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62화 (62/256)

제62화

똑똑똑.

“누구야. 들어와.”

“국장님. 접니다.”

국장실 문이 열리고 양 피디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어. 양 피디. 무슨 일이야. 괜찮은 신규 아이템이 또 생긴 거야?”

양 피디가 맡던 인기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하는데, 내는 기획서마다 뭔가 하나씩 마음에 안 드는 최 국장.

매번 대차게 까이는 중인데 양 피디는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꼬박꼬박 기획서를 들이밀곤 했다.

최 국장은 당연히 이번에도 똑같은 용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해야 하나요?”

“뭐냐? 그런 개똥 같은 소리는?”

“저기 국장님. 아니, 형!”

“얼씨구. 뜬금없이 웬 형? 네가 그런다고 되지도 않은 기획서를 통과시켜줄 것 같아? 작년에 나보고 악질 국장 물러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거 아직도 기억하거든.”

두 사람의 역사는 꽤 길다.

지금은 싸우기도 하는 국장과 피디 사이지만, 한때는 형 동생 하는 친한 선후배 피디로 지내며 실력 없는 낙하산 국장의 뒷담화를 함께 까던 전우(?)였다.

“그게 말이유. 형. 신규 아이템이긴 한데 이게 단발이에요.”

“뭐? 단발? 너 인마. 내가 너 기획안 짤 때 뭐라고 했어? 이번엔 좀 오래가는 걸로 짜라고 했어? 안 했어?”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1년만 지나도 금방 질린다고 해야 하나? 양 피디가 만드는 프로그램 특징이 그렇다. 너무 트렌디해서 시청자들이 금방 질려 한다.

나쁜 건 아닌데 진짜 유능한 스타 피디가 되려면 무한도전이나 1박 2일 같은 장수프로그램 하나 정도는 있어 줘야 한다는 게 최 국장의 생각이었다.

그런 프로그램 만드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만큼 양 피디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의미였다.

“그렇긴 한데요. 단발이긴 해도 이게 대박도 보통 대박이 아니거든요. 완전 초대박일 걸요?”

“그래? 그렇다면 한 번 읊어봐. 일단 들어는 줄 게.”

최 국장은 단발이라는 말에 무조건 안 된다고 하려는데 양 피디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마음에 걸려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형도 최건우 알죠?”

“최건우? 혹시 하버드 의대 나왔다고 사기 친 걔?”

“네. 만약에 말이유, 만약에 그게 사기가 아니라 사실이면 어떡할 겁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실이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헐! 정말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끝이에요? 그게 천하의 대 MBS 예능 국장님이 하실 소리냐고요.”

“뭐 인마?”

“아. 실망이네. 진짜. 형도 이제 다 됐나 봐요. 예전엔 척하면 척이었는데. 이젠 감도 못 잡네, 감도 못 잡아.”

“새끼.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딴 소리가 나오나. 그만 잘난 척하고 얼른 풀지. 자꾸 짱나게 하면 대박이고 뭐고 쫓아내 버린다.”

시건방진 모습에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 참았다. 양 피디가 웬만해선 저러지 않는데. 저 정도로 까불까불하는 걸 보니, 대박의 냄새가 솔솔 풍겼다.

“최건우가. 아니지. 사기꾼이 아니니까 우린 최 대표라고 부릅시다. 어쨌든 최 대표 이력이 사실은 사기가 아니고, 그걸 밝힐 기회가 우리한테 있다면 어쩔거유?”

“뭐? 그거 진짜야?”

최 국장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확실히 감이 왔다. 만약 양 피디가 말하는 걸 단독으로 보도만 할 수 있다면 이건 어마어마한 특종이다.

MBS 예능 국장 자리를 그냥 공으로 얻은 게 아니다.

“흐흐흐. 형도 이제 슬슬 감이 오는 거죠? 사실 그쪽에서 먼저 제안이 왔어요. 우리만 오케이하면 우리랑 같이 하버드로 가서 학력이 위조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주겠답니다.”

“허! 야! 양 피디. 너 그거 정말이지?”

“그럼요.”

“그러다가 사기면?”

“그것도 이미 다 확인했죠. 그리고 사기면 어때요? 어차피 우린 객관적인 입장에서 확인만 하면 돼요. 사기든 아니든 같이 하버드 가는 것만 찍으면 됩니다. 그럼 시청률은 무조건 대박 납니다. 안 그렇겠어요?”

사기가 아닌 건 기정사실이다. 그게 아니라면 초이스 에듀 측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리가 없다.

“그런데 이거 우리가 맡아도 돼? 시사 쪽에서 자기 거라고 탐내지 않을까? 그래도 사회 이슈인데?”

“에이. 형. 갑자기 왜 이러세요? 그걸 시사에서 어떻게 안다고. 우리만 입 다물면 걔네들은 방송 보고 알게 될 텐데.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죠? 우리 유능한 국장님이신데.”

“너 이 새끼. 하하하. 이런 복덩어리 같으니. 기획서 이거 제대로 된 거지?”

“그럼요.”

“좋아. 그럼 조금만 기다려. 내가 이걸로 사장님하고 담판 짓고 올 테니까. 아 참! 출발은 언제 할 수 있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네요. 마음 같아서는 내일 당장도 가능하답니다.”

“오호. 역시 그쪽도 마음이 급한가 보지?”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간 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쉬운 건 그쪽이 아니라 우립니다. 그쪽이야 다른 방송국 찾아가면 그만입니다.”

뭔가 딴생각을 하려는 최 국장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양 피디가 정곡을 찔렀다.

“그…그런 생각 안 했어. 짜식. 날 뭐로 보고. 어쨌든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

MBS의 최건우 관련 특집 방송 계획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승인이 됐다.

인원은 많지 않다. 양 피디와 두 명의 카메라맨이 그리고 작가 한 명이 파견 인원의 전부.

건우를 포함해도 고작 5명이다. 일종의 특공대나 마찬가지다.

다섯 사람의 미국행 왕복 비행기티켓 비용과 2~3일 정도 머물 수 있는 숙박비 정도의 비용만 들이면 최소 10% 이상 시청률이 보장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사실 최소 10%라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일 뿐. 양 피디나 최 국장은 최소가 25%는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지금 국민들의 관심을 생각하면 광고 완판 또한 떼놓은 당상이다.

황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꼴인데 이걸 포기할 바보는 없었다. MBS 측은 건우가 행여나 마음을 바꿀까 싶어 기획서가 올라온 바로 다음 날 미국 동행을 결정하고 양 피디를 프로그램 책임자로 앉혔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날, 네 사람은 미국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괜한 소문이 날까 봐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탔다.

양 피디의 조심성 있는 결정 덕분에 건우가 MBS와 함께 하버드로 움직인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비행기를 탄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 MBS 사장과 최 국장 그리고 손다정이 전부다.

“안녕하십니까. 최건우 선생님.”

보스턴 공항에 내려 양 피디가 렌트한 봉고 안에서 다섯 사람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양 피디는 건우를 ‘최건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최건우 씨, 최건우 강사님, 최건우 원장님, 최건우 대표님 등 부를 수 있는 호칭은 여러 가지였지만, 건우의 나이와 상황을 고려해 ‘선생님’이라고 통일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TV를 보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호감을 줄 수 있는 단어였다. 건우의 나이를 생각하면 원장님이나 대표님이라는 호칭은 자칫 거부감을 줄 수도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벌써 촬영을 시작하는 건가요?.”

“그럼요. 리얼리티가 중요한 프로그램이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한국에서부터 촬영을 하고 싶었는데, 최건우 선생님이 많이 알려져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출국은 최대한 조용히 한 겁니다.”

차에 타자마자 카메라맨 두 사람이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운전은 작가가, 대화는 양 피디 몫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니 하버드 대학으로 이동하는 동안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혹시 비행기를 타는 동안 피곤하셨으면 잠시 쉬셔도 됩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한 내용이다. 질문지는 이메일로 주고받았기 때문에 건우가 당황스러울 일은 없었다.

만약 시사 프로그램이었으면 사소한 설정도 없이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다루려고 했겠지만, 이건 예능이다. 양 피디는 예능 전문가이고.

예능의 생명은 재미고, 그래서 양 피디는 이번 촬영에서 극적인 재미를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먼저 식상한 질문부터 할게요. 처음 학력 위조 논란이 터졌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정말 황당했습니다. 그렇지만 큰 걱정은 안 했습니다.”

“왜 걱정을 안 하셨죠?

“사실이 아니니까요. 사실이 아니니까 잠깐 그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니셨습니까? 군 면제 논란이나 정신과 상담 논란으로 이미 충분히 곤란을 겪으셨을 텐데요. 그것도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군 면제 받은 것도 사실이고, 정신과 상담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사실이 절대 부끄럽지 않습니다만, 누군가의 눈엔 거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학력 논란은 처음부터 거짓이었습니다.”

양 피디와 건우는 첫 인터뷰에서 군 문제와 정신과 상담 문제를 털어놓고 합의를 봤다.

“한국이니까 그럴 수 있다…라. 앞선 두 가지 논쟁은 문화의 차이라고 보신 겁니까?”

“비슷합니다. 한국에서 군 면제는 예민한 문제잖아요. 그리고 정신과 상담은… 글쎄요. 사실 정말 별생각이 없었어요. 정신적 지주인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조모, 외조모, 외삼촌, 고모가 계시지 않습니까? 다들 집안 어른인데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그분들도 아끼는 자식을, 동생을, 오빠를 잃었습니다. 충분히 힘드실 텐데 거기에 저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럴 때 카운슬링을 받는 게 일반적이라서 당연히 그렇게 했습니다. 일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은 인식이 달랐던 것이죠. 전 그걸 맞고 틀리다 보다는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화의 차이라고 치부하기엔 과도한 사생활 침해며 오지랖이지만, 건우는 자신을 비난한 대중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그런데 학력 위조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죠. 이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완전히 거짓말인데 언론에서는 제게 어떤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추측성 기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방어할 수단조차 없었습니다. 때리면 그냥 맞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 그런 오해가 생긴 걸까요?”

“이름 때문이었어요. 하버드에서 저는 ‘최건우’가 아니라 ‘앨런 쇼어 초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어요.”

“미국식 이름치고는 좀 복잡하네요. 유학 간 사람들 보면 다들 간단한 이름을 사용하던데.”

“좀 그렇죠? 그런데 제인, 수잔, 톰, 제임스 이런 이름은 부르긴 쉬워도 너무 많아요. 저는 조금 특색 있는 이름을 원했어요. 그게 앨런 쇼어 초이죠. 보스턴 리갈이라는 미국 드라마 주인공 이름이기도 해요. 제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영어를 배웠거든요.”

“그럼 항간에 논란이 됐던 앨런 초이와 앨런 쇼어 초이는 완전 다른 사람인 건가요?”

“그렇죠. 앨런 초이라고 검색하면 당연히 제가 안 나와요. 번거롭지만 앨런 쇼어 초이라고 해야 제가 나옵니다. 한국도 그렇잖아요. ‘최우’라고 검색하면 최건우는 안 나오죠. 아무 생각 없이 지었던 이름인데 그게 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어요.”

“그 사소한 오해 하나로 한국이 온통 시끄럽게 된 것이군요. 언론사에서 미국 이름이 앨런 초이가 맞느냐고 한 번만 물어봤어도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말이죠.”

“그러게요. 아무도 진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순식간에 그냥 나쁜 놈이 됐어요. 절망적이었죠. 그런데 MBS 측에서 정중히 사실관계를 물어오셨고, 저는 거기에 힘을 얻어 이렇게 보스턴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인터뷰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사실 보스턴행을 제안한 건 건우였지만 그 내용은 서로 합의해서 MBS 측이 먼저 한 걸로 입을 맞췄다.

이게 양측 모두에서 유리했다.

MBS는 정의로운 언론으로, 건우는 마지막 기회를 얻은 피해자로.

하버드대학 정문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섯 사람은 카메라를 대동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촬영 허가는 이미 건우가 받아뒀다. 예전 건우를 정말 아끼던 생물학과 교수가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이다.

#Scene.1 바틀리 버거

바틀리 버거는 하버드 도서관 뒤편 길 건너편에 있는 수제 햄버거 가게다.

미국 시각으로 오전 10시. 창가에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건우는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문 위에 달아둔 종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점심 식사는 11시부터 됩니다. 1시간 있다가…. 오마이갓! 앨런? 앨런 맞아?]

[하하하. 바틀리. 잘 지냈어요?]

[나야 항상 그렇지. 그런데 넌… 어쩐 일이야? 갑자기 카메라는 뭐고? 한국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슈퍼스타라도 된 거야?]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님을 알리려던 바틀리 사장은 건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았다.

그러면서도 두 개의 카메라에 대해선 낯설어 했다.

[좀 이상하죠? 굉장히 웃기게 들리겠지만 일부 사람들이 제가 하버드를 다닌 걸 의심해서 이렇게 됐어요.]

[왓? 이런 미친….]

[바틀리. 진정해요. 한국 시청자들이 볼 수도 있다고요.]

[아 그래? 이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초이가 하버드를 다닌 건 내가 증명해주지. 여기서 2년간 파트타임으로 일했으니까.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안녕하세요. 저는 초이와 한국에서 같이온 음… 미스터 양이라고 불러주세요.]

[안녕하쇼. 미스터 양. 난 바틀리요.]

[바쁘시지 않다면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안 바빠도 바쁜데, 그래도 초이를 생각해서 그 부탁 들어드리지. 뭐가 궁금하쇼.]

건우를 대할 때와 달리 양 피디를 대하는 바틀리의 표정은 퉁명했다.

커다란 키에 얼굴의 반 이상을 덮은 수염 때문에 굳은 표정 하나 만으로도 위압감을 줬다.

양 피디는 그 모습에 겁을 먹고 한 발 뒤로 물러났지만, 건우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이. 바틀리. 이 분은 나를 도와주려고 왔어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래? 그럼 뭐 다행이고. 이보쇼. 미스터 양.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쇼. 내가 아는 건 전부 말해주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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