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43화 (43/256)

제43화

“그래도 상당히 많이 올랐을 텐데. 정말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회장님.”

“어허. 그 사람 참. 그렇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니까. 허허허.”

건우가 정말 순수하게 기뻐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괜히 민망해진 장만복 회장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파격이라도 해도 따지고 보면 초기 구매가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이윤을 얻은 셈인데, 저렇게 기꺼워하며 순수하게 고마움을 전하니 민망할 만도 했다.

“직접 와서 보니까 손 팀장님이 그런 아이디어를 낸 이유를 알겠군요.”

“맞아요. 땅값까지 생각한다면 12층짜리 건물 두 채를 짓는 게 아무래도 벅찰 수 있으니까요.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 건물 한 동의 1/3가량을 상가로 돌리면, 자금은 확실히 여유가 생겨요.”

토지 면적만 1,000평이 넘는다. 개발 요충지임을 고려하면 땅값만 최소 400억 원. 투자받은 금액이 500억 원이니 땅값을 빼면 100억 정도가 남는다.

100억 원은 물론 큰돈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돈으로 12층짜리 건물 두 동을 못 지을 것도 없다.

그러나 건우는 아무 멋도 아름다움도 없는 무미건조한 깍두기 모양의 건물을 지을 생각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학원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 명성에 걸맞은 건물을 짓고 싶었다.

초이스 에듀라고 하면 ‘아!’ 하면서 그 건물의 모습을 떠올릴 만큼 인상적인 디자인을 가진 건물을 원했다.

마치 ‘서울대’라고 하면 정문의 ‘샤’모양의 조형물을 떠올리듯.

그리고 건물 짓는 데만 쓰려고 받은 500억 원이 아니다. 학원 설비와 인테리어도 해야 하고, 출판사도 인수할 예정이다.

또한, 동영상 강의를 쉽게 재생시킬 수 있는 모바일 앱에 대한 투자도 계획에 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재 아인슈타인 박사도 자기의 관심분야가 아니면 어린 아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런 면에서는 건우도 많이 닮았다. 특히 손다정을 스카우트한 이후 그녀에게서 보고를 받고 의논도 하지만, 깊이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학원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건물을 짓는 것에는 관심이 있어도, 그 세부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이런 장소에, 저런 디자인으로 건물을 지었으면 좋겠어요. 나머지는 손 팀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어쩌면 너무 신뢰해서, 어쩌면 무관심해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간단하게 몇 가지 요청만 하고 나머지는 손다정에게 모두 맡겨버린다.

그럼 그녀는 건우의 요청을 하나라도 더 들어주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눈높이에 맞춰 요청에 맞추다 보니 비용은 점점 늘어났고, 건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손다정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추가로 투자받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건우가 내켜 하지 않았다. 돈은 더 못 빌려오게 하면서 투자금 이상의 결과물을 원했다. 내면이 40대라고 해도 세상 물정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손다정이 생각해낸 방법이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건물 중 일부를 상가로 임대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론 돈을 빌린 것이지만 지분을 건드리지 않아도 돼서 건우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요. 고생하셨어요. 상가를 받을 때는 학생들이 항상 오가는 곳이니 업종에 신경 쓰시고요. 웬만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곳으로 받으세요. 물론 손 팀장님이 알아서 잘하겠죠. 하하하.”

손다정은 속에서 욱하는 뭔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요즘 와서 ‘손 팀장님이 알아서 잘하겠죠’라는 말만 들으면 속에서 신물이 나는 것 같았다.

학생들에게 무해하면 됐지 도움까지 바라는 건 너무했다. 대체 어떤 상가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지 그것부터가 막막했다.

억지로 찾으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런 곳은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사실이다.

멀티방이나 PC방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분식집이나 아이스크림 가게 정도는 고려했었다.

그런데 ‘웬만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곳이라니. 그 ‘웬만하면’이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학생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으니 분식집도 괜찮은 건가? 알 수가 없다.

‘중고서점인 알라딘 같은 곳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소아청소년과를 진료하는 병원을 들여야 하나? 아니면 청소년 상담소나 명상을 가르치는 그런 곳? 그런데 그런 곳이 장사가 될까? 비싼 임대료를 내고 들어오려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네. 아! 대체 웬만하면이 뭐야! 웬만하면이! 어휴. 혈압 올라!’

손다정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건우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심하기 시작했다.

***

햇빛 한 점 들어올 수 없는 지하의 넓은 사무실. 책장, 탁자, 책상, 의자 그리고 컴퓨터까지 사무실에 있는 모든 가구와 사무용품까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검은색 슈트를 입은 사람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잘생긴 남자였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주변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의 붉은 입술은 흑백 톤의 사무실 속에서 핏빛처럼 새빨갛게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 장면. 그러나 절대 과거의 회상 장면이 아니다.

한 치의 오차도 어긋나는 것을 싫어하는 이곳 주인의 성격이 만들어낸 풍경일 뿐.

그가 바로 세계교육의 박유하 이사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물어볼 게 있어서요. 지난번에 지시한 대로 최건우라는 강사에 대해 조사는 진행 중입니까?”

원래 박유하 이사와 정도식 실장은 건우에 대한 조사를 유보했었다. 운 좋은 애송이일 줄 모르니 좀 더 지켜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정이 급격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건우가 만든 참고서가 문제였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 시대를 뛰어넘은 혁신적인 내용의 참고서라고 평가받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두 사람의 생각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건우는 절대 운 좋은 애송이가 아니었다.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이었다. 높은 수능 적중률은 어쩌다 걸린 운이라고 치부하더라도, 새롭게 나온 참고서는 그냥 운 따위로 만들어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 과목도 아니고 여섯 과목이다. 무려 여섯 과목의 참고서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조만간 폭발적으로 관심이 늘어날 것은 분명했다.

이제 와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이미 늦은 일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미리 알았다고 해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왜? 건우가 만든 참고서가 그만큼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대책을 마련하려면 그에 필적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건 세계교육 역량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유하 이사는 자신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늦었지만 정도식 실장을 불러 건우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지시했다.

참고서에는 변수를 줄 수 없어도, 사람에게는 변수를 줄 수 있다.

그게 같이 손을 잡고 동업을 하는 방법일 수도, 아니면 수단을 가리지 사람을 망가뜨리는 방법일 수도 있다.

최종 판단은 조사가 끝난 후에 결정할 생각이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정도식 실장은 자신이 가지고 온 두툼한 서류를 박유하 이사에게 건넸다.

“어디 쓸모 있는 정보가 좀 모였습니까?”

“완벽하게 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는 있었습니다.”

“그래요? 어떤 정보입니까?”

“일단은 최근 한강 에듀케이션에 재미있는 소문이 하나 돌았습니다. 최건우 선생과 손다정이라는 컨설턴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그런 소문이었습니다.”

“손다정 과장을 말하는 겁니까?”

정도식 실장의 입에서 손다정의 이름이 나오자 박유하 이사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

“네.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아! 조금. 그냥 안면만 있는 사이입니다. 아무튼, 그래서요?”

조금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한때는 꽤나 깊이 사귀는 사이었으니까.

서로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세계가 너무나도 크게 달라 예전에 헤어지긴 했다.

그래도 그가 만났던 여자 중에 가장 대화가 잘 통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멋진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스무 살짜리 어린 남자와 스캔들이라니, 왠지 모를 불쾌감이 올랐다.

“학원 내에서 최건우 선생에 대한 인기가 워낙 폭발적이라서 그런지 소문이 엄청나게 부풀려졌습니다. 그 때문에 손다정 과정은 한강 에듀케이션 컨설팅 업무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흠. 설마 둘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볼까요?”

솔직히 호기심이 일었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정도식 실장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어쨌든, 뜬소문 때문에 일을 그만둔 것이로군요. 그건 좋은 일입니다. 손다정 과장. 일에 있어서만큼은 똑소리가 날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사님. 그게 또 그렇게 안심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요? 무슨 다른 일이 생겼습니까?”

“자신이 소속된 SAE 컨설팅회사를 그만두고 최건우 선생과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오피스텔에 초이스 에듀라는 작은 간판을 단 사무실도 개설했고요.”

“초이스 에듀라. 흠…. 둘 사이는 어때 보였습니까?”

“둘 사이요?”

박유하 이사답지 않은 질문이 정도식 실장이 당황했다. 그래서인지 평소는 하지 않던 반문을 자꾸 하게 되었다.

“아!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가 그냥 직장 동료인지, 아니면 소문처럼 끈적한 사이인지를 물었습니다. 정말 사사로운 사이라면 그게 하나의 약점이 될 수 있으니 말이죠.”

“불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며칠 지켜본 결과 친하긴 해도 남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분명합니까?”

“네. 학원이 아니라서 조심할 필요가 없을 텐데, 연인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정함이나 스킨십 같은 게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왜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걸까?

박유하 이사는 이해하기 힘든 자신의 마음이 당황스러웠다. 평소 그리워했다면 모를까 헤어지고 지금껏 손다정을 떠올린 적조차 거의 없었다.

“그렇단 말이죠. 아쉽지만 그건 넘어가야겠군요. 그밖에는요?”

“최건우 선생 부모가 작년 9월에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XX동 사기사건의 범인들이 뺑소니 사건의 주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요.”

대수롭지 않은 정보다. 최건우의 부모가 사고로 죽든 말든 그건 박유하 이사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부모가 사망하고, 아직 미성년자인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얼마 전 군에서 최종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군 면제를요?”

“네. 생계유지곤란 사유 병역감면이라는 제도를 통해 면제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은요.”

“최근 들어 장만복 회장과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강북 쪽에 새로운 학원을 설립하려는 모양입니다. 확보한 부지도 상당히 넓고 위치도 좋아서 장래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장만복 회장이요? 쯧쯧. 그럼 스카우트는 완전히 물 건너갔군요. 자금력에서는 그 양반만큼 확실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테니. 그래도 새로 오픈할 학원이 강북이면 우리와 직접 경쟁할 일은 없을 수도 있겠군요.”

장만복 회장은 웬만한 기업 총수도 눈치를 보는 현금부자다. 세계교육이 아무리 잘나가는 학원이라도 현금 대결론 승산이 없다.

“그렇긴 합니다만 요즘은 온라인 강의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최건우 선생이 만든 참고서까지 생각하면, 매출에 꽤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든 끌어내릴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생각해놓은 건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이런 건 어떻습니까? 생계유지 곤란사유 병역감면으로 군 면제 받은 사람이 학원을 직접 운영한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당히 큰 규모의 학원이라면서요? 그럼 아무리 적게 잡아도 보유 지분이 수십억 원 정도 가치는 될 텐데. 가정 형편이 안 좋아 면제라고요? 정 실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뭔가 재미있는 건수를 발견했다는 듯 박유하 이사는 입맛을 다시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 그렇군요. 생계유지가 곤란한 사람의 재산이 알고 보니 수십억인 건 말이 안 됩니다. 이거 잘 만지면 큰 타격을 줄 수 있겠습니다. 역시 이사님이십니다. 바로 진행할까요?”

“아니요. 아직은 일러요. 온라인 강의를 시작하면 지금보다 훨씬 큰 유명세를 얻게 되겠죠. 유명해지면 해질수록 국민들의 분노는 더 커집니다. 조금 기다립시다. 완전히 정점에 올랐을 때, 바로 그때 ‘펑’ 하고 터트리는 거죠. 후후후.”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후 세계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과거에도 스마트폰이 있었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아이폰은 스마트폰 대중화에 성공한 첫 번째 제품이며 휴대전화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엄청난 혁신이었다.

예전에는 대부분 사람이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채팅을 했다면, 요즘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이 대신한다.

그게 아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스마트폰을 통해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감상한다. 별도의 음원 파일 없이 음악도 듣는다. 주식 거래, 계좌이체도 물론 가능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인데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는 것보다 스마트폰을 먼저 보는 게 일상이다. 문 앞에 놓인 신문은 너무 멀다. 침대에 누워 바로바로 뉴스를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았다.

수능 시험을 10개월 앞둔 고3 현수도 스마트폰 수혜자다.

일반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책이나 드라마가 아닌 유명강사들이 만든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는 점이다.

중소도시에서 학교에 다니는 현수는 자기가 다니는 지역에 괜찮은 학원이 없다는 사실이 늘 불만이었다.

강남이나 그 외 학군이 좋은 지역의 학생들에 비해 자신이 매우 불리한 입장이라고 불평해왔다.

그런 그에게 스마트폰과 인터넷 강의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인터넷 강의는 지역의 제한이 없다. 스마트폰은 공간적 제약을 없앴다.

실력 좋은 강사들로부터 양질의 수업을 듣는 서울의 학생들이 부러웠는데, 인터넷 강의 덕분에 그런 현수의 아쉬움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었다.

그때부터 현수는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스마트폰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은 그에게 거의 버릇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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