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0화 (30/256)

제30화

- 건우 회귀 전 최정우.

둘째 동우가 너무 뛰어난 건우에게 질투를 했다면, 셋째 정우에게 건우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정우에게 건우는 자랑스러운 형이자 영웅이었다.

할머니나 부모님이 형에 관해서 이야기해주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남들보다 두 살 일찍 학교를 들어갔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과학고를 평정하고 하버드에 들어간 이야기, 그 대단하다는 하버드에서 최우등상과 최우수 졸업논문상을 동시에 받았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뿌듯했다. 꼭 자신이 1등 한 것처럼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친구들하고 놀 때도 항상 ‘야. 모여 봐. 오늘 우리 형이 하버드대에 합격했대. 어때, 부럽지?’라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의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부러워하던 친구들도 나중에는 그만 좀 하라고 짜증까지 냈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자, ‘저놈은 그냥 빠돌이다. 건우형 빠돌이’라며 포기해버렸다.

그 정도로 정우는 건우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불안했을 때, 정우에게는 건우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들을 돌보겠다고 선언했을 때 미안하면서도 큰 형이 고마웠었다.

그가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큰형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는 심정이 가장 컸었다.

그렇데! 그렇게 대단하고 훌륭하던 형이 언젠가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꿈을 잃은 사람 같았다. 쳇바퀴처럼 항상 학원과 집을 오갔고 가족에게는 정말 헌신적이었지만, 그런 성실하고 꾸준한 모습은 정우에게 꽉 막힌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마치 꿈을 잃고 그냥 기계처럼 반복하며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무뚝뚝했고, 바빴다.

그래서 그는 형이 자기들 3남매를 짐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남았고,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돌본다. 동생들 때문에 꿈을 포기했으니 딱히 삶에 의욕은 없다. 그러니 그냥 쳇바퀴처럼 아무 생각도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꾸 정우를 괴롭혔다.

‘아니야. 우리 형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데. 학원 강사지만,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훌륭한 업적을 남길 거야. 그리고 사회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는 그런 형의 모습을 보여줄 거야.’

정우는 이렇게 합리화하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건우는 변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한 형이었다면 실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우에게 건우는 슈퍼맨도 부럽지 않은 슈퍼히어로였다.

그런 존재였던 형이, 어느 날 갑자기 배불뚝이에 대머리로 변해서 나타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어린 정우에게 형의 모습은 그 정도로 충격적인 변화였고, 일종의 배신이었다.

두 사람이 조금만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조금만 더 애틋한 형제간의 스킨십을 나눴다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오해들이었다.

그런 오해가 풀리지 않은 채 20년의 세월이 지나자, 이젠 곪고 썩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서로간의 큰 벽이 생겨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형이 성폭행범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정우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꿈을 잃은 형이라도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건우는 몰랐지만 정우는 몇 번을 망설이다 그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초라하게 축 처진 어깨를 한 큰형의 모습에 차마 말을 건네지 못하고 돌아섰다.

과거의 히어로가 몰락한 모습이 너무나도 슬펐다. 그리나 정우는 그런 형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냥 옆에서 조용히 어깨만 두드려줘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배워본 적 없는 정우였다.

세상의 모든 언론에게 공격을 받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학생의 아버지에게 염산 테러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우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했다.

사인이 ‘고독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처음 형을 찾아갔을 때 우물쭈물 망설이지 말고 다가갔어야 했다. 처진 어깨를 두드리며 ‘난 형을 믿는다. 힘내라’라고 말을 해야 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형이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정말 후회가 되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형을 만나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잘 키워줘서 고마워, 형.’

그리고 그의 옆에는 정우보다 더 구슬피 우는 동우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우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 은우가 있었다.

어쨌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정우의 바람은 이뤄진 셈이었다. 물론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

한강 에듀케이션 1층 회의실에는 손다정과 학원 지분이 있는 이사자격의 강사들이 모두 모였다.

손다정이 소집한 회의였고, 이유는 새로 나올 초초교육(초이즈 초이스 에듀) 참고서에 대한 1차 논의였다.

“보안이 필요한 관계로 우선 한강 에듀케이션 임원이신 강사님들만 모았습니다. 일단 과목별로 자료를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손다정은 철저한 보안을 위해 자료를 대신 나눠줄 직원 한 명 대동하지 않았다. 자료도 과목별로 뽑아서 1인당 담당 과목 자료 하나씩만 직접 나눠줬다.

“Choi’s Choice? 갑자기 모이라고 하더니, 자료 맨 앞에 적힌 이상한 문구는 또 뭡니까?”

“최건우 선생님이 만든 참고서 원안입니다. 그 이상한 영어 이름은 최건우 선생님이 직접 만든 겁니다. 초이즈 초이스. 쉽게 말해, 최건우 선생님이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전 최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음이 긴 관계로 이후부터는 초초교육이라 칭하겠습니다.”

자료에 적힌 영어의 의미까지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강사들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손다정이 나눠준 자료가 건우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들의 관심은 온통 나눠준 자료에 쏠려 다른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파묻고 자료를 읽기에 열중했다.

“제 말이 들리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검토 시간은 앞으로 1시간입니다. 그리고 보안을 위해 자료는 다시 회수할 생각입니다. 물론 참고서 내용에 대한 저작권 등록은 이미 완료한 상태입니다. 선생님들께서 해주실 일은 최건우 선생님이 만드신 자료에 담긴 이론에, 오류는 없는지 그걸 검토해주시는 겁니다.”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해당 과목에 대해서만큼은 초일류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일일이 풀어봐야 한다면 모를까, 자료에 담긴 이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쉽게 구분한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계속 시간이 지나갔지만, 회의실은 간간이 들려오는 탄성과 종이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건우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봤고, 그래서 이번 일도 당연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조용한 회의실에서 손다정 혼자만 멀뚱히 앉아있다 보니 괜히 초조해졌다.

짝!

“자! 약속한 1시간 지났습니다. 기회는 오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 주목해주세요.”

손다정은 1시간이 지나도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강사들을 보며 강하게 손뼉을 쳤다.

그제야 자료 읽기 삼매경에 빠졌던 강사들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은 강한 충격을 받은 듯 얼이 빠져있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압니다. 그리고 오늘 보신 자료 말고도 학년별로 준비되어 있으니 처음부터 너무 열 내지 말아주세요. 일단 물리를 담당하시는 김상문 원장님부터 간단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네?”

코멘트를 부탁한 손다정의 말에 김 원장은 버럭 화부터 냈다.

“최건우 선생.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원장님. 일단 흥분은 좀 가라앉히세요. 그럼 지금 보신 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럼요. 있죠.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문제죠.”

“그게 무슨 말씀이죠? 완전히 엉터리 자료라는 뜻입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다니. 믿기지 않는 대답이었다.

손다정은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며 아파져 왔다.

건우를 너무 믿은 덮어 놓고 믿은 건가? 최소한의 검토 정도는 하고 회의를 열 걸 후회도 됐다.

“대단한 것도 어느 정도껏이라야 ‘허허’ 웃으며 대단한 청년이군. 천재는 역시 달라. 이러고 받아들이죠.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물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일 에너지, 운동 에너지에 대한 설명도 기존 설명과 달라요.”

그럴 수밖에. 20년 후 미래의 과학 교과서 내용 중 현시대에 가져와도 문제가 없는 것들만 골라서 수록했는데, 충격을 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네? 원장님. 제발 평소 강의하시듯 일목요연하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여긴 개인의 소감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객관적 평가가 필요한 공적인 회의 자리입니다.”

다행히 참고서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료가 너무 뛰어나서 짜증이 났다는 뜻이었다.

요점 없이 갈팡질팡하는 김상문 원장의 화법에 손다정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크흠. 미안해. 손 과장. 내가 너무 과하게 흥분을 했나 보네.”

“좀 그러신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전에 시범강의를 했을 때처럼 센세이셔널한 내용도 간간이 있습니다. 그것도 정말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것은 기초적인 물리 이론에 대한 설명방법입니다. 쉬울 뿐만 아니라 재미있어요. 각 이론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흥미롭다는 거죠.”

“어쨌든, 센세이셔널한 내용도 있다는 거죠?”

“그것참. 손 과장!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래도. 물리가 격투기 게임처럼 필살기 몇 개 날린다고 마스터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야.”

“그럼요?”

“재미있다니까! 물리가. 고등학교 과정까지 합치면 내가 30여 년 동안 물리를 공부했는데, 물리는 참 재미가 없는 학문이야. 그런데 최건우 선생이 만들었다는 교재를 읽으니 재미있더란 말이지. 30년 공부하면서 물리가 재미있었던 건 지금이 처음이라고. 아! 이런! 죄송합니다. 회의석상인데, 또 흥분했습니다.”

사실 손다정은 마케팅 측면만 생각해 건우가 만든 참고서를 바라봤다.

김상문 원장이 표현한 ‘필살기’라는 단어처럼, 교육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요소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김상문 원장의 설명은 예상 밖이었다. 물리가 재미있다니….

손다정은 학창 시절을 떠올려봤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졸리고, 대체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던 물리라는 과목.

수포자보다 더 많았던 게 물포자였다.

수학은 필수라서 포기하면 안 되기라도 했지, 물리는 생물이나 지구과학이 있어 언제든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없었던 물리가 재미있다?

물리 강사라서 재미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재미있어서 재미있는 걸까?

만약 건우가 만든 참고서가 정말 재미있다면? 그래서 물포자들조차 재미있게 물리를 공부할 수 있다면?

손다정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대박’의 기운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원장님. 원장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초초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참고서는 앞으로 사교육뿐만 아니라 공교육 체계까지 흔들어 버릴만한 메가톤급 폭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 짜증 안 나게 생겼습니까? 아무리 천재라도 정도라는 게 있는데 물리가 이 정도면 자신이 전공한 생물은 대체 어떻겠어요?”

김상문 원장의 말에 생물 담당 강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듯 격렬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다행이네요. 덕분에 우리 한강 에듀케이션의 장래가 더 밝아졌으니까요.”

“손 과장은 역시 이해를 못 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손 과장 입장도 이해는 합니다. 어쨌든, 우리 학원의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발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니깐요. 그런데 내가 아까 그렇게 짜증을 낸 것도 이해해줘야 해요. 지금 20년 물리 선생경력에 회의가 느껴지고 있으니 말이죠.”

“원장님!”

“아! 그렇다고 정말 관두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뭐! 저도 일단은 가정이 있는 몸이라 여기서 관뒀다간 와이프가 무슨 바가지를 긁을지 알 수가 없어요. 그냥 저 혼자 푸념 한 번 해봤다고 생각해주세요. 허허허.”

김 원장은 사람 좋게 웃었지만, 그의 표정은 참 묘했다.

허무함이나 좌절감을 맛본 사람이 내뱉는 뭔가 알맹이가 빠진 허허로운 웃음처럼 보였다.

“아닙니다. 감히 공감한다고는 말은 못해도, 그 기분이 어떤지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번 수강신청 문제로 난리가 났을 때, 제가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했었잖아요.”

“손 과장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지. 아직도 난 그때 사고가 안 난 게 정말 천운이라고 생각해.”

“그때 갑자기 최건우 선생님이 나타나서 사태를 한 번에 해결하는데, 고마운 마음보다는 저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더 들더군요. 그런 일 하나 제대로 수습 못 한 제가 어찌나 한심하던지. 그러고 보면 최건우 선생, 참 재수 없죠?”

“하하하.”

손다정의 진심 반 농담 반이 섞은 마지막 말에 조금 가라앉았던 회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김상문 원장에 이어 다른 과목 강사들의 코멘트도 이어졌다.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김 원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 평가가 비슷했다.

손다정은 지금 보여준 강사들의 반응에 매우 들떴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역사적인 현장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우가 앞으로 만들 학원, 출판사, 그리고 그 위의 또 다른 무엇.

학원 컨설턴트로서 그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이고 영광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대단한 건우에게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 전에 한강 에듀케이션부터 업무부터 마무리해야 한다.

“이제 다른 의견은 없는 것 같으니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의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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