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학부형이 찾아와서 난장을 피우든 말든 건우는 사기가 떨어져 어깨가 축 처진 근로 장학생들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동우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고깃집에서 조촐한 회식을 했다.
“자! 많이 먹어. 소고기는 바싹 굽지 않아도 돼. 적당히 붉은빛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맛있게 먹는 거야. 알았지?”
“감사히 먹겠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고기를 보니 언제 그렇게 축 처졌느냐는 듯 신 나게 흡입(?)하기 시작했다.
지이익!
고기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졌다. 불판 위에 젓가락이 벌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접시가 바닥이 났다. 건우는 고기가 끊이지 않게 계속 주문했고, 폭풍 흡입은 일곱 명이 30인분의 소고기를 먹어 치운 다음에야 멈췄다.
“다들 맛있게 먹었어?”
“네. 선생님.”
“그래.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그럼 소화 좀 시키면서 내 이야기 좀 들어. 며칠 전 있었던 사건은 여기 있는 누구에게나 마음 아픈 일이었을 거야.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여전히 불합리한 세상에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을 수도 있겠지.”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너희에게 해 줄 말은 그래도 견뎌내라는 거야. 더럽고 아니꼬워도 참고 견디면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거야. 이번과 같은 일이 바로 너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야. 내가 장담해.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보다 너희가 훨씬 장래성이 커. 그러니까 억울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
“집안이 잘산다고?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지금 당장은 억울해도 참자. 그렇지만 우리 잊지는 말자. 그리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때, 오늘 일은 절대 잊지 말자. 그것만 생각하자. 어쨌든, 우리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생긴 것 아니겠어? 잊지 마. 나는 무조건 너희 편이라는 사실을.”
아이들도 이번에 폭행사건을 일으킨 주범이 어떤 집안의 자식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법적으로 처벌은 하지 못했지만, 학원에서 내쫓아버리는 건우의 과감한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학교였으면 쉬쉬하며 유야무야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힘들게 살면서 세상의 불합리함을 빨리 깨우친 아이들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알아왔던, 비겁한 어른과는 확실히 달랐다.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건우에 대해 더욱 큰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아이들은 건우가 했던 ‘당장은 참지만, 잊지는 말자’는 그 말을 뼈에 새기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식사가 끝난 후 늦은 시간이라 아이들을 직접 집까지 바래다준 건우는 동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형, 미안해.”
“응? 뭐가 미안해?”
“아무리 화가 났어도, 내가 먼저 주먹질하는 게 아니었어.”
“그게 왜 미안한데?”
“오늘 문창국 그 개자식 엄마가 학원에 찾아와서 난장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괜히 형이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 화가 났어도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됐어. 하나도 미안해하지 마. 경준이를 위협하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때문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면,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동우 넌 내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훌륭했어. 네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곤란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런 거잖아.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그래도 좀 그래. 들었는데 진짜 상당한 집안이라고 하던데. 괜찮을까?”
“녀석도. 별게 다 걱정이다. 넌 정말 잘했어. 그러니까 절대 기죽지 마. 그것만 기억하면 돼. 알았어?”
“아이참. 머리는 좀 만지지 마라니까.”
건우는 조금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동우는 갑작스레 머리를 쓰다듬는 건우의 행동에 짜증이 난 것 같은 목소리는 냈지만, 실제로는 그리 싫지 않은 듯 눈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
변기재는 조내일보 기자다. 실력보다는 손 비비기를 좋아하는, 사회 정의보다는 어떻게 하면 윗선에 잘 보일지 그게 더 중요한 전형적인 나팔수 타입의 기자였다.
좋은 기삿거리가 어디 없나 고심하던 와중 편집장이 그를 불러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쓰도록 지시를 내렸다.
눈치를 보아하니 편집장이 아니라 그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 같아 냉큼 알겠다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우선 간단하게 인터넷으로 한강 에듀케이션을 검색해봤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기사가 떴다.
그중에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수능 적중률 50%.
그 기사를 확인하는 순간 나팔수 변기재 기자의 눈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수능 적중률 50%?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거참. 요즘도 이런 구시대적 수법으로 마케팅 하는 학원이 있다니. 덕분에 기사 쓰기는 쉬워졌네. 고생스럽게 밖에 나가서 자료조사 같은 것도 안 해도 되고, 일이 쉽게 풀렸어. 흐흐흐.”
변 기자는 그렇게 흐뭇하게 웃으며 기사 작성 창을 열었다.
타닥. 타다닥. 타다닥
잠시 후 사무실에는 신 나게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다음날 조내 일보의 사회면에 한강 에듀케이션에 관련된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이젠 대입학원도 무당이 대세?]
앞으로 10년 후면 우주여행이 아니라 우주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시대가 도래할 예정이다. 이렇게 과학기술의 고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과학보다는 미신을 신봉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사주를 보고, 궁합을 맞추고, 혈액형이나 별자리에 큰 관심을 가지는 그런 신변잡기 수준이 아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미래의 꿈나무들이 공부하는 공간인 입시 전문 학원에서 대규모 학생들을 상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서울 강남의 모 학원. 하버드대 출신의 젊은 남자가 학원 강사로 변신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심지어 수강 신청을 하려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떼거리로 몰려드는 장면이 얼마 전 지상파 뉴스에까지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하버드대 출신의 강사가 다니는 학원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하버드대 간판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수능 적중률이다. 수능 적중률이 높은 학원이 좋은 학원인 건 맞다. 문제는 그 학원에서 강조하고 있는 지난해 수능 적중률이 무려 50%라는 데 있다.
사실 이게 사실이면, 굳이 학교에 가서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족집게 강사가 하는 수업만 듣고 있으면, 별다른 노력도 없이 대입에 성공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결국, 해당 강사는 실력이 아니라, 수능 문제를 잘 찍는다는 거의 무당에 가까운 예지 능력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본 기자가 조사해 본 결과 이는 터무니없는 과대광고였다. 한강 XX학원은 하버드대라는 간판을 이용해 학부모와 학생의 눈을 흐리고,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강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산에서 유명 대입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팽 모 원장의 말에 따르면, ‘수능 적중률이라는 게 알고 보면 여러 가지로 맹점이 많은 수치다. 쉽게 말해 학년별 학기별로 총 여섯 권의 두꺼운 참고서만 공부하도록 가르친다면 수능 적중률 100%도 꿈이 아니다. 그런 식의 엉터리 확률이라면 50%의 적중률은 오히려 낮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당 학원은 수능 적중률뿐만 아니라 이상한 참고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게 더 큰 문제다. 제대로 된 검정과정도 없이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엉터리 같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만 해서 판매하고 있다니, 어린 학생들의 코 묻은 돈을 골라 빨아먹는 악독한 흡혈귀와 다를 바 없다’며 지금의 이상 인기 현상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라는 것은 3년, 더 넓게 보면 12년의 노력이 고스란히 결과로 나타나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비웃듯 수능 적중률 50%라고 과대광고하며, 긴 기간 피땀 흘린 아이들의 노력을 전부 비웃어버리는 한강 XX학원의 비도덕적 상술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조내일보 / 변기재 기자
일일신문의 리더 ⓒ조내일보(주) www.jonedaily.co.kr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네티즌 의견 총 0개.
***
“대표님 나오셨어요? 혹시 신문에 난 기사는 보셨어요?”
“기사요?”
새로운 직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면서 사무실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직원들과 함께 활기차고 열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건우는 항상 그렇듯 동생들을 바래다주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런데 항상 웃으며 반겨주던 손다정이 평소와 다르게 매우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가와 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못 보셨구나. 조내일보에서 대표님에 대해 악의적인 기사를 실었어요.”
“악의적인 기사요?”
“네. 여기 신문 있으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건우는 손다정이 건네주는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두운 표정의 손다정과 달리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하하. 설마 여기 등장하는 팽 모 원장이 우리가 만났던 그 팽 원장은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요. 당연히 그 팽 원장이죠. 조금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고 이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인터뷰를 할 줄은 정말 몰랐네요.”
“됐습니다. 어차피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했으면 지금보다 더 골치가 아팠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지금처럼 기사로 씹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넘어갈 때가 아니죠. 조내일보라고요. 조내일보.”
손다정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조내일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메이저 신문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신문사에서 악의를 가지고 기사를 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대응이 약해서 좀 실망스럽네요.”
“네?”
“기사가 사회면 1면에 뜬 것도 아니잖아요. 이건 조내일보에서 문창국 엄마 되는 그 아줌마가 하도 징징거리니 그냥 마지못해 기사를 실어준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정말 그렇게 보이세요?”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사 정도로는 저나 학원에 전혀 타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일간지 모두에서 사회 1면 머리기사로 뜬다면 모를까요.”
“대표님.”
“왜 그러세요, 손 팀장님.”
“정말 너무 천하태평 아니세요? 전 아주 안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걸요.”
“그렇지만 손 팀장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최상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문창국이라는 그 개자식 집에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지 않습니까? 경준이나 동우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이번 제 결정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아쉬움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가끔은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고요? 하지만 이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연예인이 아닙니다. 실력만 있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그냥 마케팅 쪽에만 좀 더 신경을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손다정도 안다. 왠지 이번 일이 이렇게 조용히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처럼 지금 와서 무릎 꿇고 사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건우가 이번에 새롭게 마련한 대표실로 들어가자 손다정은 이번에 새로 영입한 김완태 마케팅 팀장을 불러 초이스 에듀와 건우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
“하하하. 오늘 아침 조내일보 기사 보셨습니까?”
“그럼요. 봤고말고요. 그렇지 않아도 그 기사를 보고 십 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치더니, 내 한 번은 된통 당할 줄 알았습니다. 허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 무서운 것 모르고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어쩌다가 조내일보과 척을 지게 되었는지 그것참 쌤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내일보와 인터뷰까지 하게 됐습니까? 일산의 팽 모 원장이 팽 원장님 맞으시죠?”
“아! 이런. 그렇게 쉽게 눈치채셨습니까? 허긴 팽 씨가 그리 흔한 성씨도 아니고. 사실 아는 후배에게 연락이 왔지 뭡니까. 혹시 최건우 선생과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해서 괜찮은 정보 없느냐고.”
“오호. 그래서요?”
“일단 무슨 일인지 물어봤죠. 그랬더니 최건우 그 친구가 조내일보 윗선에 찍혔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옳다구나 했죠. 그래서 제가 아는 사실들을 줄줄 전부 이야기해준 거고요.”
“하하하. 잘하셨습니다. 솔직히 누군지 알면 어떻습니까? 없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요.”
“그렇죠? 사실 제가 성정이 정직해서 없는 이야기를 꾸미고 그러지는 못합니다.”
“그럼요. 저도 팽 원장님 성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놈이 어디 감히 나이도 많은 원장님들 앞에서 그따위 발언을 할 수 있습니까? 공부만 잘한다고 사람이 되는 게 아니죠. 가정교육을 못 받은 게 분명합니다. 쯧쯧.”
“맞습니다. 제대로 배웠다면, 성 원장님 학원에 가서 그런 행패를 부릴 리도 없겠죠.”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디서 배워먹고 와서 그런 행패를 부리는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니까요. 우리 학원에 다니던 학생 중 몇몇은 학원을 아예 그만뒀습니다. 거기다 상도덕 없이 어떻게 학기 중에 남의 학원 강사를 빼갈 수 있습니까? 그나마 별 도움도 안 되는 땀이나 삐질삐질 흘리는 이승훈 선생을 데려갔으니 다행이죠.”
“그런데 이승훈 선생이라는 사람은 확실히 쓸모없는 사람 맞습니까?”
“그럼요. 몸무게가 무려 130kg이 넘어요. 저니까 휴머니즘에 입각해서라도 그동안 참고 받아준 겁니다. 최건우 그 어린놈이 무슨 생각으로 그 뚱뚱이를 데려갔는지는 몰라도 지금쯤이면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건우와 트러블이 있었던 일산의 팽 원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승훈이 일하고 있던 동작구 학원의 성 원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