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그녀와 마주하는 순간 이곳을 추천해준 마이클이 보낸 이메일 문구가 떠올랐다.
헤이, 앨런(건우의 미국 이름). 적임자를 찾아냈어. 내가 누구냐. 하버드의 마당발 마이클 아니냐. 하하하.
사실 교수님에게 부탁드렸어. 아무리 나라도 한국 의사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라고!
교수님은 나의 요청에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추천했어.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미국 정신과 학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해.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평범한 정신과 의사는 아니라는 점이야. 교수님 말씀으로는 성격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해.
너처럼 똑똑한 녀석에는 그런 사람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상담 방향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어. 그렇지만 교수님은 정말 좋은 의사라고 확신하셨어.
예약은 내가 이메일로 해뒀어. 너를 위한 나의 서비스야. 네가 겪고 있는 증상만 설명하고 너에 대한 개인 신상은 말하지 않았어. 네가 상담을 받을지 확실하지 않은데 개인 정보를 밝힐 순 없잖아.
그래도 괜찮은 의사라고 하니까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으면 좋겠어. 잘 지내고 좋은 결과 있길 바라. 네게 도움이 되길. 행운을 빌어~.
- 너의 위대한 친구 마이클이
어리다길래 단순히 젊은 의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려도 너무 어려 보였다.
상담실 입구에 있는 졸업증서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거기에는 200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고 나와 있었다. 아무리 봐도 건우 또래의 어린 여자였다.
“20살이에요.”
“네?”
“제 나이가 올해로 20살이라고요.”
‘20살? 나랑 동갑이라고? 그럼 7살에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잖아. 미친! 그게 말이 되긴 해? 마이클. 뭐야. 나처럼 똑똑하다더니,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천재잖아. 그런데 저 여자 뭐야? 정신과 의사를 하면 독심술이라도 하나.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지?’
“정신과 의사라고 해도 독심술은 당연히 할 줄 몰라요.”
‘헉! 이 여자. 의사가 아니라 여기 입원 중인 환자 아니야?’
“당연히 환자가 아니라 의사랍니다. 그리고 독심술을 몰라도 정신과를 전공하다 보면 내원하는 환자분들이 생각하는 패턴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요. 기대했는데 다른 사람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시네요. 일단, 소파에 편하게 앉으세요.”
도발적인 말투에 건우는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졌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상담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군요.”
“그래요? 뭐든지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메일로 예약할 때, 제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기대했다는 말도 거슬리고요. 뭡니까, 도대체?”
“아! 그게 궁금하셨나 보네요. 물론 이름은 안 밝히셨죠. 사실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교수님의 추천을 받았다길래 상담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했어요. 그래서 호기심에 이메일을 해킹해버렸죠.”
“네? 해…해킹이요?”
“제가 컴퓨터도 전문가 수준이거든요. 호호호.”
여의사는 건우의 질문에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대답을 하며 까르륵 웃었다.
이 여자는 독특한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미쳤습니까? 환자의 이메일을 해킹하다니. 나 참! 환자의 사생활을 상당히 존중해주는 곳인 줄 알고 찾아왔더니 정신 나간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이었군요.”
“이런. 농담인데. 긴장하신 것 같아 긴장 풀라는 의미로 농담 한 번 해봤는데 좀 장난이 심했나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휴. 됐습니다. 농담이라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네요. 그런데 아직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안 하셨는데요. 설마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던 건 아니죠?”
이상하게 그녀와 말을 섞은 이후 계속 불쾌감이 들었다.
“당연히 아니죠.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최건우라는 남자에 대해서.”
“네? 저를 어떻게 아신다는 거죠? 저는 유명인도 아니고, 게다가 저는 그쪽을 오늘 처음 봤습니다만. 설마 또 농담하시는 건가요?”
“농담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건우 씨와 직접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고요.”
건우는 뭔가 시작부터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알고 있던 기존의 정신과 의사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이클의 당부만 아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지도 몰랐다.
“그 참!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주시면 안 됩니까?”
“사실 제 이상형이 뇌가 섹시한 남자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건우 씨는 제 이상형에 딱 들어맞고요.”
“뇌가 섹시하다는 의미가 머리가 똑똑하다는 뜻이라면 그쪽, 아니 일단 제 담당의니까 존중은 해드리죠. 머리로 따지자면 7살에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의사 선생님을 따라갈 수는 없겠죠.”
“유미예요.”
“네?”
“제 이름은 조유미니까. 딱딱하게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유미라고 불러주세요. 하버드에서 대학생활도 하셨으니, 상대의 이름 부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요?”
“흠. 하버드라. 제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도 알고 계시는군요. 좋습니다, 유미 씨. 그럼 하던 이야기 계속 해볼까요? 뇌가 섹시한 남자가 이상형이니 어쩌니 하는 이상한 소리는 집어치우시고요.”
“어머. 솔직한 제 고백인데요.”
“그래요? 그런데 어쩝니까? 유미 씨와 제가 이렇게 카운슬러와 환자로 만나버렸으니. 아쉽게도 향후 다른 특별한 사이로 발전하기는 어렵게 되었군요.”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정신을 다루는 사람이다. 물론 다른 진료 과목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 형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정신과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 신뢰와 유대감을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 입장에서 사랑으로 오해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 현상도 전이 현상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이 현상은 환자와 의사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어주며 동시에 치료순응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역-전이 현상이라고 해서 의사가 환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환자와 치료자의 교제는 치료 시 착취 등 악용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교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건우는 그 점을 상기시키며 그녀를 비꼰 것이다.
“어머. 너무 앞서가시네요. 건우 씨가 제 이상형이라고 했지, 저와 사귀어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는데요. 솔직히 많이 놀라긴 했어요. 평소 호감을 느끼고 있던 건우 씨가 갑자기 환자로 저를 찾아와서.”
“글쎄요. 놀란 것치곤 표정은 굉장히 무덤덤하시던 걸요.”
“정신과 의사는 밖으로 표정이 드러나면 안 되죠. 직업적 특성상 상담을 하다 보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표정이 변하면 의사는 환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교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남자 정신과 의사의 90%가 환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통계에 따르면 여자 정신과 의사의 10%만이 환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다고 하죠.”
“와우! 호호호. 이제야 제가 기대했던 최건우 씨의 모습이 나타나네요.”
건우는 또다시 뒷골이 당기는 걸 느꼈다. 장난기가 있는 마이클에게 부탁한 것이 실수였을까?
어쩌면 이 여자가 건우 자신보다 더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자꾸 거슬리네요.”
“우리가 어릴 때 전국적으로 영재교육 열풍이 불었었죠. 그래서 너도나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IQ테스트를 하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되었어요. 그때 IQ 측정불가라는 수치가 나온 사람이 두 명이나 나와서 화제가 되었고요.”
“그 두 사람이 그쪽과 나였다?”
“그렇죠. 그런데 건우 씨는 재측정에서 155라는 비교적 평범한(?) IQ를 기록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어요. 물론 IQ 155도 범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높은 수치이긴 하죠.”
“그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네. 당시 아버지께서 영재교육 관련 우리나라 책임자셨거든요. 여기도 원래 아버지가 운영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전문의를 따자마자 제게 떠넘기고는 세계 일주 중이세요.”
“유미 씨 아버님이 뭘 하시고 계시던 전 관심 없습니다만?”
“까칠하시기는.”
조유미가 건우를 보며 살짝 눈을 흘겼다.
“절 이렇게 만드신 분이 유미 씨 같군요.”
“어쨌든 저는 저만큼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어요.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평범한 수재였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관심이 계속 가더군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졸라 대략적인 정보를 주기적으로 받았어요.”
“결국, 사생활침해를 했다는 거네요. 이거 해킹했다는 농담보다 더 충격적인데요.”
“호호호. 그렇죠. 그렇지만 그냥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는 대.략.적.인. 정보였어요. 모의고사 전국석차나 과학고에 진학했다더라, 하버드대에 갔다더라 하는 간단한 정보가 전부였으니 불쾌해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대략적인 정보만이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튼, 그렇다 치고요. 계속 해보세요.”
“그러다 묘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어요. 이 남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은 남자일지도 모른다.”
“알려진 것보다 머리가 더 좋다? 와우. 흥미로운 이론이네요.”
“저는 7살에 서울대 의대에 들어갈 만큼 대단했어요.”
“그런데 7살에 의대에 들어갈 수 있긴 합니까?”
“사실 고작 7살에 의대에 들어가는 게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말도 많았지만, 그건 아버지가 해결해주셨어요.”
“대단한 아버님을 두셨나 봅니다.”
“슬프게도 욕심이 과한 아버지였죠. 자식의 인성보다 당신의 명성이 더 중요하셨거든요. 덕분에 저는 재수 없는 아이가 되었어요. 특히 잘난 척하는 걸 좋아해서 천재성을 밖으로 자주 과시했어요. 그런데 건우 씨는 저와 반대더군요. 남들이 이해할 정도의 적당한 천재성만 드러냈죠.”
“하하하. 그건 또 뭡니까. 적당한 천재성이라는 게?”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남들이 시기 질투하는 천재와 남들의 사랑을 받는 천재가 있어요. 건우 씨는 당연히 후자였죠. 제 생각이지만, IQ 재검사를 받을 때 일부러 낮은 수치가 나오도록 유도했을 것 같아요. 겨우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말이죠. 천재로 우월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택한 것이기도 하고요. 겨우 다섯 살의 나이에 말이죠.”
사실 건우의 IQ가 재검사 때 받았던 155보다는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유미의 말이 맞는 것도 아니다.
IQ 테스트를 하던 날 아침에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서 배탈이 났고, 그 바람에 제대로 시험을 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물론 그는 유미의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나는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전 유미 씨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천재가 아닙니다. 그런 대단한 천재였다면, 제 삶이 그렇게 비참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았겠죠.”
진짜 천재였다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그의 부모님을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건우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네?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죠?”
“아닙니다. 그냥 혼자 중얼거린 겁니다.”
“제가 세운 가설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기억력과 단순 연산능력만 천재성을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니까요. 연기의 천재도 있고, 음악의 천재도 있고, 운동의 천재도 있죠. 그 사람들의 기억력이나 연산능력은 사실 평범한 편이죠. 하지만 범인의 능력을 초월했으니 천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요?”
“건우 씨는 머리가 좋아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과는 행동 패턴이 달라요. 얼마 전에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미안해요. 마음 아플 텐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서.”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군요. 이젠 조금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성인이 된 이후 건우 씨에 대한 개인정보를 일부러 얻어낸 적은 없어요. 믿어주세요. 신문에서 봤어요. 제 개인적인 취미는 신문 읽기예요. 각종 신문의 구석구석까지 모두 읽는 편이죠. 그러다 신문에서 건우 씨 부모님 사고 소식을 접했어요. 부부가 사고를 당했는데 이름과 나이가 건우 씨 부모님과 일치하더군요. 그래서 추측했어요. 부부의 이름과 나이가 똑같은 커플이 둘이나 존재할 확률은 희박하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네요. 한 번 들으면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이실 테니, 나이랑 이름쯤은 기억하고도 남겠죠. 이번에는 유미 씨 말씀 믿어드리죠.”
“고마워요. 그리고 지금부터 말하는 것도 또한 추측이에요. 지금 건우 씨가 한국에 남았다는 것은 부모님의 사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돌보겠다고 결심했다는 의미겠죠?”
확실히 놀라운 여자였다.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도 대략적이지만 정확한 추론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놀라웠다.
‘천재는 진짜 천재인가 보다.’
건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맞아요. 고작 오늘 만남 하나로 그런 것까지 추론하다니, 대단하네요.”
“제가 보기에는 건우 씨가 더 대단해요. 제가 말했죠? 보통의 천재와 행동 패턴이 다르다고. 자기의 꿈과 가족 중에,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들은 더더욱 그렇죠.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제가 반한 거예요. 호호호.”
“그러니까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게 전부 유미 씨가 제게 반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이었던 겁니까?”
“네.”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왔는데, 점점 의구심만 드는군요. 제가 잘 찾아왔는지 확신이 안 서요. 그럼 이제 상담을 시작할 수 있습니까?”
“아뇨. 오늘 상담은 이걸로 끝이에요.”
“네? 대체 뭘 했다고 상담이 끝나요?”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더니 끝까지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테스트해본 결과 분노조절장애의 징후가 보이지는 않네요.”
“설마 방금 대화가 전부 테스트였다는 겁니까?”
“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게,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짜증 날 정도로 깐죽거린 게 전부 테스트였다는 이야기네요?”
“네.”
그 말을 듣는 순간 건우는 없는 분노조절장애가 조유미라는 여자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