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네. 회장님. 저도 지금 그게 고민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밀어붙이겠다는데, 학원이 무슨 힘이 있겠나? 들어줘야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겠군.”
“그렇습니다. 소문이 금방 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이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집안의 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는 소동으로 끝나지 않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그렇겠군. 확실히 그냥 좋아만 할 일이 아니야. 자네가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지 이제야 이해가 좀 가는구나. 그럼 이제 어쩐다….”
손다정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한 장만복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그건 장만복 회장도 알고, 손다정도 알고 있다.
옆에서 멀뚱멀뚱 장 회장의 얼굴만 바라보는 원장은 모르고 있지만.
“죄송합니다만 회장님의 결단이 필요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결국, 여기서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군, 그래. 쯧쯧. 이건 잘 돼도 골치야. 투자는 했고, 원금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아무리 상황이 좋아서라고 해도 이건 투자의 정석에서는 벗어나는 일이야. 내가 어쩌다가 김 원장하고 인연이 닿아 이 고생을 하는 건지.”
“송구합니다. 회장님.”
“어쩌겠는가. 자네와 내 인연이 그렇게 질긴 것을. 어쩔 수 없지. 그냥 강남의 목 좋은 곳에 건물 하나 구입한다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괜찮은 건물은 알아뒀나?”
“네. 한강 에듀케이션 바로 뒤편에 괜찮은 4층짜리 건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시설이 깨끗해서 인테리어 공사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4층이라. 좀 낮군. 7층짜리 건물로도 해결되지 않아서 이 고생인데, 4층은 좀 그렇지 않아?”
“그래도 멀리 떨어진 것보다는 낫습니다. 관리도 어렵고요. 제 생각엔 이 건물이 최적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10층이 넘는 건물을 구하고 싶지만, 괜한 욕심을 부리기보다 선택과 집중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말이야. 손 과장.”
“말씀하세요, 회장님.”
“그렇게 투자를 했는데, 최건우 선생이 떠난다고 하면 어쩌나?”
“최소 1년은 염려가 없습니다.”
“지금 이게 1년으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나?”
“학원만 정상궤도에 오른다면 학원 선생님들의 실력도 좋기 때문에….”
“내 생각은 다르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계약을 연장하든 다른 방법을 강구하든 어떻게든 붙잡게. 다른 학원에서 엄청난 계약금에 위약금까지 물어주고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떡할 건가? 그땐 완전히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네.”
장만복 회장의 지적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자기가 아는 건우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막대한 계약금이나 그게 아니라도 큰 이득이 되는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다.
건우도 예전에 이야기했지 않은가? 사람은 믿을 수 있어도 돈은 믿을 수 없다고.
학원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건우의 마음을 확실히 잡는 일이다.
손다정은 어떻게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
하루 다섯 시간 연속 강의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에 10분씩 쉰다고 해도 다섯 시간을 연속으로 서 있으면 허리와 무릎 그리고 발목에 상당한 무리가 간다.
남들은 여덟 시간씩 일하는데, 고작 다섯 시간 일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드냐고 할 수 있다. 아마 계속 서 있는 일을 해본 사람만이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헌병대 출신들이 일반 보직에 비해 허리나 무릎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서 있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다.
서 있는 게 끝이 아니다. 다섯 시간 동안을 쉬지도 않고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두세 시간씩 수다를 떨어도 다음 날이면 목이 쉬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연속으로 다섯 시간씩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매일 강의해야 하는 사람의 목은 말해 뭐하겠나?
“에구구. 허리야. 에구구. 목이야.”
모든 강의를 끝낸 건우가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건물로 내려왔다.
“이것도 참 골치군. 좀 있으면 애들도 방학일 테고, 2월이면 재수생들도 몰릴 텐데. 대체 하루에 수업을 몇 개나 더 해야 하는 걸까? 휴. 아무리 돈이 좋아도 정말 못 해먹겠군. 젠장. 20년간 고생고생하며 몸을 적응시켜놨는데, 그게 이제 와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네. 에구구.”
어떤 면에서 인간의 몸은 참 위대하다. 정말 극악한 상황에 부닥쳐도 결국은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과거 건우가 처음 학원가에 뛰어들었을 때는 지금보다 몸이 더 힘들었다.
하지만 점점 몸도 적응해가고, 어느 정도 노하우도 생기면서 하루 일고여덟 시간씩 강의해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었다.
마치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의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건우가 회귀하면서 가지고 있던 굳은살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물론 노하우는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노하우가 있어도 그건 덜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지, 안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굳은살을 만드는 건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다. 끊임없이 스스로 단련하며 만들어 내야 한다.
꼼수도 없고 왕도도 없다.
과거에 이미 겪었던 적응과정을 다시 한 번 겪는 수밖에는….
***
“최건우 선생님 되십니까?”
학원을 내려와 주차장에 세워둔 부모님의 마지막 유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렌토를 타려는데, 깔끔한 슈트를 입고 세련된 머리스타일을 한 남자가 건우에게 다가왔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반갑습니다. 선생님. 저는 대박 스터디 홍보팀 팀장 왕대박이라고 합니다.”
“아, 대박 스터디요.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저희 대박 스터디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예전 20살의 건우는 몰랐지만, 40살의 건우는 충분히 알만큼 나름대로 유명한 학원이었다.
“글쎄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창시절 학원에 다닌 적도 없고 이쪽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얼핏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른다는 그의 대답에 왕대박 팀장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홍보팀을 담당하는 사람답게 금방 그런 기색을 지우고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하하. 모르실 수도 있지요. 최건우 선생님처럼 천재적 두뇌를 가지신 분들은 사실 사교육의 도움이 필요 없으니까요. 간단하게 학원에 대해서 설명도 할 겸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잠깐만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하지만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시간을 많이는 못 드립니다.”
무슨 말을 할지 쉽게 예상은 되었다. 잠깐 고민은 했지만,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순순히 승낙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근처에 있는 조용한 커피숍으로 향했다.
“먼저, 간단하게나마 우리 대박 스터디 학원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 학원은 입시전문학원 서열 4위에 랭크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학원 중 한 곳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 현재 이현직, 홍경석이라는 두 명의 유명 스타강사 선생님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최고 명문대 출신 선생님들로만 구성된 강사진은 우리 학원의 자랑입니다. 에, 또. 건물은 총 9층이며 건물 면적은….”
“저기 왕대박 팀장님. 용건을 조금 간단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왕대박 팀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기관총처럼 다다다 거리며 정신없이 학원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서열 4위의 입시학원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설명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강사진까지는 몰라도 건물 소개까지 들을 필요는 없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우리 학원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요. 너무 장황하게 설명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유익한 정보였습니다. 다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집에 어린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시간을 많이 내기가 어렵습니다.”
과거의 도도하기만 했던 건우라면 요점 없는 장황한 설명에 짜증부터 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건우는 달랐다. 20년의 경험은 그를 노련하게 만들었고, 사소한 만남에서도 웬만하면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락으로 떨어져 보니 알 것 같았다.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고 도도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비굴하게 사는 게 아니라 적당히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만 살아도 삶이 몇 배나 편해지는지.
예전 삶에선 누구 하나 실패한 건우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잘나갈 때는 강아지 꼬리 흔들 듯 친한 척하던 인간들이, 그가 나락에 떨어지자 통쾌한 듯 조롱하기 바빴다.
살아오면서 그들에게 해코지 한 번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회귀 전까지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원한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건우는 그래서 결심했다. 힘을 키우겠다고. 그리고 힘을 키우기 전까지는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어이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직 동생분들이 어릴 텐데, 너무 제 생각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건우 선생님. 지금 선생님의 위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위치요? 음. 글쎄요.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학원가에서 최 선생님의 위치를 말씀드린 겁니다.”
“학원가에서요? 자화자찬 같아서 민망하지만,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 특강은 이미 큰 이슈를 몰고 왔고, 지금 하고 있는 강의에 대한 평가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절대 자화자찬이 아니죠. 부족합니다. 부족해요. 큰 이슈요? 평가가 나쁘지 않아요? 지금 최건우 선생님은 본인을 너무 낮게 평가하고 계십니다.”
“그럼요?”
“최건우 선생님. 자신의 가치에 대해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최 선생님은 대치동 학원가 아니 대한민국 학원가에서 이미 태풍의 핵이 되셨습니다. 상당수의 학원이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태풍의 핵까지나요? 저를 너무 과하게 보고 계신 것 아닙니까?”
지금 학원가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건우가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본모습을 모두 까 보일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순진하게, 20살 햇병아리 강사의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왕대박 팀장은 더욱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과하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수능 예상 적중률이 무려 50%를 넘었습니다. 고작 3주라는 시간 동안에요. 대한민국이 독립한 이후 70여 년 동안 누구도 이루지 못한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헐. 이 사람 제정신 맞아? 무슨 대한민국 독립 이후 70여 년씩이나….’
건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흐뭇한 표정만 지었다.
“어휴. 무슨 그런 말씀을.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런 적중률은 나올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최 선생님의 순수한 실력입니다. 물론 운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죠. 하지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열심히 노력은 했습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됩니다. 분명 선생님만의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은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제가, 우리 학원이 그 일을 돕고 싶습니다.”
결국, 수능 적중 능력에 대한 비결이 궁금한 것이었다.
비결이야 당연히 있다. 어렵지 않다. 그냥 회귀만 하면 된다. 그렇게 말하면 미친놈 소리만 듣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건우가 준비 중인 새로운 참고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예전 학생들과 강사를 대상으로 시험 강연을 할 때 새로운 교습법을 맛보기로 살짝 보여준 적이 있었다.
혹시나 소문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수능 적중률에 대한 소문이 워낙 커서 그런지 조용히 묻혀버린 모양이었다.
건우가 굳이 왕대박 팀장을 만난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었다.
과연 학원가에서 새로운 참고서에 대한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한 여부.
알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오래 비밀을 유지해야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최대한 대비가 늦어야 최대한 오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법이니까.
목적은 다 이루었으니 이제 슬슬 대화를 끝낼 때가 왔다.
“음. 그래도 절 처음 이곳으로 이끌어 준 곳입니다. 신의를 생각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함께 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요….”
“계약금 20억 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내년 수능 적중률이 30%만 넘으면 보너스로 30억 드리겠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강의료와 인터넷 강의지분도 특급 대우를 약속드리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대박 스터디 지분도 5% 나눠드리겠습니다.”
어수룩해 보이던 왕대박 팀장은, 막판에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왕대박’ 조건을 내세웠다.
정말 엄청나게 파격적인 조건이라서 건우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기대 수익은 한강 에듀케이션이 더 높다. 그 정도 조건으로 혹하진 않는다.
문제는 고작 서열 4위의 학원이 이 정도 조건을 제시했다는 사실이었다.
4위라고 해도 1, 2, 3위와는 차이가 크다.
4위가 이 정도 조건을 제시했다면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는 2위나 3위 학원은 이보다도 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울 것이 분명했다.
건우의 최종 목표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학원에서 제시할 파격적인 조건은 그런 그의 목표를 더 빠르게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 분명했다. 고민이 되었다.
그때 건우의 스마트폰 액정에 손다정의 전화번호가 반짝였다.
이제 슬슬 헤어지려고 했는데 전화가 걸려온 타이밍이 좋았다.
“아! 전화가 왔나 보네요. 저는 괜찮습니다. 받아보세요.”
눈치 없는 왕대박 팀장이 다정의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지만, 건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아닙니다. 일단 왕대박 팀장님과 대화부터 마무리해야겠죠. 확실히 혹할 정도로 대단한 제안입니다.”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제안을 받아본 적 없을 겁니다. 정말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는 그런 파격적인 조건이죠.”
“그렇다고 해도, 그런 큰 계약을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물론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죠. 동생분들도 기다린다고 하시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정말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는 그런 파격적인 조건입니다. 이점 꼭 유의해주십시오.”
왕대박 팀장은 끝까지 자신의 조건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강조했다.
‘그놈의 파격은 대체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건우는 자신의 속마음과 달리 얼굴에 적당한 미소를 띠며 왕 팀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럼요.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겠습니다.”
“네. 꼭 저희와 계약을 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왕 팀장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