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5화 (35/256)

제35화

꿈을 꾼 다음날 건우는 손다정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무슨 일 있으세요?”

늘 깔끔하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맑고 총명하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손다정은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잔뜩 굳은 채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온 건우의 얼굴을 보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부탁이죠?”

“될 수 있으면 고3이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경찰, 검찰에서 힘깨나 쓴다는 간부 중에 공부에 문제가 있는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사람 있으면 물색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그쪽 계통도 분야도 다양해서요. 정확한 쓰임을 알아야, 최 선생님이 필요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손 과장님도 우리 부모님이 뺑소니사고로 돌아가신 건 아시죠?”

“네. 당연히… 아! 그럼?”

“네. 제가 지금까지 너무 무신경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경찰만 믿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네요. 이러다 사건이 영원히 미궁으로 빠지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건우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상처받은 맹수를 보는 듯했다.

그의 눈빛을 보며 손다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그렇게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당장에라도 적합한 사람을 찾아 대령해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최 선생님은 문제아를 자녀로 둔 경찰이나 검찰 측 간부와 모종의 거래를 해서 부모님 수사에 힘을 실어볼 생각이신 거죠?”

“네. 결론만 말하면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만 없다면 무조건 서울대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조건이면 혹할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낯선 건우의 모습에 손다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건우는 분명 간절해 보였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가지고 손다정을 찾아왔다.

손다정은 그 간절함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렇긴 한데 그런 간부들을 이용하는 방법보다 더 확실한 수단이 있다면 어떡하실래요?”

“방법이 있습니까?”

“장만복 회장님에게 부탁하시면 됩니다.”

“역시…. 손 과장님 생각에도 그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거죠?”

“그럼. 최 선생님도 예상은 하고 계셨나 보네요. 그런데 왜 제게 이런 부탁을 하시는 거죠?”

“직접 만난 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쨌든 지금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첫 만남부터 대뜸 도와달라고 하면 회장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큭! 아니군요. 부모님 일을 해결하는데 제 자존심이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손 과장님도 역시 장만복 회장님께 부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니, 그분께 찾아가서 부탁해야겠죠. 회장님께 연락 좀 넣어주시겠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건우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항상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해결했었고, 누구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런 습관이 새로운 삶을 사는 지금의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손다정을 찾아온 건 거래를 하려는 거였고, 장만복 회장을 찾아가는 건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만복 회장을 찾아가는 게 껄끄러웠다.

건우의 부탁에 손다정은 장만복 회장에게 바로 전화를 넣었고, 지금 바로 찾아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지금 바로 댁으로 오라고 하시네요. 보셨죠? 장 회장님은 당신께서 마음에 든 사람에 대해서는 과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분이라고 했잖아요. 너무 부담가지지 마세요.”

부담가지지 말라고는 해도 부담이 갔다. 자존심은 버리기로 했지만,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아직은 불편한 건우였다.

두 사람은 채비를 마치고 장만복 회장이 있는 서울의 북촌으로 향했다.

“어서 와, 손 과장. 어서 와요, 최 선생. 일단 자리에 앉아요.”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저야 항상 안녕하지요. 그래 손 과장 말로는 제게 할 말이 있다면서요?”

“네. 처음 만나뵙는 자리에서 대뜸 이런 말을 해야 해서 면목없습니다. 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음. 부탁이라.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는 봅시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제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뺑소니범을 잡고 싶습니다.”

“뺑소니범을 잡는다…. 나도 최 선생님 부모님의 안타까운 사고 소식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뺑소니범을 잡는 일을 왜 내게 와서 부탁하는지 모르겠군요.”

장만복 회장은 건우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을 하면서도 짐짓 의뭉을 떨었다.

“사고가 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경찰은 범인에 대한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범인을 잡으려는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아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경찰도 아닌 회장님에게 범인을 잡아달라고 억지를 부리려고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겠죠.”

“네. 저는 올해로 고작 21살입니다. 아직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아주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죠. 경찰을 함부로 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4개월 동안 수사의 진전이 없다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수사가 그들의 수사 우선순위에서 있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뺑소니 사고라면서요? 목격자가 없으면 범인을 잡기가 매우 힘든 게 뺑소니 사고라고 알고 있는데 경찰만 탓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목격자가 나타나야 수사를 하든 말든 할 텐데.”

“회장님 말씀도 맞습니다. 경찰도 수사에 필요한 요식행위는 전부 했을 겁니다. 특히나 비까지 내렸으니 사고현장 보존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억지 부리고 싶진 않습니다. 경찰의 입장 또한 이해합니다. 조사하기 어려운 사건이고, 고생한 만큼의 대가도 따르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니까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나의 힘을 빌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 부모님의 사건을 앞당기고 싶다는 의도인 것이죠?”

“맞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범인을 잡아달라는 어거지가 아닙니다. 그냥 경찰이 최선을 다해 부모님의 사건을 재조사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하다못해 한 달 만이라도 경찰이 최선을 다해 조사해준다면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덜 것 같습니다.”

건우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범인을 잡지 못했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겠는가?

꿈에서 어머니가 흘리던 피눈물만 생각하면,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견디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을 장만복 회장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범인을 반드시 잡아달라고 억지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속내를 감추고 장만복 회장을 움직여야할 때다.

“최 선생이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확실히 이해가 가는군요. 그런데 저같이 힘없는 노인네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

항상 자신감과 자부심이 넘쳤던 건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다정의 조언 때문에 거래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냥 순수하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그 모습을 본 장만복 회장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그런 정도의 힘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최 선생은 제게 무엇을 내놓을 생각인가요?”

“아직 어린 동생들이 있습니다. 동생들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장만복 회장은 건우의 태도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건우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결심한 것이 장 회장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서로 간의 협조가 필요한 사이이기도 했다.

다른 점은 다 마음에 들었는데, 지켜본 결과 과하게 꼿꼿한 모습이 아쉬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 겨우 21살짜리 어린 녀석이 필요할 때는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았다.

부모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도 보기 좋았고, 동생들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도 기특해 보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건우에게 마음의 빚을 하나 지워두는 것도 나중을 위해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도 이미 끝났다.

장만복 회장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우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한번 알아봅시다.”

장만복 회장은 건우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요구사항이 한 가지 있긴 했다.

“최 선생.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내가 본 최 선생의 가능성이 가짜가 아니라면 평생을 동업자로서 동지로서 함께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해지려면 서로에 대한 신뢰도 있어야겠죠. 이번 일은 그냥 나이 많은 늙은 친구가 주는 신뢰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건우에게 한 가지 요구했다.

“그래도 최 선생이 영 찜찜하다면 내가 한 가지 요구하리다. 이제부터 최 선생에게 말을 편하게 하리다. 보통은 나이 많은 사람이 존대하면 어린 사람은 말씀 편하게 하시라고 하는데, 자네는 그런 게 없어서 말일세. 어쩌겠나. 아쉬운 사람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지. 지금부터는 말을 편하게 할 테니 그리 알게. 그리고 조만간 사람 하나가 찾아갈 걸세.”

예전 삶에서도 두 사람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서로에 대한 신뢰도 어느 정도는 있는 관계였다.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할 수 있어도, ‘친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렇게 일정한 선을 유지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건우의 꼿꼿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이번 생에서는 바뀌었다.

***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 장만복 회장의 말처럼 남자가 한 명 건우를 찾아왔다.

190cm가 넘고 유도 선수가 연상될 만큼 덩치가 상당한 거구의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서울지청 광역수사대 1팀장 최광우 경정입니다.”

“네? 광역수사대 팀장이요?”

건우는 자신을 찾아온 남자의 정체를 알고 깜짝 놀랐다.

생각 이상의 거물이 찾아왔다. 서울지청 광역수사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수사관들이 모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곳의 일개 형사도 아닌, 팀장이 직접 찾아왔다.

경정이면 경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총경 바로 아래 계급이다.

경찰서로 따지면 서장 바로 밑의 직급.

그런데 팀장이라는 남자는 기껏해야 30대 중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엘리트 출신이라고 해도 실력이 없으면, 서울지청 광수대 팀장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움직일 정도라면 장만복 회장이 건우를 위해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하. 제가 좀 젊고 덩치도 좋지요? 저를 보면 경찰이 아니라 조폭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죠. 경찰 맞으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일반 형사도 아니고 광수대 팀장님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 최건우라고 합니다.”

“같은 최 씨에 우 자 돌림이면, 먼 친척 관계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광역수사대의 그것도 팀장씩이나 되는 작자가 직접 찾아와서 놀라셨죠?”

“네. 사실 조금 놀랍긴 하네요.”

“그런데 알고 보면 광역수사대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팀장입니다. 그러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광우는 젊은 나이에 경찰 요직을 꿰차고 있는 사람답지 않고 소탈해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하다니요. 저로서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광역수사대에서 뺑소니 사건도 조사하나요?”

“물론 아니죠. 그렇다고 뺑소니가 경미한 사건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워낙 강력범죄가 많은 세상이라….”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사실 관할 경찰서 강력반에서 사건을 좀 더 중점적으로 다뤄 줄 것으로 기대했지, 광수대가 직접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사정은 다 알고 계시니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만복 회장님의 부탁을 받고, 이틀 동안 사건에 대해 저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최 선생님 부모님이 당하신 사기 사건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기 친 수법의 규모나 치밀함을 보면 보통내기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사건이 처음도 아닐 것 같고.”

광우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뺑소니가 절대 우연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받았다.

“혹시 사기 사건을 중심으로 조사하면서 뺑소니도 함께 조사할 계획이신 건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 명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고 제가 중점적으로 조사할 내용은 뺑소니 사건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건우는 뭔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사건과 뺑소니. 이 두 사건은 분명히 별개의 사건인데, 이상하게 자꾸 얽히는 기분이었다.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 봐 망설였지만, 이미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경험한 한 그였기 때문에 그냥 꿈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저… 저기. 최광우 팀장님.”

“뭔가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주저 없이 말씀해 보세요.”

“미친놈처럼 보일 거라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제가 며칠 전에 꿈을 꿨습니다.”

몇 번을 고민하다 건우는 결국, 미친 척하고 며칠 전 꾼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광우는 건우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매우 진지하고 흥미롭게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음.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최 선생님은 사기꾼이 뺑소니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아니 잠깐만요. 팀장님. 팀장님은 지금 제 꿈 이야기를 믿으시는 겁니까?”

“제가 말씀드렸죠. 이틀 동안 최 선생님 부모님의 사건을 조사해봤다고. 실제로 사망 추정 시간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시점에 아버님의 휴대전화에 걸려온 전화가 한 통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광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건우는 자신의 꿈이 어쩌면 꿈이 아니라 현실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차에 치여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모습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졌다.

심지어 부모님이 흘린 피로 사방이 온통 붉게 변하는 모습과 아버지를 애타게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최후까지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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