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8화 (28/256)

제28화

“정말 방법이 있으세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손다정이 다급한 표정으로 건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요. 방법이 없으면서 제 발로 저길 들어갈 리 있겠어요? 그런데 별관 공사는 한 달이면 끝나는 거 확실해요?”

“별관이요? 사람들이 저렇게 몰렸는데 안 돼도 되게 해야죠. 인테리어만 변경하면 되니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거예요.”

“무조건 하세요. 추가자금이 더 들어가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무조건 2월에는 수업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해결방안이 생기니까.”

“무슨 방법인데요? 그냥 말해주면 안 되나요? 사람 궁금하게.”

“하하하.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잖아요.”

확신이 생기자 농담할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뭐가요?”

“지금 바깥 분위기를 몰라서 그래요? 정말 장난 아니라고요.”

손다정은 정말 걱정스럽게 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건우는 여유 있게 웃음만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손 과장님도 아시겠지만, 제겐 엄청난 스킬이 있잖아요.”

“엄청난 스킬이요? 그게 뭔데요?”

“모르셨어요? 일명 대중 압도 스킬? 보셨잖아요. 강의할 때, 아이들이 내 말에 얼마나 집중하는지. 400명의 학생도 한 번에 휘어잡은 저라고요.”

“그건 알지만 그래도….”

“물론 400명보다 5~6배는 많은 사람들과 야외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그냥 단지 예감만 믿고 실행하기에는 너무 큰 위험부담이….”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죠. 이대로 방치하고 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에요. 사고가 나서 자칫 여론몰이라도 당하면 학원 허가 자체가 취소당할 수도 있고. 아, 저기 확성기 오네요. 그럼 다녀올게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 확성기를 받은 다음 성난 군중들이 몰려 있는 현관 앞으로 향했다.

***

한강 에듀케이션에서 질서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경비업체 직원들은 지금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사장님이 급한 일이라며 처음 직원들을 불러 모아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했을 때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냥 학원 수강 신청을 하는데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모였다.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혼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하고 와라.’

사장의 설명은 이게 전부였다.

현장에 도착한 직원들은 예상 밖의 긴 줄을 보며 그렇게 간단한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아줌마들이었고, 추위와 밀려드는 졸음 때문에 많이 지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빠른 속도로 줄어가던 줄이 어느 순간 멈췄고, 그때부터 학원 주변 공기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이런 일에 대한 직감이 발달된 그들은 확 가라앉은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무언가 빠른 조치가 필요할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믿었다. 바퀴벌레보다 끈질긴 스토커로부터 고객을 안전하게 보호한 적도 있고, 광신도만큼이나 무서운 빠순이(?)들로부터 아이돌 그룹을 지켜낸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 한강 에듀케이션에 파견된 팀의 팀장은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다니는 해외 전쟁터로 파병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용사였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지만, 추위에서 떨며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그런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부모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 그들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냥 위압적인 큰 덩치로 눈알이나 몇 번 부라리면 알아서 조용히 해산할 것이라고 믿었다. 기껏해야 아줌마라고 생각했다.

한번 치맛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두 번째 실수였다.

추위와 몰려오는 졸음 그리고 배고픔까지. 맹목적인 빠순이들도 결국 체력 때문에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대부분 여자였고, 체력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과거 경험했던 빠순이들처럼 제풀에 떨어져 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줌마들의 근성과 깡다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세 번째 실수였다.

“나이도 어린 것이 어디다 눈을 부라려!”

“아줌마라니? 얻다 대고 아줌마래?”

“어머머머. 어딜 만져? 건들지 마. 성추행으로 고소해버리기 전에 떨어져. 어서.”

“내가 첫사랑에 성공했으면 너 같은 아들이 있었을 거다. 까불지 마. 응!”

군중 심리를 등에 업은 아줌마들은 자신들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클 것 같은 경비업체 직원들이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자식을 위하는 길이라는 자기 합리화로 중무장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경비업체 직원들이 억지로라도 유지하던 통제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다.

나름대로 질서정연했던 줄은 어버버하는 사이에 엉켜 들었고, 사람들은 그때를 놓칠세라 한강 에듀케이션 현관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엄청난 위기!

이 상황에서 자칫 누구 하나라도 다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었다.

에에에엥. 에에에엥. 에에에엥.

학원 밖으로 나온 건우는 사태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재빨리 확성기에 부착된 사이렌을 작동시키며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삐이익!!! 아아. 안녕하십니까. 학부모 여러분.”

확성기를 작동시키면 항상 가장 먼저 들리는 귀를 자극하는 마찰음이 시기적절하게 울려 퍼졌다.

‘나이스 타이밍!’ 건우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잠시 이성을 잃고 무작정 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학부모들은 귀를 자극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건우를 바라봤다.

“뭐야, 저 젊은 친구는?”

“강사 아닐까?”

“저렇게 젊은데? 젊다기보다는 어려 보이네, 뭘. 우리 아들하고 동갑이라고 해도 믿겠는걸.”

“그럼 강사는 아닌가? 그럼 뭐지? 경비업체 책임자인가?”

“에이 그러기엔 너무 어려 보이잖아.”

“그럼 누구지?”

처음 건우를 본 학부모들은 갑자기 등장한 건우의 정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시죠?”

건우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최.건.우.라고 합니다. 혹시 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분 계십니까?”

“최건우?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아! 기억났다. 그 하버드 의대 휴학했다는 강사 이름이 최건우야.”

“에에. 그 최건우가 저 최건우야? 설마! 너무 어린데?”

“동안인가 보지. 그나저나 정말 똑똑하게 생겼다.”

건우가 자신이 누군지 밝히자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원을 그리듯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최건우 선생님.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우린 어젯밤부터 와서 기다렸다고요. 그런데 아무런 조치도 없다가 이제 와서 수강 신청이 마감되었다고 하면 밤새 기다린 사람은 뭐가 되느냐 말이에요.”

그때 한 학부모가 용기를 내 건우에게 항의했다. 상식적으로는 이렇게 항의를 한다고 해결될 사항이 아니었지만, 이미 상식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린 그들이었다.

물론 건우는 여기서 ‘아니 그런 억지스러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라며 입바른 소리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렇게나 많은 분이 학원 수강 신청을 위해 몰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방송국 중계차까지 출동해서 여기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보기 힘든 광경이면 방송국에서까지 왔겠습니까?”

“방송국이 취재하든 말든 우린 그런 건 몰라요. 어떻게 이 사태를 책임지실지 그것부터 말씀해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차근차근 모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으셨죠? 저는 오늘 새삼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요.”

“어젯밤은 바람도 많이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졌다고 하던데, 그 추위를 견디고 지금까지 기다리셨으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인증사진이 유행하는데, 혹시 기다리면서 사진은 찍으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왜요? 그게 수강 신청을 하는 데 꼭 필요한가요?”

확실히 학부모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모든 것은 수강신청으로 통했다. 시쳇말로 기승전 수강신청이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기 엄마, 아빠가 이렇게 고생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의 자녀분들을 모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편안하게 잠만 잤을 테니까요.

그러니 사진이라도 남겨서, ‘이 녀석들아 내가 너희 때문에 이런 고생까지 하고 있다. 나중에 효도 안 하면 혼날 줄 알아!’ 라고 말씀하셔야죠.”

“호호호.”

“재미있는 선생님이네.”

“그러게 말이야.”

건우에게는 확실히 사람들을 사로잡는, 과학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학원을 뒤엎을 기세였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건우의 말에 집중하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부모 마음을 어떻게 벌써 알아요?”

“저도 당연히 모르죠. 그런데 얼마 전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솔직한 이야기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정말 귀신같은 재주군. 말 한마디로 벌떼같이 달려들던 사람들의 기분을 울고 웃게 만들어. 허허. 그것참.”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상문 원장이 감탄의 말을 내뱉었고,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사들 또한 자기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건우에게 집중했다.

건우의 말은 학부모뿐만 아니라 강사들과 경비업체 직원들까지 사로잡았다.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존재였는지,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은 존재였는지를요. 그리고 여러분이 이렇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솔직히 질투도 났습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이제 여러분 같은 든든한 버팀목이 없으니까요.”

건우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새벽에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본 학원 주변의 모습은 솔직히 부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동생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척했다.

이전 삶에서 40대까지 살았던 건우조차 그런 기분이 드는데, 동생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닌 양, 별다른 의미부여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왔다.

건우는 숙연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 제가 갑자기 너무 우울한 이야기를 꺼냈나 보군요. 괜찮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밝고 건강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은, 오늘 보여준 학부모님들의 마음에 감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감동적인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여러분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니 제 마음이 너무나도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타협안!

이 자리에 서 있는 모든 학부모들이 기다렸던 단어였다.

충분히 궁금할 만한 발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조용히 건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수강증을 나눠드릴 수는 없습니다. 공간의 제약 때문입니다. 우리 한강 에듀케이션은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콩나물시루 같은 협소한 공간으로 밀어 넣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님들이 기대한 만큼의 인원을 모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우리 학원 바로 옆 건물을 구입해서 별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인테리어만 하면 되기 때문에 최대한 공사 시간을 단축해서, 다음 달이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오늘 오신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수강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수강증은 당장 못 드리지만, 한 달 후에 수강 신청할 수 있는 우선권을 드리면 오늘 하신 고생이 아주 헛고생은 아니게 되겠죠.”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않아요? 당장 공간이 없다는데.”

“우선권을 주면 다음 달에는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 거네요. 저는 찬성이에요.”

“당장 수강증을 못 끊는 건 아쉽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받아들여야죠.”

건우의 진심이 통했는지 학부모들은 그의 제안에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소문을 들어보면 한강 에듀케이션 선생님들 실력이 정말 좋다고 해요. 그런데 학원을 확장하면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야 할 텐데, 그 선생님의 실력도 좋다고 보장할 수 있나요? 겨우 한 달 만에 실력 있는 선생님들로 모두 구할 수 있나요?”

이 와중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질문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물론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겠죠. 최대한 노력해서 실력 있는 선생님을 구하겠습니다. 그래도 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수강생들이 원한다면, 좋은 선생님을 구할 때까지 제가 모니터 방송을 해서라도 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하네요. 선생님은 절대 모니터 방송은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모니터 방송은 사실 온라인 강의와 크게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런 강의는 성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특수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제 고집만 주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정성이 제 고집을 꺾었습니다. 혹시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차례대로 수강 우선권을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밖은 너무 춥고, 줄을 서다 보면 이제 막 도착한 분들이 끼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안내 요원의 안내에 따라 학원 강의실에서 대기해주십시오.”

“지금 학원 안은 온풍기를 가동해서 매우 따뜻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차도 준비되어 있으니 안에서 몸을 좀 녹이고 난 다음 수강 우선권을 받아가 주세요.”

건우의 요청에 학부모들은 질서정연하게 학원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엄청나게 늘어졌던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중계차까지 출동해 학원 주변을 찍던 방송국 차량도 다른 취재거리가 생겼는지 자리를 떴다.

학원 강의실에서 몸을 녹이고 기운을 되찾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건우에 대한 첫인상이나 학원 시설에 대해 평가했다.

생각보다 귀엽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불쌍하다, 사위 삼고 싶다, 학원 시설이 생각보다 좋다, 직원들도 친절해서 더 마음에 든다, 대충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큰 위기를 맞을 뻔했던 한강 에듀케이션은 건우의 기지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고, 오히려 좋은 시설이나 직원들의 친절함이 부각되어 이전보다 명성은 더 올라갔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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