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호호호. 표정을 보니 여기서 더 겁을 줬다간 학원 강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잔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공적인 이야기를 좀 할까요?”
“헉!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으셨어요?”
“당연하죠. 이번 달에 출시된 초초교육 참고서 때문에 의견이 필요해요.”
“아! 그거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반응은 괜찮던데, 다른 반도 다르진 않겠죠?”
반응이 좋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했다. 단순히 반응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대박을 치느냐가 관건일 뿐이었다.
“물론이죠. 다들 반응이 장난 아니에요. 처음 약속대로 아직은 학원 수업 듣는 학생들만 대상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벌써부터 개인적으로 판매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어요.”
“그래요? 그럼 슬슬 카피본도 돌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죠. 학원은 등록하고 싶어도 정원이 이미 찼고. 학원 수강생 아니면 책을 구할 방법은 없으니까요. 참고서를 출시한 지 이제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다른 출판사나 학원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있어요.”
“그럼 카피본이든 뭐든 벌써 책을 입수했다는 이야기네요.”
건우가 만든 참고서에 대한 반응은 확연히 갈렸다.
한 부류는 얼토당토않다며, 정통성에서 벗어나 사이비에 가까운 교습법이라며 애써 무시했다.
이 같은 학원은 대부분 나이가 좀 있는 강사가 중심이 된 곳인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부류는 건우의 참고서가 얼마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지 순식간에 판단을 끝내고, 한강 에듀케이션에 적극적으로 어프로치 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대응이 늦어지면 자칫 학원 경쟁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게 그들의 냉정한 평가였다.
마지막 부류는 관망의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굉장한 참고서로는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교육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은 결국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하는 그들이 자신들이 수십 년 동안 알고 있었던 지식을 위협하는 새로운 교습법에 호의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시간이 지나가면 변화는 생기겠지만, 출시한 지 한 달도 안 된 책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손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네.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요.”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뇨. 문제는 아니죠. 너무 잘되고 있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원래 한강 에듀케이션에 두 달간 참고서 사용 독점권을 주기로 했잖아요.”
“그랬죠.”
“그걸 그냥 없애버렸으면 해서요.”
“괜찮겠어요?”
예를 들어 참고서가 필요한 학생 수가 100이라면, 독점을 주든 아니든 어차피 올해 안에 95 이상은 책을 살 거라는 게 건우의 생각이다.
그러니 건우로서는 뭐가 돼도 상관없다. 대단한 자신감이긴 하지만, 누구도 그 자신감을 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네. 지금 상황을 보면 그게 오히려 이득일 것 같아요. 처음에 참고서 독점 계약을 한 이유가 한강 에듀케이션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렇긴 했죠. 수강 등록하는 학원생들 자체가 부족했으니 참고서를 미끼로 학원 등록을 늘리겠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죠.”
“맞아요. 그런데 이미 수강생은 넘쳐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굳이 참고서 독점을 하지 않아도 수강 신청자가 줄거나 그러진 않을 것 같아요. 물론 그것도 전부 최.건.우. 선생님 덕분이지만요.”
손다정은 건우의 이름을 스타카토로 또박또박 끊어 읽으며 강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경이로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 스카우트를 하려고 결심을 했을 땐 이 정도로 엄청난 보석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건우를 만나고 겨우 몇 달 만에 한강 에듀케이션은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학원으로 발돋움했다.
어머어마한 변화이며,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하하하.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 덕분인 건 맞죠.”
“호호호. 하나도 안 재수 없어요.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더 이상의 참고서 독점은 필요 없을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거네요. 물론 독점을 완전히 풀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요.”
“그래요. 그것 때문에 협의가 필요해서 찾아온 거예요.”
“음…. 독점을 완전히 풀지 않을 거라면, 다른 학원과 제휴를 하겠다는 건가요?”
건우 입장에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20여 년의 학원 강사 경력이 있었고, 그런 그의 경험을 통해 교습법뿐만 아니라 학원 생리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역시! 맞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몇몇 학원에서 문의가 들어왔어요. 그중에는 귀가 솔깃한 제안을 한 곳도 있어요. 그래서 좀 더 파이를 키워보는 건 어떨까 싶네요.”
“파이를 키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 텐데요. 독점권을 주는 방법도 있고, 제휴하는 방법도 있고. 제휴를 넘어서서 회사처럼 합병할 수도 있겠죠. 뭘 생각하고 계신 거죠?”
“솔직히 독점권을 주는 건 좀 아까워요. 제휴나 합병이 될 수도 있고, 분점 같은 형태가 될 수도 있어요. 아직 구체적인 협의는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그전에 최 선생님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손다정도 이렇게 급박하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다.
“파이를 키운다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좀 빠르군요. 참고서가 나온 지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그들도 대박을 꿈꾸며 모험을 하는 거겠죠. 지난번 일명 수강신청 대란 때, 뉴스까지 타면서 우릴 주목하는 시선이 엄청나게 늘었어요.”
학원이 정규방송 뉴스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부터 대단한 사건이었다.
시청률이 5%라고만 해도 수백만 명이 한강 에듀케이션 관련 뉴스를 봤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각종 게시물에도 도배되다시피 했으니 학원 이름만큼은 제대로 알려졌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메이저 학원은 당연히 빠졌겠죠?”
“당연하죠. 설령 그런 곳에서 제의를 해왔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는 힘들겠죠. 욕심부리다가 오히려 먹힐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그건 동감이에요.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고 해도, 대략적인 밑그림 정도는 그렸겠죠?”
“네. 송파구, 서초구, 양천구처럼 강남구 못지않게 교육열이 뜨거운 지역. 그리고 분당과 일산, 지방의 대도시. 이런 지역의 학원 한곳과 어떤 형태든 업무협조를 하는 게 기본 골자에요. 또….”
“그런데 손 과장님.”
건우가 갑자기 손다정의 말을 끊었다.
“네?”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했던 제안 이제 슬슬 선택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아…!”
손다정의 활약은 대단했다. 건우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을 정도로.
그런데 일의 규모가 너무 커지고 있는 게 문제였다. 손다정은 어디까지나 한강 에듀케이션 소속. 따라서 그녀가 최우선 하는 건 건우가 아니라 한강 에듀케이션의 이익이다.
물론 건우도 이제는 한강 에듀케이션 지분 중 10%를 가지고 있는 주주 입장이지만, 그래도 주체가 한강 에듀케이션이 되느냐 건우가 되느냐는 굉장히 다르다.
“원래는 올해까지 선택의 기회를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커졌네요. 다른 학원과의 제휴든, 합자이든 주체는 제가 앞으로 운영할 초이즈초이스 에듀가 되었으면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결국 한강 에듀케이션도 초이즈초이스…. 아! 이건 너무 길어요. 그냥 줄여서 초이스 에듀라고 할게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만약 최 선생님이 합자의 주체가 된다면 한강 에듀케이션 또한 초이스 에듀의 분점으로 전락하겠군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한강 에듀케이션에서 건우의 비중이 너무나도 커졌다.
건우는 한강 에듀케이션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한강 에듀케이션은 이제 건우 없이는 안 된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어차피 두 곳 모두 가장 큰 투자자는 장만복 회장님이잖습니까. 그분 입장에서야 지분 비율이 높은 초이스 에듀가 하루빨리 컸으면 하고 바라고 계실 걸요.”
“그렇기는 하죠. 한강 에듀케이션은 지금 상태로 유지만 해도 큰 성공이니까요.”
어쩌면 냉정한 것 같지만, 건우의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한강 에듀케이션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건우가 학원을 세워 강북으로 건너가도 주말 특강 등을 통해 지속적인 관계는 유지할 것이다. 그 정도면 그가 한강 에듀케이션에 할 의리는 모두 지킨 셈이다.
장래성을 봐도 학원 간의 제휴 또는 합자 사업이 더 큰 이익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학원 제휴 권한까지 한강 에듀케이션 넘겨준다면 그건 의리남이 아니라 호구다.
“컨설턴트로서 손 과장님이 할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러니 이젠 제대로 선택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래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전 그럼 강의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건우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강의를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손다정은 건우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 예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컨설턴트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동안 꿈꿔왔던 이상적인 학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망설여졌다. 건우의 능력이 너무 출중해서다.
사실 손다정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건우와 함께라면 대한민국 최고의 학원을 만들 수 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건우만 있으면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손다정은 그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올리는 게 아닌지 걱정됐다.
“휴…. 지금은 어떤 결론도 내리기 힘들다. 이따 집에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멍한 얼굴로 주인도 없는 건우의 사무실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손다정은 물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우와 세상에! 이게 전부 큰형에게 온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야?”
건우의 사무실에 들어선 정우는 안에 있는 엄청난 선물의 양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뒤에서 따라오던 동우와 은우의 반응도 정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흥. 언니들도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두 남자와 달리 은우의 표정은 뾰로통했다. 누가 봐도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쭈! 너 지금 질투 하냐?”
“질투 아니거든! 그냥 사실을 말한 거야. 솔직히 우리 큰오빠가 멋있긴 하잖아.”
“그래그래. 다들 항상 건우 형만 찾아라. 정우도 은우도 말끝마다 건우 형이야. 쳇!”
“에이, 왜 그래 형. 그래도 작은형이 큰형보다는 만만해.”
동우가 삐친척하자 정우가 그런 동우를 위로하기 위해 나섰다.
“뭐? 만만해? 지금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하하하. 만만하다는 게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잖아. 큰형은 가끔 엄청난 카리스마를 보일 때가 있단 말이야. 그럴 땐 솔직히 좀 무서워. 아빠보다 더.”
“쯧. 결국, 만만하다는 뜻이네.”
“칫! 작은오빠야말로 질투쟁이 같아.”
“뭐? 야! 꼬맹이. 그나저나 넌 왜 초콜릿 없어?”
“작은오빠. 설마 오늘 초콜릿 하나도 못 받은 거야?”
“아…아냐. 내가 큰형만큼은 아니라도 어…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은우의 예리한 질문에 당황한 동우가 말을 더듬었다. 8살이 된 은우는 예전보다 말발이 더 좋아졌다.
“막내오빠는 초콜릿 받았지?”
“그럼. 난 그래도 한 10개는 받았어.”
“역시 막내 오빠는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다 어떻게 했어?”
“몇 개는 친구 나눠주고, 몇 개는 가방에 챙겼지. 그런데 형 사무실을 와보니 괜히 챙겨왔다 싶긴 하네.”
“작은오빠도 들었지?”
“뭘?”
은우가 웃음을 지으며 동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의 눈은 재미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모습 닮았다.
“막내오빠는 초콜릿 챙겨왔다잖아. 작은오빠는 어떻게 했어? 인기 많았다면서? 그럼 많이 받았을 거 아니야?”
“마! 나…난 다 먹었지. 기집애 너는 요즘 왜 그렇게 집요해.”
“알았어. 난 착하니까 작은오빠 말 믿어주기로 할게.”
“믿어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믿어! 우리 그러지 말고 형 선물이나 뜯어볼까? 이거 형 혼자서는 다 뜯지도 못할 것 같은데. 어때?”
동우는 은우의 집요한 질문에 당황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건우의 선물이 많이 쌓여있는 왼쪽 창가로 다가갔다.
“큰형한테 또 혼나려고.”
“괜찮아. 형도 이런 건 괜찮다고 할 거야. 어디 보자. 오! 이거 참 특이하게 생겼는데. 상자만 해도 정성이 어마어마하다. 뭐가 들었는지 한 번 뜯어볼까? 왠지 엄청나게 맛있는 초콜릿이 들어있을 것 같아.”
정우가 말렸지만 동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창가에 있는 선물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하트모양의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이 참! 하여간 작은형은.”
하지만 정우도 궁금했는지, 말로는 말리는 척하며 동우에게 다가섰다. 포장지가 풀리고 상자가 열렸다.
“헉! 뭐야 이게. 이거 여자 속옷 아니야?”
“어…어. 그…그렇지? 속옷 모양으로 된 초콜릿이 아니라 진짜 속옷이지?”
“어라! 뭔가 이상하네.”
“뭐가?”
어느 틈엔가 은우도 두 사람의 행동에 참여했고, 뭔가를 발견한 듯 속옷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우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동우와 정우는 감히 시도도 못 할 일.
“속옷을 왜 선물하는지 모르겠는데, 저 속옷 꼭 입던 것 같아.”
“뭐? 입던 속옷이라고?”
야릇한 상상으로 동우와 정우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진짜야. 새 속옷 아니야.”
“그…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금 여기서 보여줄 순 없지만 아무튼 알아. 작은오빠는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윽! 더…더러워. 어떻게 입던 속옷을. 되게 변태 여자인가 봐. 그냥 큰형이 보기 전에 버리자.”
“그러자. 에이 눈만 버렸네. 찝찝하게 시리.”
입던 속옷을 벗어주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모르던 3남매는 보기만 해도 찝찝한 그 물건을 재빨리 상자에서 꺼내 휴지통에 버렸다.
과감한 재수생이 야릇한 기대를 하며 동봉했던 그녀의 속옷은 그렇게 원래 가야 할 주인에게 도착도 하기 전에 무참히 버려지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