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66화 (66/256)

제66화

“경찰은 아직도 관망만 하고 있다고 합니까?”

조내일보 박 사장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의 앞에 있는 편집장과 논설위원 그리고 이진태 고문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게 여러 곳을 통해 압력은 넣고 있는데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편집장이 대표로 대답했다.

“하여간 무능한 식충이들 같으니. 이유가 뭐랍니까?”

“국민들 관심이 너무 커져서 강제해산이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서울 대학 연합 총학생회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 지역 대학 총학생회? 쯧쯧쯧.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래서 그놈들은 뭐라고 하면서 압력을 넣는답니까?”

“요구는 간단합니다. 강제해산을 하지 마라. 이게 전부입니다.”

“만약에 강제해산한다면?”

“즉각적인 행동에 들어가 시위에 가담하겠답니다.”

“웃기는 놈들. 그게 그놈들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그냥 이 땅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뭐요? 이 땅의 정의? 그럼 우리가 악당이라 이 말인가?”

박 사장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장님. 안타깝지만 지금 대중들에게 우리는 악당과 동급입니다.”

직설화법으로 유명한 이태경 고문이 정곡을 찔렀다.

“거! 이봐요. 이 고문. 지금 나 놀리는 거요?”

“놀리다니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러게 제가 반대했지 않습니까? MBS 방송이 나가고 상황이 반전되었으니 이제 발을 빼자고.”

이태경 고문의 반대에도 건우를 비난하는 기사를 계속 내도록 지시한 사람이 박 사장이다.

“지금 와서 그때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해서 뭐합니까? 대책을 마련해야죠. 대책을. 계속 저렇게 시위하도록 둘 겁니까?”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저들의 요구대로 사장님이 직접 사과를 하시는 겁니다.”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이봐요. 이 고문. 당신 정말 나랑 한 번 해보겠다는 거요?”

“기분 나쁘면 자르시죠. 저도 큰 미련 없습니다.”

이태경 고문의 이죽거림에 결국은 박 사장이 폭발했다.

그렇지만 이태경 고문도 만만치 않았다. 안 그래도 요즘 와서 조내일보 고문 자리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제법 큰돈 때문에 참고 있지만, 최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어허. 두 분 다 아실만한 분들이 왜 이러십니까? 일단 진정하시지요. 지금은 싸우는 것보다 해결책이 우선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보다 못한 논설위원이 나섰다.

“위원님. 해결책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사장님이 직접 사과하면 됩니다.”

“허허. 이 고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조내일보의 역사와 위상을 생각해주세요. 가끔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때마다 사장님이 고개를 숙이면 조내일보는 국민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합니다.”

나이는 70이 넘었지만 날카로운 입은 여전했다.

“그럼 시위대는 이대로 두실 겁니까?”

“그것도 곤란하지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저기. 사장님.”

“네. 위원님.”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따르실 용의가 있습니까?”

“위원님이 추천해주시는 방법이라면 따라야죠.”

4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조내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지낸 사람이다.

사장으로 부임한 지 5년밖에 안 된 박 사장에겐 껄끄러우면서도 의지가 되는 인물. 박 사장 아버지인 박 회장도 그런 논설위원을 믿고 아들에게 조내일보를 맡겼다.

“그럼 사과를 하세요.”

“네? 하지만 위원님! 조금 전에는 사과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시위대에게 사과하면 안 된다는 거죠. 최건우에게 전화해서 사과하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최건우에게요?”

“네. 직접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전화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요. 직접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대외적으로 자존심 상할 일도 없지요.”

“그건 그런데, 그런데도 시위대가 물러나지 않으면요?”

그렇게 하면 모양새가 덜 나빠질 것 같긴 한데 효과가 있을지 확신이 들진 않는다.

“사과하면서 최건우에게 은근히 부탁하십시오. 시위대에 직접 방문해서 해산시켜 달라고.”

“그런다고 해주겠습니까?”

“해야죠. 하기 싫어도 해야 할 겁니다. 저 시위대는 자신을 위해 저렇게 나서는데 정작 본인이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가 곧바로 반격하면 됩니다. 시위대를 외면한 최건우라고.”

“하하하. 제대로 된 외통수군요. 역시 위원님이십니다.”

“허허허. 별말씀을요.”

***

“대표님.”

“네. 무슨 일이죠?”

손다정이 묘한 표정으로 건우에게 다가갔다.

“전화가 왔는데 받으시겠어요?”

“그런 질문이 어디있습니까? 무슨 전화인데요?”

“조내일보 비서실인데 그쪽 박 사장이 대표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네요.”

“조내일보요? 갑자기 무슨 일 때문에요?”

건우에게 가장 날 선 기사를 올리던 곳이 조내일보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 통화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해가 있어 사과하고 싶다는데요?”

“하하! 오해요? 죽어라고 돌멩이를 던져놓고 이제 와서 오해요? 그 오해라는 말부터 마음에 안 드네요. 손 과장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싶지만….”

“역시 통화해야 한다는 거로군요.”

“대표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우린 아직 조내일보에 비하면 피라미라는 거. 거기서 이렇게 숙이고 들어왔는데 받아주지 않으면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걸겠죠. 그러니 참고 받으세요.”

“그래요. 일단 뭐라고 하는지 받아봅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건우도 이쯤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지금이야 대중들이 시선이 호의적으로 변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끌리면 대중들은 지치기 마련.

좋은 이미지가 되었을 때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게 현명하다.

“그럼 지금 대표님 전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Rrrr

건우의 사무실 전화가 우렁차게 울렸다.

“네. 여보세요.”

- 최건우 대표님이십니까?

“네. 그런데요.”

- 여기는 조내일보 비서실입니다. 우리 사장님께서 대표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바로 조내일보 사장이 전화를 받을 줄 알았는데 절차가 번거롭다.

“네. 괜찮습니다.”

띠리링. 띠리링.

통화 연결음이 들였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송화기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최건우 대표?

“네. 제가 최건우입니다.”

- 오. 이거 반갑습니다. 나는 조내일보 박 사장이오. 이번 일은 참 유감입니다.

유감? 시작부터 뻔뻔한 말을 들은 건우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화를 낼 건우는 아니다.

이 전화는 이미 녹음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100% 녹음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조내일보 사장쯤 되는 사람이 21살 애송이에게 유감을 표했다면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여기서 말꼬리를 잡고 화를 내봐야 건우만 손해다.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다.

“아닙니다. 유감은요. 서로 오해에서 시작된 헤프닝일 뿐인 걸요.”

평정심을 되찾은 건우는 한 수 더 떴다. 조내일보의 행동을 헤프닝쯤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순간 이마에 핏줄이 돋는 박 사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건우. 물론 이런 말로 평정심을 잃고 화를 내길 기대하진 않는다.

- 하하하. 젊은 사람이 정말 대범하군요. 헤프닝이라?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별말씀을요. 신뢰를 하기 위해서는 의심부터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조내일보의 강직한 시선 덕분에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걸로 2연타.

- 크흠. 그럼 우리의 오해는 풀린 겁니까?

“물론입니다.”

- 다행이군요. 오해가 풀렸으니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부탁이시죠?”

- 최 대표가 도와준 소아암 환아들의 부모님들 말입니다.

건우 또한 녹음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박 사장의 표현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분들은 왜요?”

- 그분들이 우리 신문사 정문에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오해가 있었으니 화난 마음은 이해하지만, 신고가 안 된 불법시위라서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십니까?”

-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들인데,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괜찮다고 해도 자꾸 원칙을 내미는군요. 강제해산을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누군가 다치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이걸 최 대표가 도와줬으면 합니다. 왠지 최 대표 말이라면 들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종의 협박이다. ‘최건우 네가 안 나서면 그 사람들 다칠지도 모른다’는 협박.

건우도 이쯤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 하하하. 빠른 결단 감사합니다.

“그런데 박 사장님.”

- 네?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 네. 말씀하세요.

“얼마 전에 우리 학원 근로장학생과 사장님 조카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 제 조카요?

“문창국이라고….”

- 아! 제 여동생 아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원래 애들은 다투면서 크는 건데.

애들끼리 싸운 거로 무슨 부탁씩이나 하느냐는 말투.

“마침 그 장면이 찍힌 영상이 있는데 창국 학생이 우리 근로장학생에게 인격적으로 심한 모독을 줘서 말입니다. 나중에 사장님 여동생분이 학원에 찾아와서 비슷한 종류의 폭언을 하셨고요.”

- 그래서요?

박 사장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러나 건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도 전부 영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우리 근로장학생에게 넘겨 스스로 판단하게 할 생각인데, 그 과정에 뭔가 실수가 있어서 영상이 유출된다면….”

-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이번엔 건우의 협박이었고, 여동생의 성격을 아는 박 사장으로서는 위험부담을 안을 수가 없었다.

“그냥 집안 어른으로서 두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십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우리 근로장학생 앞에 와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라고요. 물론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서로 오해가 깊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오해를 풀어야죠.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그럼 된 겁니까?

“하하하. 빠른 결단 감사드립니다.”

건우는 조금 전에 자신이 받은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

여전히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은 건우가 시위대 앞에 나타났다.

조내일보의 부탁 때문에 나선 건 아니었다. 조내일보와는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에 시위대를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건우는 시위대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만나 악수를 하고, 자신을 위해 나서준 것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위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여러분들 마음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여러분의 뜻은 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으니, 이젠 병원에서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시위대는 건우의 말 한마디에 피켓을 내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위할 때의 단호한 모습, 건우가 나타났을 때 흘리던 눈물 그리고 그를 부둥켜안고 고맙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절절한 모습.

이 모든 장면을 양 피디가 카메라에 담았다.

조내일보 사옥 앞은 조용해졌다.

양 피디는 재빨리 MBS 본사 편집실로 향했다. 마지막 5부 영상의 1/3을 쳐내고 오늘 시위대와 건우가 만나는 모습을 그대로 남았다.

그 영상의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고 시청률 40% 돌파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

차지훈은 한마디로 전직 스파이였다. 그것도 상당히 유능한 스파이였다.

스파이라고 하면 영화처럼 빌딩을 오르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며 자동차로 미친 듯이 추격전을 펼치는 그런 활극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현실에서 가장 유능한 스파이는 그렇게 시끌벅적한 난리를 피우며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쥐도 새도 모르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그리고 완벽하게 정보를 빼내는 능력. 그게 바로 진짜 스파이를 가리키는 바로미터였다.

국가정보국 소속이었던 차지훈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스파이였다.

물론 15년간의 스파이 활동 기간 동안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수행 도중 한 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은밀함을 자랑했다.

100% 임무 성공은 아니었기 때문에 최고라고 불리진 못했지만, 15년 무사고(?) 임무 수행 또한 국가정보국에서는 대단한 전설로 불렸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임무 수행 도중 예기치 못한 사고에 휘말리면서 어린아이 하나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

어른이었으면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스파이에게 임무 수행은 사람 목숨보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런 차지훈도 어린아이는 외면할 수 없었다.

임무냐 아이의 목숨이냐 갈림길에서 차지훈은 아이의 목숨을 선택했고, 그 바람에 임무에 실패하고 15년간 지켜왔던 자신의 신분만 노출되고 말았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만, 타격이 너무 컸다. 작전 실패로 무려 1,000억 원 넘는 손해를 봤다.

차지훈은 그 책임으로 완전히 옷을 벗었다. 손해도 손해지만 어차피 신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스파이 활동은 어려웠다.

억울할 것도 없었다. 냉정함이 생명인 그쪽 세계에서 임무보다 아이 목숨을 우선시했으니 스파이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15년간 그가 이뤄낸 수많은 성과 덕분에 별다른 징계 없이 조용히 은퇴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일을 그만두고 세상에 나오자 막막했다. 대체 앞으로 무엇을 해먹고 살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라는 곳은 많았지만, 대부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스파이로서의 능력을 탐냈다.

딱히 내키지 않았다. 국가에 소속되어 있을 땐 그래도 공익을 위한다는 자부심이라도 있었지, 사기업에 들어가는 순간 돈에 팔린 노예가 된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고, 별 소득도 없는 고민을 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스파이라고는 해도 어쨌거나 공무원이었던 차지훈. 그 덕분에 실업수당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유유자적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런 한량 짓이나 하며 설렁설렁 살고 있던 어느 날, 예전에 잠깐 인연이 있었던 장만복 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집에서 뒹굴뒹굴 노는 것도 이제 슬슬 지겨워지던 터라 별다른 고민도 없이 약속을 잡았다.

“네? 뭐라고요? 저보고 지금 누구와 일을 하라고요?”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장만복 회장을 만났는데, 그의 입에서는 차지훈의 예상을 완전히 깨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