주겠다고 하더구나.”

고마웠다.

외삼촌의 표정은 진심으로 건우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고마운 분들을 멀리했던 자신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우도 눈치는 있는지 외삼촌의 발언에도 나서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지 건우의 오른손을 양손을 꼭 쥐고 뚫어져라 그의 입술만 쳐다봤다.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안 가겠습니다.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한국에 남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미국을 간다고 해도, 동생 걱정에 공부도 못하고 고민만 할 거예요. 그리고 제가 있는데, 동생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희 할머니, 외할머니, 외삼촌, 고모다. 그런데도 못 미더운 거야?”

“아니요. 미덥고 못 미덥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습니다.”

“휴… 그래. 네 성격은 나도 알고 있으니 한국에 남겠다고 결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면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설마 돈 벌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아서라. 그 좋은 머리를 그냥 썩히면 그것도 죄야. 알아보니 서울대 의대 학사 편입 접수가 며칠 후부터 있다고 하더구나. 준비기간이 짧겠지만, 네 경력이나 머리로 거길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네 생각은 어떠냐?”

평소 철두철미한 성격의 외삼촌답게 벌써 국내 대학 편입까지 알아보고 왔다.

하지만 건우는 이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청사진을 이미 만들어 둔 상황이었다.

올해 수능과 비교해보며 확인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향후 20년간의 수능 문제가 담겨 있다.

한국 사교육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생각했을 때 건우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로또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노다지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수능 문제가 그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도, 20년간 학원가에서 명성을 떨쳤던 스타강사로서의 노하우는 사라지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학교는 더 다닐 생각이 없습니다. 돈을 벌 생각입니다.”

“건우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어른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놀랄 만도 했다. 똑똑하고 남들보다 의젓하다고 해도,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그런데 그런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돌보며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할머니, 외할머니.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저 좀 믿어주세요. 저도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문제예요. 제가 지금까지 두 분 실망시켜 드린 적 없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렇지. 우리 장손은 항상 이 할미의 자랑이었지. 내가 우리 손자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누. 안 그래요, 사돈?”

건우의 흔들림 없는 모습에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곧바로 승낙하며 외할머니께 동의를 구했다.

외할머니는 애잔한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한 녀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면, 의논하자며 우릴 부르긴 왜 불러.”

하지만 외삼촌은 많이 서운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외삼촌.”

“왜 불러, 이 녀석아.”

“한국에서 의대 진학하면 앞으로 최소 10년이에요. 10년 동안 자기 앞가림도 못 하고 바빠서 동생들에게 신경도 못 쓰고 살아야 해요. 동우와 정우는 몰라도 은우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에요.”

“뭐가 걱정이야. 너희 외숙모도 있고, 고모도 있는데.”

“외숙모는 사촌 동생들 키우셔야죠. 고모는 직장도 다녀야 하고요. 저도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결정했어요. 어쩌다 보니 통보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앞으로 외삼촌이 많이 도와주세요. 주말에는 사촌 동생들이랑 우리랑 같이 놀러도 다니고요. 네?”

“흠. 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내가 더 이상 뭐라고 하겠어? 그래도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 네 뒤에는 항상 우리가 있다는 사실. 힘들 땐 어려워하지 말고 언제든지 상의하고 도움 청하고. 알았지?”

“그럼요. 고마워요. 외삼촌.”

“외삼초온. 큰오빠한테 화내지 마. 응?”

외삼촌이 언성을 높이자 놀란 은우가 외삼촌 품에 파고 들어가며 애교를 부렸다.

“아…아니야, 은우야. 외삼촌 화낸 거 아니야. 그냥 서운해서 그랬어. 우리 은우 놀랐어?”

“응. 외삼촌 화내니까 이상해. 그런데 그럼 큰오빠는 이제 계속 우리랑 사는 거야?”

“그래. 걱정하지 마. 오빠는 멀리 안 가고 항상 은우 곁에서 살 거니까.”

“히히. 신 난다. 난 우리 큰오빠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단 말이야.”

거취 문제 때문에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은우의 애교로 금방 풀렸다.

건우는 은우의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고모는 잘 따르는 줄 알았지만, 외삼촌하고도 저렇게 친한 줄은 몰랐다. 2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었다.

저렇게 애틋한 삼촌과 조카 관계였는데, 과거 건우의 편협함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 나중에는 교류조차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말로는 최선을 다해 동생들을 돌봤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의 관점에서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뭘 원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고, 지레짐작으로 판단해 행동했으니 동생들의 엇나감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구나. 어쩌면 나는 동생들을 위해 동생들을 돌본 게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해 동생들을 돌봤을지도 모르겠구나. 쯧. 바보같이. 그렇지만 이번엔 절대 그런 실수를 안 할 거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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