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48화 (48/256)

제48화

“그렇긴 하죠. 그리고 전에 이야기했던 것은 알아보셨어요?”

“어떤 거요? 아! 기부문제 이야기하시는 거죠?”

“네. 제가 얻는 수익의 30%. 그중에 장학회를 운영하고 남는 비용은 전부 기부하려고요.”

건우가 대단한 인본주의자라서 기부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이미지 마케팅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건우는 군 문제가 조금 꺼림칙했다.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지만 뭔가 깔끔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완전히 안심하긴 힘들었다.

한 번 면제를 받으면 끝이지만, 여론 때문에 등 떠밀리듯이 입대했던 연예인도 있었다.

물론 건우는 인기로 먹고사는 연예인이 아니다. 건우의 실력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학원이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모를 미래에 대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싶었다.

그런 준비의 일환으로 수익금의 일정 비율을 기부하려는 것이다.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이번 주는 학원 제휴 문제로 너무 바빴어요.”

“그러게 얼른 직원을 뽑으라니까요.”

“그러고 싶은데, 어떤 망할 분께서 직원 뽑을 시간마저 주시지를 않네요.”

“네? 그 망할 분이 누굽니까? 당장 다리몽둥이라도? 하하하.”

***

한 여인이 등장했다.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눈가에는 무슨 짓을 했는지, 어디 가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통 시퍼렇다.

자세히 보면 맞은 게 아니라 푸른색 아이섀도를 너무 과하게 덧칠한 것이 문제였다.

그 꼴을 커다란, 마치 잠자리 눈이 연상되는 안경으로 가렸는데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언밸런스의 시너지라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이상하다 못해 괴상해 보이는 건 분명했다.

옷은 더 가관이다. 분명 임산부는 아니건만 임부복 스타일의 원피스가 무릎 언저리까지 내려갔다.

통나무 같아 보이지만 분명 통나무는 아니다. 임부복 스타일의 옷에 들어간 빨갛고 노란 무늬들이 절대 통나무처럼 보일 수 없게 했다.

알이 굵은 치렁치렁한 목걸이와 버스 손잡이를 연상케 하는 귀고리도 문제다. 머리엔 쌍팔년도 영화에서나 등장할 정체를 할 수 없는 무늬의 두건을 뒤집어썼다.

무릎 아래 종아리 라인은 그나마 예쁘지만, 그걸 집중하기엔 다른 특징들이 너무나도 도드라졌다.

전체적인 느낌은, 그냥 꿈에서라도 나타날까 무서운 그런 여인이었다.

한마디로 패션테러리스트의 전형.

‘이렇게만 하면 나도 패션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라는 책이 있다면, 단언컨대 그녀는 그 책의 완벽한 모델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직업은 학원 강사로 보인다. 십여 명의 아이들을 조그마한 강의실에 모아놓고 열심히 뭐라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사회탐구를 선택할 때 어떻게 해야 효율적일까요? 2014년에 개정된 역사교육은 세계사, 동아시아사, 국사 이렇게 세 가지 과목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상당 부분에서 동아시아사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다 보면 당연히 우리 역사인 국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회탐구는 여러 과목 중에서 2과목을 선택하죠? 사회문화, 경제, 정치, 법과 사회, 윤리, 한국지리, 경제지리, 세계지리. 지리를 제외하면 서로가 전혀 연관이 없는 과목입니다. 그렇게 각 과목을 공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2라고 한다면,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를 함께 선택했을 때는 1.5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올해부터 한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선택되었죠. 그런데 동아시아사는 한국사와 겹치는 부분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결국,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를 선택하면 대략 1.25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현명하다면 당연히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를 선택해야죠. 왜? 그게 효율적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과연 세계사, 동아시아사, 한국사를 동시에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있느냐?”

“그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효율성이죠. 큰 틀에서 여러분을 가르칠 수 있으니까요. 세계사를 가르치다가 동아시아사가 나오면 바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 동아시아사에서 한국사 이야기가 나오면 능숙하게 바로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 안타깝게도 그런 선생님은 얼마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저니까요….”

한참 동안 플레이 되던 영상이 멈췄다.

“크크크. 우와. 알고는 있었지만, 윤은영 선생님 패션은 정말 어마무시하군요.”

영상 속의 여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때문에 건우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방금 플레이 됐던 화면은 건우의 부탁을 받은 손다정이 조사해온 자료에 포함된 역사 전문 강사 윤은영 관련 영상 중 하나였다.

“패션도 패션이지만, 외모는 더욱 문제입니다. 학원 강사가 잘생기거나 예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혐오감을 주면 곤란하죠.”

“풉. 혐오감이래. 하하하.”

사람 외모를 비하하면 안 되지만, 건우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윤은영의 외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꾸미고 있는 스타일이 문제라서 그렇다.

“아니, 대표님.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라고요. 외모는 정말 심각한 지경이라고요. 제가 생각할 때 저 정도면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고 봐요.”

“그래도 일단 조사한 것은 알려줘 봐요.”

“그래요. 일단 조사는 해왔으니. 나이 서른셋. 미혼. 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졸업.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사표. 외모 때문에 학생들에게 집단 놀림을 당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둔 것으로 추측. 2년 정도 백수생활을 하다가 학원 강사로 변신. 실력은 그런대로 괜찮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타일은 여전함. 덕분에 수강하는 학생들이 많진 않음. 지금은 은평구 연신내의 작은 보습학원에서 강사생활 중.”

“음. 집단 놀림이요?”

지금까지는 장난스럽게 회의에 참석하던 건우의 태도가 순간 돌변했다.

“네. 그렇게 추측만 하고 있어요.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 알겠죠.”

“그래요? 제가 알기에는 정말 강단 있는 여인네였는데. 그런 걸로 그만뒀다고요? 희한하네.”

건우는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했던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어떤 말이요?”

“실력은 그런대로 괜찮다고 했던 방금 그 말.”

“네. 실력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보습학원에 있기는 아깝죠.”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실력이 그런대로 괜찮다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찍어온 영상 더 없어요? 바빠서 못 본 것 같은데, 일단 영상자료부터 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건우는 단호하게 말을 하고 손다정에게서 시선을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깐 한숨을 쉬고, 노트북에 있는 다른 영상자료를 찾아 플레이시켰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빠져들었다. 열정적인 손 발짓. 여자치고는 차분한 목소리. 혼이 실린 듯 정열적으로 설명하는 모습.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빨간 치마가 아니었다면, 눈을 어지럽히는 치렁치렁한 목걸이만 없었다면, 손다정이 여태껏 본 역사 강사 중 최고 레벨의 실력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괴상망측한 스타일에 가려져서 그렇지 윤은영의 실력은 진짜였다.

“죄송해요. 그런대로 괜찮다는 그 말 취소할게요.”

자료화면이 끝나자 손다정은 재빨리 자신의 성급함을 사과했다. 바빠서 강의 영상을 대충 돌려보기만 하다가 나온 실수였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까 됐어요.”

건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았다.

“그런데 대체 저 여자 강사는 어디서 알게 된 거예요?”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엄청 좋은 실력에 비해 외모가 너무 괴악하다고 누가 글을 올렸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알아봤죠.”

“그렇군요. 실력은 인정할게요. 최고네요. 그래도 저기 화면에 있는 윤은영 선생님은 곤란해요.”

“외모 때문에?”

“네. 외모 때문에요. 아무리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해도, 용모 단정한 외모가 필요한 직업이 있어요. 학원 강사도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특히나 우리 초이스 에듀의 역사를 담당하려면, 저 외모로는 정말 곤란해요. 저보고 속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손다정의 판단은 냉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이라면 누구나 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초이스 에듀의 대표 역사 강사를 뽑는 일이다. 단지 오프라인 강의뿐만 아니라 인터넷 강의까지도 연계할 계획이다.

그런데 윤은영이라는 여강사의 외모는 그런 모든 계획을 전면 스톱시켜야 할 만큼 위력(?)적인 외모였다. 건우도 덮어놓고 반대하는 손다정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건 저도 이해해요. 하지만 손 팀장님. 우리 한 번 더 생각을 꼬아볼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외모가 이상하면 바꾸면 되잖아요. 이미 30대가 된 강사의 능력은 업그레이드하기 힘들어도 외모는 달라요. 이상하면 바꾸면 되죠.”

“외모를…요?”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윤 선생님의 스타일, 정말 괴악한 거,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눈과 코를 자세히 뜯어보세요. 저 끔찍한 안경을 벗기고 화장을 지운다 상상해보세요. 그래도 이상한가요?”

손다정은 건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안경과 촌스러운 화장을 지운다고 상상해봤다.

“아니요. 이상할 것 같진 않네요. 눈은 큼지막하고, 코는 동글동글 귀여워요. 단, 입이….”

“그렇죠! 입이 문제네요. 하관이 돌출되었고 이가 너무 삐뚤빼뚤하죠?”

“네. 입 때문에 얼굴 전체의 인상이 나빠졌어요.”

“그럼 고치면 그만 아닙니까?”

“고치다니요? 성형을 하자는 말씀이세요?”

“아니요. 연예인을 할 것도 아니고 성형까진 필요 없습니다. 치아교정만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치아교정은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정이 끝난 다음엔 스타일리스트를 붙여줘서 저 괴악한 패션을 세련되게 바꾸면 될 것 같은데요. 어때요?”

“치아교정만 제대로 한다면 뭐….”

손다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얼마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컨설팅회사에서 하던 일이잖아요. 강사의 스타일에 변화를 줘서 인기 강사로 탈바꿈시켜주기.”

“스타일 변화의 범주에 치아교정이 들어가는 건 과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컨설턴트가 하는 일이긴 하네요.”

“그럼 뭐가 걱정입니까? 손 팀장님이 보기에도 실력은 최고라면서요. 그럼 투자하는 셈 치고 치아교정을 시킵시다. 성형도 아니고 치아교정인데 돈이 들어봐야 얼마나 들겠습니까. 거기에 살만 조금 빼면 미녀 소리를 들을지도 몰라요. 맥시멈으로 잡아도 2,000~3,000만 원. 그 정도 돈을 투자해서 최고의 역사 강사를 얻는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터넷 강의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만큼이나 외모의 중요성도 높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연예인처럼 예쁜 외모는 바라지도 않는다.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인만큼 바라봤을 때 편안함을 느낄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런 이유로 실제로 쌍꺼풀이나 코 수술을 하는 강사가 꽤 많다. 치아교정쯤은 못할 것도 없다.

그밖에 스타일 및 미용에 필요한 비용이 추가된다고 해도 장래성을 생각하면 확실히 남는 장사다.

학원에서 그런 비용까지 지원해주는 경우는 못 봤지만,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사소한 생각이긴 한데 건우의 발상 전환이 놀라웠다.

“그렇게만 되면 확실히 남는 장사가 되겠네요. 그 정도 비용으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역사 강사를 얻게 되는 거니까요.”

“그럼 최고의 치과를 찾아가서 교정을 받게 해주세요.”

“네? 잠깐만요. 대표님. 윤은영 선생님 의사는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요. 거절할 수도 있잖아요. 학교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많은 학생 앞에서 강의하는 걸 두려워할지도 몰라요.”

“그건 손 팀장님 특기잖아요. 하버드 의대에 다니던 저도 설득한 분이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거 아니에요?”

“끄응.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윤은영 선생님을 스카우트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바로요?”

학원 개원은 내년에나 가능하고 지금 당장 스카우트해도 활용할 수 없는데, 건우가 너무 서둘렀다.

“네. 스카우트 수락하고 치아 교정받으면 얼마나 걸릴까요?”

“완전히 자리 잡으려면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걸린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도 요즘은 투명 교정 장치 같은 게 있으니까 몇 개월만 지나도 강의하는 데는 지장 없을 거예요. 그때까지 여유가 있으니까 스카우트는 조금 천천히 생각해도….”

“스카우트한다고 해도 당장 강의를 시킬 건 아니에요.”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치아 교정하고 살을 빼는 동안에도 돈 값하라고 하면 됩니다.”

“어떻게요?”

“교재를 만들라고 하면 됩니다.”

“아! 몇 달의 여유가 있으니 그 기간 동안 교재를 만들어도 되겠군요.”

“그렇죠. 실력이 있으니 교재도 잘 만들 겁니다. 작업실도 하나 만들어줘도 되고요. 혹시 압니까? 저처럼 대박이라도 날지?”

“호호호. 대박이 아무나 나나요? 그건 대표님 같이 천재들이나 하는 일이지.”

손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부정했다.

그렇지만 건우가 윤은영 선생을 알게 된 계기가 바로 그녀가 만든 교재 때문이었다.

허접한 보습학원을 전전하면서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작업해서 만든 역사 교재는 지금부터 15년 뒤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세계사부터 동아시아사와 한국사까지 총망라한 하나의 이야기책에 가까운 교재였다.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참고서가 아니다. 세계사부터 한국사까지 그 방대한 역사를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윤은영의 스카우트는 한참 뒤에나 등장했어야 할 최고의 인기 역사 교재를 15년씩이나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건우는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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