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좋은 생각이긴 한데, 프린트 같은 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이북을 사려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을까? 그리고 참고서에 수록된 문제들 말이야. 저작권 같은 게 걸려 있을 텐데 마음대로 프린트하게 둬도 돼?”
“그런 문제 때문에 프린트는 딱 세 번 만 할 수 있도록 제한해놨어. 물론 프린트한 걸 다시 복사해서 쓰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런 것까지 신경쓰면 한도 끝도 없어.”
“저작권 문제는?”
“저작권은 전혀 문제없어. 참고서에 수록된 문제, 전부 내가 만든 거니까.”
“뭐? 형이 다 만들어? 학원 강사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많은 문제를 만들어? 진짜야? 학년별로, 과목별로?”
“당연하지.”
“우와! 세상에. 맙소사. 형! 정말 형이 천재는 천재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건우가 만든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나올 문제를 미리 가져다 사용했다는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긴 하다. 그렇지만 그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순 없다.
진심으로 감탄한 듯 쳐다보는 동우의 눈을 보면서 건우는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다.
“하하하. 녀석!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이 천재 형을 잘 알아서 모시도록 해라.”
“말이 좀 재수 없긴 해도, 이번엔 진짜 인정. 어휴…. 그 많은 문제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만들 수 있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다. 그런데 형. 그 이북이라는 거,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예전에 보니까 인기 있는 책들을 불법으로 스캔해서 수백 수천만 원씩 수입을 얻는 사람들이 붙잡혔다는 기사도 봤거든.”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돈 벌 생각으로 참고서 이북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고. 그건 바나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야. 일단은 그냥 최초의 선두주자라는 타이틀만 얻을 거야.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이북 시장도 처음엔 불법 스캔 때문에 말이 많았다고 하더라.”
“맞아. 영화나 노래는 좀 나아지긴 했는데 불법 스캔이나 텍스트본은 애들끼리 많이 돌려 보더라.”
“그런데 어쩌겠어? 한 학교에도 수십 명이나 될 애들을 다 잡아들일 순 없잖아. 가만 보면 불법을 저지를 사람은 어떻게든 저지르더라. 그러니 정직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안 그래?”
주 고객이 학생이다. 그런데 불법 다운로드를 이유로 학생들을 고소, 고발한다?
그건 학원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가? 어쨌거나 좋긴 하다. 그 무거운 참고서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도 태블릿 하나 사주면 안 될까? 나도 형이 만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싶은데.”
“뭐? 하하하. 왜 갑자기 인강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주목적은 그거였어? 당연히 안 돼.”
“아 왜? 딴짓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려고 사달라는 건데.”
“음. 요즘 태블릿이 60~70만 원 정도 하지?”
“그래. 엄청 비싸. 내가 친구 중에 용돈이 적은 편은 아닌데, 그래도 용돈을 모아 사기엔 너무 부담스러워.”
“그렇지. 그런데 동우야. 그런 부담스러운 고가의 물건을 덥석 사줄 수도 없잖아.”
비싸다가 덥석 사주면 돈 귀한 줄 모르게 된다.
“그럼 가불이라도? 응? 형도 생각해봐. 형이 시험적으로 시작하는 참고서 이북인데 친동생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 안 그래?”
건우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동우는 화색을 띠며 어떻게든 설득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가불? 음. 가불이라…. 좋아. 대신 앞으로 10주간 용돈은 5만 원 삭감해서 주 2만 원이다. 당연히 학원 나와서 열심히 일도 해야 하고. 다시 말해 일주일에 2만 원으로 생활해야 해. 할 수 있어?”
“콜!”
“큰형.”
동우와 이야기가 끝나자 정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 그래. 우리 삼돌이 왜?”
“우씨! 삼돌이가 뭐야, 삼돌이가? 큰형까지 작은형 닮아가는 거야?”
“하하하. 뭐 어때. 귀여운데. 형이 누누이 이야기하지. 넌 이제 겨우 중2라고. 중2병에 안 걸린 건 정말 고마운데, 그렇다고 너무 점잔 떨고 그러지는 마. 그래 봤자 형한테는 귀여운 삼돌이거든.”
정우가 자신의 별명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건우와 동우에겐 쇠귀에 경 읽기였다.
“아 진짜! 동우 형 때문에 괜히 이상한 별명만 하나 생겼잖아. 어휴…. 그건 그렇고. 큰형.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는 만들 생각 없어?”
“중학생?”
“응. 지금 만든 인터넷 강의가 반응이 좋으면, 중학생 인터넷 강의도 한 번 만들어보지 그래. 오프라인 강의야 공간적 한계가 있으니까 고3 위주로 가르칠 수밖에 없겠지만, 인터넷 강의는 다르잖아. 요즘은 중학생들도 인터넷 강의 많이 봐. 형 실력이면 대박 인기 끌걸? 누가 뭐래도 하버드 의대 출신이잖아. 궁금해서라도 한 번은 본다.”
“그래? 중학생이라…. 흠. 듣고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
“어이. 삼돌이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뭐…뭐가? 갑자기 무슨 속셈?”
“너,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우리 형 하버드대 입학했다, 우리 형 하버드대 수석으로 졸업했다, 우리 형 이번에 하버드대 의대 들어갔다. 친구들한테 맨날 형 자랑하던 녀석인데, 형이 학원 강사가 된 이후 별로 자랑거리가 없어졌잖아? 그런데 형이 중학생 인터넷 강의를 만들어봐. 또 얼마나 자랑하고 다니겠어. 안 봐도 훤하다, 훤해.”
동우는 안 봐도 훤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작은형은, 내가 언제 큰형 자랑하고 다녔다고 그래?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내가 뭐 없는 말을 지어냈어? 그리고 작은형도 지금 학교 가서 형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잖아. 아니야?”
“당연하지. 요즘 우리 학교에서도 형 이름이 되게 많이 회자되고 있거든. 그런데 인터넷 강의까지 뜨기 시작하면서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다. 이럴 때 자랑하지 언제 해? 최건우가 우리 형이다 이러면 애들 다 뒤집어질걸? 흐흐흐. 어때 삼돌아, 부럽지?”
두 사람이 투닥거리던 말던 건우는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 동영상 만드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왜 그동안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건우는 자신이 미래의 수능시험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집착해 시야를 너무 좁혔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능이 전부가 아니다. 수능 정보가 없어도 건우는 20여 년 동안의 교과과정을 대부분 기억한다. 그런 조건이면 중학생 인터넷 강의도 못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동생들도 무척 좋아한다. 건우를 자랑하고 싶어할 만큼.
두 사람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조금만 고생하면 만들 수 있는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정우야. 형이 생각해봤는데, 중학생 인터넷 강의도 괜찮을 것 같아.”
“진짜? 그치?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장은 시간 내기 어려워도, 몇 달 안에 만들어서 서비스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우와! 그럼 나도 형이 하는 인터넷 강의를 볼 수 있는 거야? 앗싸.”
“그리고 인터넷 강의 시작하면, 정우는 특별히 최신형 태블릿으로 사준다.”
“헐! 형! 그건 불공평하지. 왜 난 가불이고, 정우는 그냥 사주는 건데?”
이건 대놓고 차별이다. 억울한 마음에 동우가 발끈했다.
“정우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를 냈잖아. 덕분에 형 수입이 상당히 늘어날 텐데, 돈은 못 줘도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일종의 로열티라고 해야 하나? 이건 정당한 보상이니까 괜찮아.”
“음하하. 들었지, 작은형. 부럽지? 10주간 매주 용돈 2만 원이라니, 은우보다 용돈이 적네. 이제 어쩌나.”
“작은오빠.”
“넌 또 왜?”
“용돈 떨어지면 이야기해. 내가 까까 사줄게.”
“뭐?”
“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은우의 농담에 차 안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동우의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리고 큰오빠.”
“안 돼.”
웃음이 멈추자 살짝 눈치를 보던 은우가 조용히 건우를 불렀다. 건우는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안 된다고 대답부터 했다.
“뭘 말할지 알고 안 된대?”
“나 원! 뻔하지. 초등학생도 인터넷 강의 만들어달라는 거잖아.”
“어? 그걸 작은오빠가 어떻게 알았어?”
“어휴. 네 머리가 그렇지. 생각하는 게 훤히 다 보여. 이 맹추야.”
“우씨! 맹추 아니다, 뭐. 그런데 왜 안 돼?”
동우와 은우가 또다시 애들처럼 티격태격했다.
“이건 그냥 오빠 생각인데. 초등학생까지 인터넷 강의로 공부를 하는 건 반대 입장이야. 그러니 굳이 내가 초등학생용 인터넷 강의까지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지. 난 우리 은우가 최소한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이라도 공부에 대한 고민 없이 행복하게 뛰어다녔으면 좋겠어. 그리고 은우가 모르는 게 있으면 오빠가 직접 다 알려줄게.”
재치도 있고 똘똘했지만, 은우는 동우와 정우에 비해 공부 머리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은우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그녀의 오빠들이 너무 뛰어난 것이 문제일 뿐.
이유야 어찌 되었던, 예전의 은우에게는 그게 매우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그 문제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건우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금. 건우는 은우에게 공부로 성공하길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예전에는 공부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강요했던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건우의 인생관이 변했다.
건우의 남동생들은 공부는 잘했어도 인성이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었었다.
예전의 안타까운 경험이 건우를 변하게 했다.
건우는 동생들을 학교로 바래다주고 손다정이 있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굿모닝. 손 팀장님.”
“어서 오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대표님. 어머. 웬일로 커피예요?”
건우의 양손에 스타벅스 컵이 들려있었다. 하나는 아메리카노, 다른 하나는 바닐라 라떼였다.
건우는 그중 바닐라 라떼를 손다정에게 건넸다. 같이 일하면서 그녀의 취향 정도는 이미 파악해뒀다.
평소엔 각자 알아서 먹었는데 건우가 안 하던 행동을 하자 손다정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뇌물입니다.”
“뇌물요? 무슨 일을 부탁하시려고 평소 안 하던 행동을 다 하는 거예요?”
저기 손 팀장님.”
“네. 무섭긴 한데 일단 들어는 볼게요.”
“우리,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네에?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요?”
건우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건우와 손다정이 준비하는 학원 또한 고등학생이 대상이다.
웬만하면 놀라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중학생은 너무했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건우의 말에 손다정은 깜짝 놀랐다.
대상이 중학생이면 일의 연장선상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 건우가 또 다른 일을 만들려고 하니 황당하기도 했다.
“우리 셋째가 한번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괜찮은 생각 같아서요. 오프라인 강의는 못 해도 인터넷 강의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저도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과는 일해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건 손 팀장님이 알아서 잘하겠죠.”
또 나왔다. 그놈의 ‘알아서 잘하겠죠’라는 말. 손다정은 또다시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죠. 저야 최건우 대표님의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죠. 호호호.”
“아! 그리고 말이죠.”
손다정이 심기가 불편한 듯 어금니를 꽉 물고 이야기했지만, 건우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네? 또 뭐.가. 있.나.보.죠?”
스타카토로 따박따박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건우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생각해둔 계획들로만 가득했다.
그런 건우가 뇌물이라며 커피를 사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들 태블릿이 너무 비싼 것 같아요. 갤럭시 노트나 아이패드는 50만 원이 넘더라고요. 그렇게 비싸서는 저렴하게 참고서 이북을 제공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긴 한데요. 하지만 대표님. 찾아보면 저렴한 태블릿도 분명 있어요.”
“역시 그렇죠? 그럼 그런 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을 찾아서 업무 제휴를 추진해보세요. 완전 싸구려 말고요. 최소한 우리가 제공하는 동영상과 이북에 최적화된 태블릿이었으면 하거든요.”
“업무제휴를요?”
손다정은 감정 없이 건우의 말을 되묻기만 했다.
마치 영혼 없이 반복되는 녹음기처럼.
“아, 그리고 앞으로 모바일 전용 앱도 만들 예정이니까 그 부분까지 고려해서요. 가격은 대략 10만 원 내외? 최대 15만 원은 안 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참고서 대용으로 의미가 있죠. 가능할까요?”
“찾아봐야겠죠. 그런데 대표님. 모바일 앱은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요.”
“굳이 우리가 직접 만들려고 하지 말고 외주를 주세요. 우리가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안드로이드용과 앱스토어용으로 빠른 시일 내에 개발이 가능한 곳이면 좋겠네요. 출판사를 만들어서 인터넷 출판부를 출범하면 그때 가서 우리가 직접 운영하고, 지금 당장은 외주가 나을 것 같아요.”
속 편한 소리다. 앱 개발은 생각도 안 했다.
외주는 누가 알아서 찾아주나? 그것도 손다정 혼자 전부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시작도 안 해보고 못 하겠다는 소리는 성격상 절대 안 하는 손다정이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려면 업체를 찾아가서 조율도 해야 하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요.”
“네. 손 팀장님이 잘 알아서 할 거라고 믿어요. 그럼 빨리 좀 부탁할게요.”
건우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무실 구석에 작게 마련해둔 상담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쁜 놈. 변태 악마 자식. 알아서 잘하라고. 뭘? 뭘 알아서 잘해! 어휴. 내가 정말. 저놈의 자식을 믿고 사표를 낸 내가 바보였어. 난 또 왜 바보같이 ‘알겠습니다’가 뭐야, ‘알겠습니다’가. 어휴. 업무량은 줄어들지 모르고, 오히려 늘어나기만 하고. 쉬어본 게 언젠지. 이놈의 다크서클은 언제쯤 없어지려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