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손 과장님. 아직도 최건우 선생님과 연락이 안 됩니까?”
“네. 여전히 안 됩니다. 조금 전까지는 신호라도 갔는데, 전화기를 꺼놨는지 바로 소리샘으로 넘어갑니다. 일부러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어쩌죠?”
물어보는 김상문 원장의 얼굴도, 대답하는 손다정 과장의 얼굴도 초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의 기억과 단 1%도 다르지 않게 2015학년도 수능 문제가 출제된 걸 확인한 건우는 그때부터 일부러 전화기를 꺼뒀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찾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설사 지금 한강 에듀케이션에 나타난다고 해도 수능 시험 예측이 50%나 적중한 비결이 뭔지 물어보는 게 전부일 텐데,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나타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건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었다.
“저런. 꺼놨네, 꺼놨어. 수능 끝나고 뭘 한다고 했죠?”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간 동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제주도 여행이라… 팔자 좋네.”
“이 상황에서 여행? 대치동을 완전히 발칵 뒤집어 놓고 여행이 가진답니까? 혹시나 실패했을 때 후폭풍이 무서워서 미리 몸을 피한 건 아니겠죠?”
“글쎄요. 제가 보기에 최건우 선생님은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니 도망간 게 아니라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이라는 걸 예상하고 미리 자리를 피한 게 아닌가 싶네요.”
한 강사의 의문에 손다정이 반박했다. 정말 실패가 무서웠으면 수능 시험 치기 전에 어디론가 숨었어야 한다.
하지만 건우는 수능 시험 당일 아침에도 손다정과 태연하게 전화를 주고받았었다.
그녀의 말처럼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기자도 적지 않았다.
다른 학원 관계자들도 뭔가 얻을 게 있을까 싶어 한강 에듀케이션 내부를 기웃거렸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이제야 한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갑자기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방문객들을 응대해야 했다.
학원으로 온 사람들의 목적은 건우였지만, 그는 이미 제주도로 떠나버렸다.
북적이는 방문객들로 고달픈 건 남은 사람들이었다.
“저 사람들 보세요. 저는 지금 여기가 학원인지 도떼기시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어떻게 내보낼 방법 없습니까?”
“다음에 오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무조건 최건우 선생을 만나기 전까진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겠다는데, 저도 미치겠습니다. 이런 일로 경찰을 부를 수도 없고 말이죠. 아! 그리고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서울시 교육청에서도 최 선생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던데.”
“서울시 교육청? 거기는 최건우 선생이랑 무슨 볼일이래?”
최종 확인 결과 건우가 만든 수능 예상문제집에서 50%가 넘게 적중했다.
주어진 숫자와 서술문이 조금 다를 뿐 실제 수능 시험과 똑같은 문제도 몇 개 등장했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의심스럽다면서 민원이 들어왔다.
유출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항의 전화를 받은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간단하게나마 건우를 불러 면담을 하려고 한강 에듀케이션에 방문했다.
“아까 슬쩍 물어보니까 항의가 들어왔다더군요. 50% 적중률도 문제지만 거의 유사한 문항까지 있는 게 의심스럽다면서요.”
“뭐야? 그럼 문제라도 유출되었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미국에서 쭉 공부하다가 두 달 전에 귀국한 사람인데, 무슨 수로 철통 같은 경비망을 뚫고 문제를 빼 옵니까? 그냥 형식적인 과정을 거치려는 거겠죠.”
“그렇지? 난 또.”
내심 안도하는 김상문 원장.
갑작스레 몰려든 방문객 때문에 골머리를 앓긴 해도, 지금 믿을 사람은 건우밖에 없다.
만약 건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한강 에듀케이션의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된다.
“그나저나 최 선생은 좋겠네요.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데, 최 선생은 동생들하고 팔자 좋게 회나 먹으면서 놀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젠장. 난 학원 강사가 된 이후 쉬어 본 게 언제인지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나 계속 다니는 건데. 부럽다, 부러워.”
막간을 이용해 휴식을 취하던 강사들은 제주도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건우와 그의 동생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
- 형이 가라사대 : 인생은 뚱뚱할 때와 날씬할 때로 나뉜다.
2014년 11월 어느 날, 제주도.
9월 초에 불행한 일은 겪은 건우네 가족은 건우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동생들은 잃었던 웃음을 조금씩 짓게 되었고, 어리광과 어른스러움을 오가던 막내는 예전의 밝고 귀여운 모습을 회복했다.
건우는 몇 주 동안 수능 시험 대비 특강반을 운영했다.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그 때문에 평소보다 동생들에게 신경 쓰기 어려웠다.
한두 과목이면 몰라도, 여섯 과목을 모두 도맡아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20년 노하우를 가진 건우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고모와 외할머니가 번갈아 오가며 퇴근 시간까지 아이들을 돌봐줘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예전 삶이었다면 뭐든지 혼자 힘으로 다 하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그의 내면 어딘가에는 천재의 오만함이 숨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건우는 예전의 독선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그 변화는 가족 전체에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특히 막내 은우의 경우는 고모나 할머니,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남자인 건우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여자끼리만 나눌 수 있는 감성이 존재한다.
특히 엄마와 딸은, 엄마와 아들 사이와는 또 다른 특유의 유대감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오빠 셋과 함께 지내야 했던 은우는 여자끼리의 부대낌이 항상 그리웠다.
다행히 고모나 두 할머니는 그녀에게 그런 감정적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안식처 역할을 했고, 그런 시간은 은우가 부모님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동생들이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자, 건우는 4남매만의 여행을 준비했다.
바빠서 많이 신경을 써주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새로운 미션을 동생들에게 부여하려는 목적도 숨어 있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건우와 함께 제주도로 온 동우, 정우, 은우는 신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오는 나들이였다.
금요일은 늦게 도착해서 간단한 요기만 하고 잠을 잤고, 토요일은 섬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제주도 특산물로 배를 채웠다.
“자, 모두 기상. 일어나. 자자. 어서 일어나. 동우, 정우, 은우 빨리 일어난 실시. 기상. 기상.”
“으… 졸려. 형 대체 몇 신데 이 난리야? 헐! 뭐야. 5시? 아직 새벽이잖아. 꼭두새벽부터 대체 왜 이래?”
“히잉. 오빠. 졸려. 조금만 더 자자, 응?”
토요일과 같은 여유로운 여행이 일요일도 계속될 줄 알았던 3남매는, 날벼락과도 같은 건우의 호통 소리에 어리둥절해하며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 돼! 당장 일어난다. 실시. 열을 세는 동안 안 일어나면, 얼굴에다가 물 뿌려버릴 테니까 알아서들 해.”
“윽… 졸려 죽겠는데. 형 대체 왜 이래?”
건우의 협박에 3남매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투정을 부리기엔 건우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한라산 등반을 시작할 거야.”
“뭐? 한라산? 왜 갑자기 뜬금없이 한라산?”
“제주도에 왔으니 한라산을 가는 게 이상할 건 없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은우는 이제 겨우 7살이라고. 1,900미터가 넘는 산을 어떻게 올라? 그지, 은우야.”
생각지도 못한 한라산 등반 계획에 당황한 동우는, 매일같이 티격태격하던 은우와 다정한 포즈까지 취하며 반대 입장을 표했다.
“지금 너희 모습을 봐.”
“왜? 우리가 어때서?”
“피둥피둥 살찐 모습들이 안 보여?”
“피둥피둥 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솔직히 피둥피둥 까지는 아니다.”
“다 필요 없고. 형이 가라사대, 인생은 살이 쪘을 때와 살이 찌지 않았을 때로 나뉜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뚱뚱할 때와 날씬할 때로 나뉜다. 고로 오늘부터 너희는 합리적인 식단조절과 더불어 아침 운동을 시작할 거다.”
“식단 조절? 아침 운동?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왜 그걸 형 마음대로 정해?”
건우의 뚱딴지같은 선언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은 최근 요리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셋째 정우였다.
요리가 재미있다 보니 자꾸 하게 되고, 많이 먹게 됐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부쩍 몸무게가 늘었다.
4남매들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 체질적으로 살이 잘 찌는 편이었다.
건우의 경우는 생물학 공부나 의대 준비를 하며 일찍부터 비만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다.
그리고 자기관리, 특히 조깅 문화가 잘 발달한 미국에서부터 운동하는 생활습관을 가진 덕분에 날씬한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들은 달랐다. 심하다고는 말하긴 힘들어도 세 명 모두 통통함과 뚱뚱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 삶에서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살이 쪘고, 특히 동우와 정우는 결혼 이후 비대할 정도로 살집이 늘어났다.
건우는 점점 살이 오르는 정우를 보니 자꾸 예전 기억이 떠올라 짜증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 살이 찌는 일은 없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병 때문에 살이 찐다면 모를까, 제대로 된 노력도 하지 않고 살이 찌는 건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형이니까 내 마음대로 정하지. 가훈. 형이 가라사대, 나의 말에 절대복종하라. 몰라?”
“아니. 그건 알지만.”
“불만 있으면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던가. 물론 너희 살은 반드시 빼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아놨기 때문에 다시 설득하긴 불가능하겠지만.”
“으… 악마.”
동우와 정우는 건우의 용의주도함에 치를 떨었다.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마지막 기회까지 사라졌다.
3남매는 체념하고,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때가 막간을 이용해 휴식을 취하던 한강 에듀케이션의 강사들이 제주도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건우와 그의 동생들 떠올릴 시간쯤이었다.
3남매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굵은 땀방울을 비 오듯 쏟아내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팡이 삼아 꾸역꾸역 한라산을 오르고 있었다.
은우는 아직 7살이라서 건우가 업어주고 손잡아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동우와 정우는 오롯이 혼자 힘으로 백록담까지 올라가야 했다.
***
“최건우 선생님!”
제주도에서 동생들과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 건우가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 이제야 오나 저제 오나 애타게 그를 기다리던 손다정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네, 손다정 과장님. 저를 너무 애타게 부르시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알면서 모른 척하기 있어요? 전화기는 왜, 왜 꺼두셨어요?”
“그거야 동생들과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꾸 연락이 오니까,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꺼놨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어요?”
“말씀이라고 하세요. 당연히 급한 일이 많았죠. 바빠도 전화 정도는 받아주셨으면 좋았잖아요. 여기저기서 얼마나 많은 문의가 들어왔는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통화가 되어야 다음 약속을 잡든 계획을 세우든 하는데….”
“하하하. 바쁘신데 혼자만 놀러 갔었군요. 미안합니다. 미리 말씀드렸지만, 제가 학원 강사를 하는 이유는 동생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직장이 오히려 동생들을 외롭게 한다면 제가 이 일을 계속할 이유는 없겠죠?”
투정부리듯 이야기하는 손다정 앞에서 건우는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찾아보면 여기저기 지원받을 방법도 많았고, 그게 아니라도 학자금대출 같은 제도가 잘 되어있는 미국이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었으면 어쨌든 의대는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남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동생들 때문이다.
예전 삶에서 동생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심지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 동생은 건우에게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아무리 망나니짓을 해도 자식을 나 몰라라 팽개칠 수 없는 것이 부모 마음이듯, 건우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학원 일보다 동생들이 우선이 될 것이다. 오늘 같은 상황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대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조금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네. 그렇긴 하죠. 그럼 어제저녁 늦게라도 전화기를 켜두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건우의 단호한 태도 때문인지 기세등등하던 그녀의 얼굴이 한풀 꺾였다.
“아! 맞다. 아직 휴대전화를 켜놓지 않았구나. 그건 정말 미안합니다. 하하하.”
건우는 그제야 자신의 휴대전화가 꺼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황급히 전화기를 꺼내 전원을 켰다.
전원을 켜자 휴대전화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백 통의 부재중 연락이 왔음을 알렸다.
“와우! 이거 엄청난걸요. 대체 부재중 연락이 몇 개나 온 거지.”
손다정은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한 모습에 건우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만큼 최건우 선생님을 찾는 분들이 많았다는 의미겠죠. 조용히 드릴 말씀도 있고 일단 선생님 개인 사무실로 같이 가시죠.”
“네, 그러시죠.”
이제 본격적으로 학원 강사를 시작하면 건우도 굉장히 바빠진다.
친척들이 항상 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계획도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동생들을 그의 사무실에 데려와 공부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학원과 계약하면서 그가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여유 있는 공간의 개인 사무실 보장이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최 선생님을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다정은 사무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가장 급한 용무부터 꺼냈다.
“네? 서울시가 왜요? 연락이 오려면 교육부에서 올 줄 알았는데.”
“최 선생님은 왜 정부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 예상을 하셨어요?”
“그럼요. 그건 당연한 수순이죠. 수능 50% 적중.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습니까?”
“그럼 역시 수능 문제가 적중하리라 확신하고 계셨던 거네요.”
“네. 설마 제가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그렇게 일을 크게 만들었겠습니까?”
“그래요. 그래. 이젠 더 이상 놀랍지도 않네요. 그냥 최 선생님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조차 별스럽지 않게 해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요. 그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는 게 손 과장님에게 좋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하하.”
끝까지 뻔뻔하게 나오는 건우를 보며 다정은 체념하듯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건우를 보고 20살이라고 생각하겠나?
능구렁이 한 마리가 숨어 있는 듯 느물거리는 모습을 보면 마치 40~50대의 연륜 있는 강사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