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41화 (41/256)

제41화

밸런타인데이는 끝이 났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 받고 기뻐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기다리던 그녀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큰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가끔은 예의상 주는 초콜릿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행복해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아무 관심도 없는 척 천 원짜리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한강 에듀케이션의 밸런타인데이 또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큰 탈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숨어 있었다.

2월 14일이 지나고 며칠 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손다정이 바로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조그마한 이야기가 돌았다. 건우와 손다정이 사귄다는 정도의 가벼운 가십이었다.

이런 정도의 소문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을 또는 연예인을 대상으로 별의별 상상을 다 한다.

그런 식의 상상이 소문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보통은 며칠 가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된다.

두 사람과 관련된 소문도 그런 줄 알았다. 딱히 해명도 필요 없는 그냥 그렇고 그런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은 눈덩이처럼 거침없이 불어나 확대재생산 되었다.

구체적인 증언과 목격자가 등장했다.

최건우와 손다정이 사귄다니, 말이 안 된다. 두 사람 나이 차가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하지만 손다정이 밤늦게 최건우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웃기지 마라. 그냥 업무관계로 늦게까지 머문 것일 거다. 학생들도 들락거리는 사무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냐.

이 정도의 소문은 그냥 약과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두 사람이 모텔 간 것을 본 사람이 있다더라.

그놈의 카더라 통신. 본 사람을 데려와라. 직접 물어보게.

최건우 나이는 많아 봤자 20대 중반이다. 30대의 늙은 손다정이 무슨 약점을 잡은 게 아니면 두 사람이 그런 사이로 발전할 리가 없다.

알고 보니 손다정이라는 여자 완전 걸레라더라. 웬만한 학원 강사와는 전부 잤다고 한다. 남자 없으면 잠도 못 잔다고 하더라.

건우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더니 젊은 남자 맛을 알아서 요즘은 학원생을 후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카더라. 카더라. 카더라. 소문은 점점 커져,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런 악담까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문이 소문으로 그치지 않고, 학부형들과 강사들 사이에도 소문이 퍼지면서 일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문이 진실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결국, 한강 에듀케이션의 김상문 원장이 손다정을 불렀다.

“손 과장 어서 와. 바쁜데 내가 부른 건 아니지?”

“괜찮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도 압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다정도 이미 자신과 관련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정말 참담한 기분이 들 정도로 괴상망측한 소문들이었다.

여자로서 자존심도 상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건우에게 스캔들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은 꿈에라도 몰랐다.

너무 조심성이 없었던 건 아닌지, 상상력이 넘치는 고등학생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지 스스로 자책했다.

소문을 듣고 얼마 후 김 원장이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예상이 되었다.

입시전문학원의 특성상 수강생 대부분은 미성년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성 문제와 관련된 스캔들을 일으켰다면 원장 입장에서는 간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뭐라고 그러려고 부른 게 아니니 너무 긴장할 것 없어.”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미성년자들이 대부분인 곳에서 제가 좀 더 행동거지를 바르게 했어야 했어요.”

“어허. 그 사람 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어디 손 과장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인가? 시간이 약이다 생각하고 조금만 참게. 아니면 내가 휴가라도 며칠 줄까?”

원래 이러려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손다정을 믿었기 때문에 크게 나무랄 생각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옷차림이나 행동거지에 조금 더 신경을 쓰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죄송하다고 나와 버리니, 김상문 원장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한강 에듀케이션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다정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녀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소문이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이제 서른넷이다. 서른 중반이면 기분 나쁜 일이 생겼다고 직장을 그만둘 만큼 철없을 시기가 아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차라리 소문이 반가웠다. 건우의 제안에 무척이나 끌렸지만 한강 에듀케이션이 마음에 걸렸다.

건우를 따라가는 게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한 배신은 아닌지 고민이 됐다.

어쩌면 마땅한 명분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뜬금없는 스캔들은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아니. 이보게, 손 과장. 사람이 왜 이렇게 경솔하나? 이게 나간다고 될 일이 아니잖은가?”

단호한 손다정의 결정에 김상문 원장은 무척 당황했다.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건우 덕분에 한강 에듀케이션이 정상화되었지만, 건우를 찾아서 데려온 사람은 손다정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학원 업무의 전반을 맡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많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허. 손 과장.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어쩌자는 건가? 그동안 한강 에듀케이션 위해 노력한 시간이 아깝지도 않나? 그리고 당장 그만두면 우리 학원 업무에도 큰 차질이 생길 거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꼴이 됐다.

“조만간 회사에서 제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보낼 겁니다. 그때까지는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한강 에듀케이션과는 계속 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건우 선생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소문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김상문 원장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선후관계를 살짝 바꿨다. 건우와도 이야기를 끝냈다.

“뭐! 최 선생에게?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은 인연인가 보네. 자네가 최 선생을 스카우트했는데, 이번엔 반대로 자네가 오히려 스카우트되어 가는 건가? 허허허. 그럼 잘 돼서 가는 거 맞지? 나쁜 소문 때문에 그만두는 게 아니라.”

김상문 원장은 어떻게든 손다정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건우와 함께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득을 포기했다.

손다정은 분명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가능성만 본다면 한강 에듀케이션보다 건우와 함께 일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더 죄송합니다.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한 컨설팅을 완전히 끝내고 떠났어야 했는데.”

“아니야. 최 선생과 한강 에듀케이션이 관련된 일은 앞으로도 계속 손 과장이 할 거 아닌가? 그걸로 충분해. 손 과장처럼 믿을만한 사람이 우리 일을 맡아서 한다면 걱정도 없고 좋지. 그러니 죄송할 것 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도 되네.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잖은가.”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원장님.”

손다정의 처지를 이해해준 김상문 원장 덕분에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원장실을 나설 수 있었다.

한강 에듀케이션을 빠져나온 손다정은 곧바로 장만복 회장을 만나러 갔다.

사실 이번 컨설팅의 진짜 의뢰자는 장만복 회장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할 테지만, 일단은 찾아가서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였다.

장만복 회장도 당연히 손다정의 선택을 지지했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건우와 손다정이 보여준 성과 또한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 관계가 바뀌게 됐다. 손다정은 이제 컨설팅회사에서 파견한 컨설턴트가 아니라, 장만복 회장이 투자하고 건우가 운영하게 될 학원의 실무책임자가 된다.

건우와 손다정은 업무적으로 더욱 긴밀해질 테고, 젊고 유능한 두 사람이 만들어낼 시너지 효과가 어쩔지 기대가 컸다.

손다정은 마지막으로 컨설팅 회사에 사표를 내면서 자신의 신변정리를 모두 마쳤다.

자유인의 신분이 됐다. 완전히 홀가분한 건우를 찾아갔다.

“어서 와요. 정리가 완전히 끝났나 보네요. 표정이 홀가분해 보여요.”

“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정하고 나니 마음은 편하네요.”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저도 확실한 제안을 드려야 할 시간이군요. 일단 저와 손다정 씨밖에 없는 회사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죠. 우선 지분의 0.5%를 계약금 명목으로 드릴 겁니다. 500억 투자에 대한 대가로 장만복 회장님에게 30%의 지분을 나눠줬으니, 0.5%면 대략 8억 원 정도의 가치가 될 겁니다.”

이제 과장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호칭을 ‘손다정 씨’로 바꿨다.

“좀 더 정확히 하면 약 8억 3천만 정도 되네요. 계약금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요. 사실 전 0.1%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손다정 씨에게 이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해요.”

8억 3천만 원은 굉장히 큰돈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건우가 생각하는 손다정의 가치는 그것보다 훨씬 컸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더 중요했다.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본 건우에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다.

그렇다고 손다정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믿을 수 있어도 돈은 믿을 수 없다.

건우의 경험에서 우러난 불편의 진리였다. 그래서 돈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직급은 이사 겸 기획실 실장으로 정하겠습니다. 스카우트되어 오신 건데 과장보다는 직급이 높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드라마에서만 보던 실장을 실제로 보게 되는군요. 하하하.”

“호호호. 실장도 나쁘지 않긴 한데 왠지 어색해요. 드라마 속 실장은 대부분 남자 역할이잖아요. 게다가 재벌 2세가 대부분이고. 저는 실장보다는 팀장이 편할 것 같아요.”

“본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손 팀장이라…. 그럼 기획실이 아니라 기획팀이라고 해야겠군요. 저도 앞으로 손 팀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팀도 없는 팀장이라 미안합니다. 팀원 구성을 포함한 실무진 고용은 전부 손 팀장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처음부터 실무는 손 팀장님이 맡기로 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용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저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계약금이나 직급 그리고 연봉문제까지 모두 논의한 이후 고용 계약서를 작성하기 직전, 손다정은 평소에 생각해왔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조건이요? 그게 뭔데요?”

“명칭을 좀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명칭이요? 무슨 명칭을 말하는 거죠?”

“학원 이름이 너무 길어요. 학원 이름은 임팩트가 중요해요. 초이즈초이스 에듀는 발음하기도 어렵고 선뜻 와 닿는 느낌도 없어요. 초초에듀라고 하면 꼭 장난 같기도 해요. 물론 고심해서 지었다는 건 잘 알아요. 그런데 좀 더 부르기 쉬웠으면 좋겠어요.”

“생각해둔 이름이 있나요?”

“그냥 Choi’ce라고 쓰고 초이스라고 읽는 건 어떨까요? 일종의 합성어 같은 거죠. 그런 경우들 종종 있잖아요. 그냥 한글로 발음이 비슷하니 초이스에 Choi’s와 Choice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넣는 거예요. 그렇게 줄여서 초이스 에듀. 의미도 있고 부르기 쉬워서 좋은 것 같아요. 원래의 뜻에서 아주 벗어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때요?”

“원안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네. 이상해요. 초이즈초이스 에듀도 그렇고, 초초교육도 그렇고 아무튼 제 경험상 학원 이름으로는 별로예요. 그냥 최건우 선생님 혼자만의 학원이라면 상관이 없겠죠.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출판사를 인수할 수도 있고, 며칠 전 논의했던 것처럼 제휴를 통한 학원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도 있어요. 그런 것까지 생각한다면 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다 넘어갈 수 있어도, 학원네트워크를 구성할 땐 걸림돌이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손 팀장님이 처음으로 건의한 내용인데 받아들여야겠죠. 뜻을 완전히 없애는 것도 아니고, 단어를 합성해서 더 간편하게 하자고 하는 데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 제가 운영하는 장학회 이름은 그대로 뒀으면 합니다.”

“네. 그건 전혀 문제없어요. 학원 내규 상으로도 Choi’ce는 Choi’s와 Choice의 합성어라고 분명히 설명해 놓을 생각이에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만든 이름이지만, 건우는 쿨하게 손다정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초이즈초이스 에듀라는 명칭은 자신이 생각해봐도 발음이 쉽진 않았다. 동생들도 이상하다며 놀리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손다정은 10년 가까이 학원 전문 컨설턴트 일을 해온 베테랑이다. 독불장군처럼 학원을 운영할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안목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명칭은 정리했고, 다른 조건도 있나요?”

“아니요. 학원 명칭만 바꾸면 돼요. 다른 건 차차 생각해볼게요.”

“알겠습니다. 자! 그럼 손 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최 건우 선생님.”

이제 건우가 세웠던 미래 계획이 진짜 시작된다. 아직은 두 사람뿐이지만 왠지 가슴이 벅찼다.

건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잘 부탁한다는 짧은 말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손다정도 따뜻한 시선으로 건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굳세게 마주 잡은 두 손이 힘차게 흔들렸다.

초이스 에듀는 그렇게 두 사람의 악수와 함께 힘찬 출발을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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