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멍청한 놈. 결국, 저런 선택을 하는구나. 휘발유야.”
“네. 형사님.”
“로보캅이이라는 놈이 체포에 불응하고 도망가는 거 봤지?”
대머리는 광우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이미 한 번 배신했다. 두 번 못 할 것도 없다.
“그럼요. 봤습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로보캅?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쩌면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경찰관 한 명이 병신이 된 사건인데. 그때 용의자가 로보캅이었습니다. 다행히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습죠. 그게 끝이 아닙니다.”
광우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대머리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이야기했다.
그 대부분은 덩치가 얼마나 악랄한 인간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더는 고민하지 말고 병신을 만들어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어? 그럼 고자 만들러 슬슬 출발해볼까?”
광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머리와 기절한 백 선생에 손목에 수갑을 채워 묶어둔 다음 덩치가 사라진 방향으로 재빨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부르릉 털털털, 부르릉 털털털.
한참을 뛰었을까? 산자락을 잇는 좁은 산길이 끝나고 큰 도로로 연결된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가 나타났다. 덩치는 어떻게든 시동을 걸어보려고 했으나 고장이 났는지 자동차는 이상한 소리만 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쯧쯧쯧. 하여간! 이놈들은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니까. 야, 인마! 그거 시동 안 걸려. 내가 아까 이 차를 발견하고 부품을 빼놨거든.”
그제야 자신이 광우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덩치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개자식!”
“어쭈. 주먹 한 방에 무릎 꿇었던 녀석 주제에 덤비려고? 에이. 괜히 더 얻어맞지 말고 도망가.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뭐?”
“귓구멍이 막혔나. 기회를 준다고. 아니면 여기서 죽도록 맞을래? 열을 센다. 하나, 둘… 하하. 끝까지 예상대로네. 쯧쯧쯧.”
광우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덩치는 죽을힘을 다해 언덕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덩치의 안간힘은 작은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달리는 덩치 옆에 산책 나온 것처럼 여유작작한 광우가 따라붙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헉! 헉! 헉!”
폐가 터질 듯한 고통에 공포심이 더해져 제대로 숨쉬기도 어려웠다.
“너도 역시 그냥 근육 바보구나. 달리기는 전혀 못 하는. 그래도 힘내. 죽을 둥 살 둥 뛰어봐. 이제 목적지에 다 왔으니까.”
의도를 알 수 없는 협박 아닌 협박. 당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주세요’라며 빌고 싶었지만 공포심에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맞아 죽기 싫어서 마지막 남은 안간힘까지 쥐어짜냈다. 속력이 점점 더 빨라졌다.
갑자기 산모퉁이의 급커브길이 나타났다. 풀숲에 교묘히 가려진 아래 절벽이 숨어 있었다.
뒤를 두리번거리며 도망치던 덩치는 뒤늦게야 길이 이상함을 발견했다. 급히 멈추려고 했으나 다리는 이미 힘이 풀렸다.
쿠당탕!!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지면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퍽!!
덩치의 비명이 끝날 때쯤 절벽의 바닥에 뭔가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죽지는 않을 거야. 일부러 적당한 높이를 골랐거든. 평생 병신 신세는 못 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산모퉁이에서 절벽을 내려다보던 광우가 팔과 다리가 뒤틀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덩치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거기 119죠. 용의자가 도주 중에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여기로 구급대원 좀 보내주세요. 여기 위치가 어디냐면….”
전화하는 목소리는 용의자의 상태를 걱정하는 듯 다급했지만,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간간이 미소도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흉살스럽기 그지없는 그런 미소가.
***
수사를 의뢰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보름 전에 단서를 찾았다고 연락이 온 후 깜깜무소식이다. 건우는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지고 답답했다.
자신이 꿨던 꿈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만 해도 범인을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며칠만 지나면 범인과 마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수학 공식처럼 상수만 주어진다고 답이 딱 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범죄에 이용된 차라면, 더군다나 사기꾼이 이용한 차라면 대포차일 가능성이 높다.
만에 하나 자신이 꿈에서 본 자동차와 차량 번호가 사실이라고 해도 대포차의 행방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조그마한 단서가 하나 추가됐을 뿐.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최광우 팀장 그분,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믿고 기다리자.”
광우와 만남 이후, 건우는 광우에 대해 가벼운 조사를 시작했다.
거창한 뒷조사는 아니었다. 인터넷 검색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별생각 없이 구글에 ‘최광우’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했을 뿐인데 관련 기사들이 주르륵 튀어나왔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팀장이라는 알짜배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대 1등은 당연했고, 경찰대 출신으로 사법시험을 패스할 만큼 머리도 좋았다.
사실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일반 대학이라면 모를까 경찰대학이라면 준 군사훈련도 학사일정에 포함된다. 그 와중에 틈틈이 공부해 사법시험까지 합격하려면 보통 머리로는 어렵다.
광우의 화려한 이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국 대학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 무제한급으로 출전해 국가대표 선수를 박살 내버린 일은 꽤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때 결승에서 붙은 국가대표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년 연속 금메달을 딴 무제한급의 최강자였다.
한국에서 무제한급의 최강자라는 건 다른 말로 세계태권도의 최강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무겸전의 천재였다.
그 밖에도 광우가 가지고 있는 에피소드는 제법 되었다. 남들은 평생 한 번도 하기 힘든 강력범죄 해결은 광우에게 흔한 일상이었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으로 고자요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럴수록 국민적 사랑이 높아져 ‘자요’라는 이름의 팬카페가 있을 정도였다.
외국에서 생활하던 건우만 몰랐을 뿐, 동우나 정우도 ‘최광우’라는 이름을 알 정도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변태, 사고뭉치, 또라이 등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수한 사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하나 있었다.
진짜 경찰!
약자를 돕고 나쁜 놈을 때려잡는, 근래 찾아보기 힘든 진짜 경찰이었다.
왠지 이 사람이라면 부모님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줄 것 같은 기대가 생겼었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믿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자 기대는 점점 실망감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베테랑 경찰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라면, 범인을 잡는 일은 완전히 요원한 일이 되지 않을까 기분이 착잡해졌다.
“응. 이건 뭐지?”
기분이 우울해 아무 의욕도 없었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그냥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았던 포털사이트 바나나 창의 실시간 검색어에 새로운 단어들이 순위권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경찰 과잉진압, XX동 사기사건, 사기금액, 500억, 뺑소니
XX동 사기사건이라면 건우의 부모님이 사기를 당했던 그 사건이었다. 게다가 뺑소니라는 단어까지 함께 올라온 것을 보면 건우 부모님과 관련된 사건이 분명해 보였다.
건우는 컴퓨터 창에 ‘XX동 사기사건, 뺑소니’ 이렇게 두 가지 단어를 가지고 검색을 했다.
역시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들이 주르륵 올라오고 있었다.
일단 그중 한 가지 기사를 클릭해 보았다.
[XX동 사기사건 용의자 체포과정에서 과잉대응 논란.]
서울 지역 한 야산에서 XX동 사기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일당 세 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백 모 씨(4X세)와 노 모 씨(3X세)가 경찰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과잉대응이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자 경찰은 정당한 법 집행을 했을 뿐 폭력 등의 행위는 없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서울지방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X일 오후 5시 40분께 서울 XX구의 한 야산에서 XX동 사기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발견하고 체포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최 모 경정(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이 백 모 씨의 머리를 때려 두개골이 골절되는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도주하는 노 모 씨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용의자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목과 팔, 다리까지 골절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 현재 인근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소식통에 의하면 이번 체포과정은 최 모 경정 단독으로 벌인 일이며, 경찰 당국에 어떤 지원요청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요청만 있었다면 용의자는 어떤 부상도 없이 체포할 수 있었지만, 경찰의 호승심 때문에 일어나지 않아도 될 사고가 일어났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인적이 드문 야산이었고, 용의자들은 이미 도주준비를 완료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요청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며 “용의자는 세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은 칼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과격한 대응은 불가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체포된 휘 모 씨의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어떤 과잉 대응도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최 모 경정은 과거에도 체포과정에서 용의자에게 중상해를 입힌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해, 논란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체포 과정을 접한 누리꾼들은 “심하다. 폭력 경찰.”, “우리나라에 아직도 이런 미개한 경찰이 있다니 큰일입니다.”, “저런 경찰은 당장 옷을 벗겨야 한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준이 아직도 이 모양인 사실에 화가 난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조가일보 / 진XX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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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총 2025개.]
원색****님 – 다른 기사 봤는데, 저놈들 완전 사기꾼. 사기금액이 500억 원이 넘어간다고 함.
환웅****님 – 난 항상 궁금한데, 기사에서 나오는 누리꾼들의 반응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은신****님 - ㅋㅋㅋㅋㅋ 기자가 삐쳤음. 너 한번 엿 먹어 봐라 기사임.
난3종****님 – 방금 다른 기사 봤는데, 뺑소니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고 함.
일루****님 – 헐. 그럼 결국 사기꾼에 살인자라는 이야기잖아. 경찰이 완전 잘했네.
쉬라****님 – 그런데 목이 부러졌는데 살 수 있나요?
천공****님 – 살 수야 있겠죠. 대신 하반신 불구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네듀****님 – 천벌을 받았네요. 그런데 경정이 아니라 경장 아님? 무슨 경정이 범인을 체포해요? 경정이면 엄청 높은데.
워터****님 – 경정 맞아요. 좀 똘끼있는 경찰로 유명. 고자요정 모름? 그래도 피해자에게는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함.
쿤다****님 – 최 모 경정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ㅎㅎ
기사를 읽는 건우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리고 용의자들이 큰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는 기분을 느꼈다.
건우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른 기사들도 클릭해봤다.
[500억 규모의 XX동 사기사건 유력 용의자 체포]
지난 8월 말에 일어난 XX동 사기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되었다. 피해액은 500억 원 규모이며, 피해자만 300명이 넘는 대형 사기사건….
[XX동 사기사건의 용의자, 살인죄까지 추가]
오늘 XX동 사기사건의 용의자가 체포되었다. 소식통에 의하면 오늘 체포된 용의자들은 지난 9월에 있었던 뺑소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부부인 피해자들은 용의자에게 사기를 당한 후 그들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녔고, 집요한 추격 끝에 자신들의 은신처 근처까지 찾아오자 증거 인멸을 위해 뺑소니를 위장해 살인사건을 저질렀다고 한다.
[사기 금액 절반 이상 회수]
체포된 용의자 중 한 명인 휘 모 씨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사기 금액 회수에도 박차를 가하고….
[XX동 사기사건 피해자들 희망의 찬가]
……XX동 사기사건의 피해자들이 용의자 체포 소식에 큰 기대를 나타냈다. 사기사건 대책본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피해자만 300명이 넘으며, 그중 5명은 좌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XX경찰서 강력반 김 모 경위 전격 체포]
조금 전 서울지방경찰청 내사과에서 XX경찰서 강력반 김 모 경위를 체포했다. 취재결과 김 모 경위는 XX동 사기사건의 용의자에게 금품을 제공 받고 수사에 혼선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 정도 규모의 사기사건에 겨우 경위 한 명만 연관되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의문을 나타내며, 혹시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형태의 체포는 아닌지 우려 섞인 시선을 던졌다.
[천벌인가?]
XX동 사기사건으로 체포된 용의자 중 한 명인 노 모 씨는 9월에 있었던 뺑소니 사건에서 자동차를 몰고 직접 사람을 친 것이 다른 용의자인 휘 모 씨의 진술에 의해 밝혀졌다.
한편 노 모 씨는 경찰과의 대치과정에서 도주 중 절벽으로 떨어져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수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천벌’이라며 환영의 의사를 표했다….
올라온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으니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점점 더 실감났다.
띠링.
때마침 건우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최광우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지금쯤이면 용의자 체포소식을 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워낙 경황이 없어 미리 연락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자세한 말은 할 수 없지만, 이번 체포 과정이 최 선생님께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광우의 문자였다. 며칠간 그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자세한 말은 할 수 없다는 건, 아마 용의자의 부상을 뜻할 것이다.
자신이 고의로 했다고 해도 문자로 그 사실을 남길 수는 없는 법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충분히 그 뜻이 전해졌다.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동생들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우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체포과정에서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하니 마음속 울분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