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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가라사대-4화 (4/256)

제4화

어떻게 해야 동생들을 좋은 직장을 가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남들이 좋아하는 좋은 사람으로 자라나게 할 수 있을까?

최근 건우의 화두는 바로 동생들의 올바른 육아(?) 방법이다.

특히 둘째 동우는 벌써 고1이다. 그의 인격은 거의 완성 직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지나면 과거에 보았던 그 싸가지 없고 이기적이며 고압적인 모습이 드러날지도 몰랐다.

현실이든 꿈이든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을 때만 해도 다시 산다는 게 굉장히 쉬울 거라 생각했었다.

직장과 집만 오가며 동생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느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잘 모른다고 해도, 20년을 그냥 헛산 것은 아니다.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지식이 있고, 사람을 대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다.

동생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모두 파악하고 있고, 그런 음식들은 이제 눈감고도 만들 수준이다.

그 밖에 빨래나 청소도 전문 가정주부 못지않은 베테랑이다.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뭔가 변화를 주려고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생들의 취향은 알고 있어도,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뭔지는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시작한다는 게 갑자기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무작정 열심히 살았던 과거가 편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또다시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간다면?

자꾸만 과거였던 미래의 기억이 떠올라 건우를 괴롭히고 움츠리게 했다.

“휴. 건우야. 건우야. 고민해봐야 답도 안 나온다. 네가 잘하는 것 있잖아. 책 읽기. 서점가서 육아 관련 책이나 잔뜩 사 와서 읽어보자. 혹시 알아? 거기에 정답이 있을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그는 근처 대형서점으로 가서 육아나 자녀교육 관련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담아 계산을 했다.

건우는 동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책과 함께 고민만 하다가 아침이 가까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번엔 좀 더 엄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

“형. 형. 건우 형 그만 자고 좀 일어나봐. 아이씨, 밥도 안 하고 교복도 안 다려놓고 대체 뭐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열흘 정도가 지났을 때쯤, 동생들은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건우는 동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예전처럼 밥해주고 빨래해주면서 헌신적으로 돌봤었다.

그런데 어제는 고민이 길어져 늦게 잠이 드는 바람에 동생들이 등교할 시간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둘째인 동우는 평소 깔끔한 성격인데, 어제 빨아놨던 교복이 다림질되어있지 않아 쭈글쭈글한 상태로 있자 화가 나서 짜증을 부리며 건우를 깨웠다.

“아, 좀.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음… 응? 동우구나. 헉! 지금 몇 시야?”

피곤함에 힘겹게 눈을 뜨자 창밖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건우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긴 몇 시야. 밖에 환한 거 보면 몰라? 벌써 학교 갈 시간 다 됐잖아!”

“이런! 벌써 그렇게 됐어? 미안해. 내가 어제 뭐 좀 하느라고 늦게 잠들었더니 피곤해서 알람 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아이씨.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당장 학교 가야 하는데 교복도 안 다려놓으면 어쩌라는 거야. 아! 짜증 나.”

“뭐가 어째?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봐!”

“교복도 안 다려놓고 뭐했냐고.”

건우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지만, 동우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다음 말.”

“짜증 난다고. 왜? 밥도 안 차려놓고, 교복도 안 다려놓고.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거친 동우의 말에 순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동생들에 대한 원망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단순히 원망 때문이 아니었다.

동우 입에서 나왔던 저 말. 갑작스레 짜증이 나서 오늘 처음 내뱉은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자주 사용해서 입에 붙은 말에 가까웠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공부가 힘들어 그런지 둘째가 자주 짜증을 부린다고 하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은 괜찮지만, 엄마에게까지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교복? 그러니까 교복이 문제라는 거지? 어디 있어, 교복? 당장 가져와.”

“됐어. 필요 없어. 이제 다려서 언제 입어. 지금 나가야 지각 안 해.”

동우는 건우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교복 타령만 했다.

“최정우.”

“어? 응. 형. 불렀어?”

건우는 동우를 외면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셋째 정우를 불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셋째 정우는 건우의 부름에 후다닥 달려왔다.

“가서 동우 교복 가져와.”

“교…교복? 알았어. 형. 잠깐만 기다려.”

“아, 정말. 됐다고 그러네.”

“넌 입 닥치고 있어. 쥐어터지기 전에.”

“혀…형.”

“입 닥치고 있으라고 이 자식아!”

결국은 건우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나왔다. 동우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는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움찔움찔 입만 벙긋거렸다.

“형! 여기 가져왔어.”

“교복이란 말이지. 교복이 문제란 말이지. 그럼 교복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어?”

정우에게서 동우의 교복을 건네받은 건우는 혼잣말을 하며 옷을 찢기 시작했다. 분노가 담긴 손놀림이 우악스러울 만큼 거칠었다.

부욱! 찌이익!

거친 소리와 함께 교복이 찢겼다.

튼튼해 보이던 검은색 교복은 생각보다 쉽게 찢어졌다.

“형!”

생각지도 못한 건우의 행동에 놀란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건우가 뿜어내는 분노의 아우라가 무서워서 도저히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방문을 열고 나온 은우가 건우의 돌발행동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건우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엄마에게 오늘처럼 짜증을 부렸을 동우에 대한 분노가, 과거 동생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원망의 감정에까지 불을 지펴버렸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결국은 고독사에 이르렀을 때의 그 원망스러움까지!

“최정우”

“응. 아니, 네! 큰형.”

편하게 말을 놓던 정우는 존댓말로 대답할 정도로 바짝 얼었다.

“은우 데리고 작은 방에 가 있어.”

“알았어요. 형”

“동우야”

정우가 은우를 데리고 나가자 건우는 나직한 목소리로 동우를 불렀다.

“어… 형”

겁을 먹은 동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너 엄마한테도 오늘처럼 그렇게 짜증을 부렸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해? 오늘처럼 싸가지 없이 엄마에게 짜증 부리고 그랬냐고!”

“아니. 그…그게. 형 일단 진정부터 하자. 응? 형 지금 정말 많이 흥분했어.”

형의 말에 내심 뜨끔한 동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화난 형을 달래는 게 먼저였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공부만 하느라 물렁살인 동우와 달리, 미국에서 열심히 체력을 키운 건우의 몸은 꽤 단단했다.

이러다가 정말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이 들었다.

“진정?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했어? 그러는 넌? 넌 왜 진정하지 못하고 짜증을 부렸는데? 그깟 교복 좀 안 다렸다고 짜증을 내? 내가 식모야? 대답해봐. 최동우. 내가 네 식모야?”

“아니. 당연히 식모가 아니지. 형은 형이지.”

“그런데 왜 나를 식모 취급해? 응?”

“형을 식모 취급한 게 아니라. 교복아 쭈글쭈글해서 좀 화가 나서 그랬어. 미안해, 형. 이제 부모님도 안 계시고, 고등학교 올라와서 공부할 양이 많아지니까 힘들어서 그랬나 봐.”

“지랄!”

건우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거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형! 지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심하다고? 너 혼자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나는? 정우는? 은우는? 너만 힘들어? 겨우 일곱 살 먹은 은우도 분위기가 이상하면 평소보다 더 애교를 부리고 그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어리광이 좀 늘긴 했어도, 자기가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서 행동한다고. 근데 넌 대체 뭐야? 썩어 빠진 놈 같으니. 너 같은 녀석은 학교 갈 필요도 없어.”

분노가 끓어올라 더는 주체하기 힘들었다.

국가에 대한 소송에서 패했을 때 찾아와 조롱하듯 말하며 소송 포기를 종용했던 30대의 동생이 떠올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동우가 10대의 동우인지 30대의 동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분노는 점점 살기로 변하고 있었다.

“형 때문이잖아.”

갑자기 동우가 울부짖었다. 겁에 질려 아무렇게나 내뱉는 모습이 아니었다.

“뭐? 누구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봐.”

“형 때문이라고. 엄마, 아빠 돌아가신 건 전부 형 때문이라고.”

동우의 신랄한 말에 건우의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던 분노도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나?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내가 모를 것 같아? 잘난 형이 공부한다고 외국 나가서 그런 거잖아. 그냥 국내 대학 갔으면 되는 거지 괜히 외국은 왜 나간 거야! 그것 때문에 등록금 대느라 집 팔고, 그러다가 사기당한 거잖아. 그러니까 전부 형 탓이라고.”

설마 동우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이전 삶에서의 동우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10년 넘게 동생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구나 싶었다.

허무하고, 허탈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전부 내 탓이다?”

“그놈의 장남, 그놈의 장손. 집안이 온통 형 이야기뿐이었어. 형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공부 잘한다고. 전교에서 항상 1, 2등 한다고. 그런데도 할머니나 부모님은 그냥 ‘수고했다’라는 말이 전부였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때도 내가 아니라 항상 형 이야기뿐이었다고.”

“도, 동우야.”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갔다.

폭주 직전이던 건우는 이성을 되찾았는데, 이번에는 동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한이 맺힌 듯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형처럼 아빠,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고! 잠을 줄이고 미친 듯이 노력해서 형만큼, 아니 형보다 더 잘난 아들이 되고 싶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안 계시잖아. 나 좀 자랑해달라고, 날 자랑스럽게 봐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이젠 없다고. 두 분 다 돌아가셔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고!”

“그만해. 이제 그만해도 돼.”

“형은 항상 재수 없었어. 그래서 형이 싫어.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그냥 우린 내버려두고 미국으로 가버리지 왜 남았어? 내가 동생들 돌볼 기회라도 주지 그랬어. 요리도 집안일도 도대체가 빈틈이 없어. 겨우 세 살 차이라고. 나도 충분히 형을 도울 수 있는 나이라고. 나도 내년 부모님 제사 지낼 때, ‘걱정하지 마세요. 건우 형 도와서 동생들 잘 돌볼게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고. 그래서 그랬어.”

“뭐가?”

“완벽해 보이고, 도무지 넘을 수 없어 보이던 형이 빈틈을 보였잖아. 그래서 그랬어. 그렇게라도 형의 흠을 잡고 싶었어.”

“5, 3, 2, 4, 1, 2, 3, 1, 5, 1, 2, 1, 1, 1, 2, 1.”

“뭐…뭐야! 갑자기 그 이상한 숫자들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기록했던 전교 석차.”

“뜬금없이 그건 왜? 지금 형 머리 좋다고 자랑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네 전교 석차를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항상 네 이야기를 하셨어. 네가 성적표를 받아올 때면 항상 우리 동우가 이번에는 ‘몇 등을 했다’라며 내게 자랑하셨다고. 그런데도 부모님이 널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셨다고?”

“어…엄마가 그랬다고?”

“초롱이, 보미, 은지, 나은이, 남주, 하영이.”

“그건 또 뭐야. 그 이상한 이름들은?”

“이상한 이름이라니? 네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좋아했던 여자애들 이름인데.”

“뭐? 내…내가 언제?”

“엄마가 자주 하던 이야기 중 하나야.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긴 것 같다면서. 그리고 걱정도 하셨어.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1년마다 바뀐다고. 혹시 바람둥이 기질을 보이는 건 아니냐고.”

“뭐래! 나, 바람둥이 아니거든.”

“누가 뭐래? 그냥 엄마가 조금 걱정을 했었다는 이야기야.”

“엄마는 왜 쓸데없는 이야기는 해서. 엄마가 괜히 오버한 거야. 내가 그렇게 지조 없는 남자는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하셨던 건 네가 마포구청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야.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미국 시각으로 새벽에 전화해서 잠도 못 자게 네가 쓴 글을 또박또박 읽어주시더라. 따뜻하고 상큼해야 할 봄날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봄바람을 타며 정겹게 흩날려야 할 꽃잎들은 본연의 색을 잃고 시들어 갔다. 따뜻한 봄바람은 갑작스레 불어온 강풍에 힘을 잃었고….”

건우는 동우가 썼던 글을 조용히 읊었다. 그 모습에 동우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알았어. 그만해. 형 머리 좋은 거 알고 있으니까 자랑은 그만해도 돼.”

“딱히 내 기억력을 자랑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만?”

“그래. 알아. 나는 내가 쓴 내 글도 정확하게는 못 외우는데. 새벽에 그것도 잠결에 엄마가 읽어준 꽤 긴 글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는 형이지만, 딱히 기억력 자랑은 아니었던 걸로 생각할게.”

“아무리 나라도 한 번 듣고 외우는 건 쉽지 않아. 그만큼 네가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는 거지.”

“됐거든. 그런데 엄마가 정말 그렇게 좋아했어?”

“뭐가?”

“내가 백일장에서 대상 받았을 때 말이야.”

죽일 듯이 싸우던 형제는 언제 그렇게 싸웠느냐는 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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