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귀가 어두운 겐가? 학원이라고 학원. 장래가 촉망되는 대입 입시전문 학원일세.”
“저기 회장님.”
“왜 그러나?”
“제가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오해는 무슨 오해. 간첩이잖아. 간첩.”
“헉! 회장님. 좀 조용히 말씀하세요. 사람들 다 듣습니다.”
화들짝 놀란 듯 주변을 경계하는 차지훈과 달리 장만복 회장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허허허. 이 사람 보게. 아직도 간첩 물을 못 뺐군. 이미 은퇴한 거 아니었나? 여기서 이렇게 떠들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네. 그러니 그렇게 항상 경계하는 버릇은 이제 좀 버리게나.”
“휴…! 그건 그러네요. 하하하. 몇 달 놀면서 공무원 때는 다 벗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그렇지 간첩이 뭡니까, 간첩이? 좀 고상하게 스파이라고 불러주시면 어디가 덧납니까?”
“이런 꽉 막힌 사람 봤나. 간첩이 영어로 스파인데. 간첩이면 어떻고, 스파이면 어떤가? 뜻만 통하면 됐지.”
“아니.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간첩이라고 하면 스파이보다 빨갱이 새끼를 먼저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기서 차지훈이 말한 빨갱이는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을 뜻한다.
“듣고 보니 그런 점이 있긴 하네. 어쨌거나 자네도 한참 놀았으니 이젠 일을 해야지 않겠나? 내가 소개해준 학원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회장님 말씀처럼 저는 스파이 짓이나 하던 인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학원 일이라니요. 그쪽 일이 저랑 맞겠습니까?”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쪽도 정보 수집은 필요하네만.”
“에이. 학원 관련 일이 얼마나 기밀을 요한다고 그러십니다.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냥 흥신소 애들에게 맡기면 되죠. 왜 소 잡는 칼로 닭도 아닌 지렁이를 잡으라고 그러십니까?”
차지훈은 장만복 회장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원과 자신은 전혀 연관이 없었다.
스파이는 완전히 그만뒀지만, 정보 수집과 관련한 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새롭게 일을 시작하면 그런 계통으로 일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자 속으로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누가 그러나? 학원 일이 지렁이 잡는 일이라고?”
“네?”
“자네. 얼마 전까지 사회적으로 엄청난 이슈가 되었던 최건우 사건 아나?”
“예. 뭐… 매일 방바닥에서 뒹굴뒹굴거리며 텔레비전만 봤으니 듣기 싫어도 저절로 귀에 들어오더군요. 관심 있게 지켜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일이 좀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 같긴 했습니다.”
“쯧쯧쯧. 역시 은퇴할 만하군. 완전히 감을 잃었어.”
“은퇴할 만하다니요. 회장님! 방금 그 말씀은 좀 심하십니다.”
“심하긴 개뿔. 어떻게 스파이를 했다는 사람이 그 사건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볼 수가 있나?”
“그게 무슨 문제라고 자꾸 이러십니까?”
밀려오는 짜증을 참기 어려웠는지, 차지훈의 얼굴은 점점 찌푸려졌고 말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한때 인연이 있어 찾아왔지만 이런 식은 곤란했다.
“그 사건은 그냥 우연히 겹쳐 발생한 일이 아니야.”
“그러면요?”
“분명 어떤 무리가 조직적으로 꾸민 일이라는 게 우리의 결론이네.”
“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최건우라는 사람이 회장님이 지원하고 있는 학원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영화를 많이 보신 건 아닐까요? 고작 학원 선생 하나 치우려고 그런 정도 스케일의 일을 꾸민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습니다.”
“됐네. 그 정도 안목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괜한 기대를 한 게야. 일없네. 어쨌든, 쓸데없는 일로 시간 뺏어서 미안하네.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하게나. 그럼 나부터 가보겠네. 으흠.”
차지훈이 계속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장만복 회장은 기어코 역정을 내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뉴스와 인터넷에서 하도 떠들어 대니 머리기사는 몇 번 봤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은퇴하면서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에 신경을 끄고 살았기 때문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냥 ‘사건이 참 오래가네’하고 희한하게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장만복 회장의 행동을 보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가 모르는 흑막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스파이로서의 본능이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이 먹은 노인네도 알아보는 내막을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다.
“망할 영감탱이. 아무것도 아니기만 해봐라.”
약속 장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차지훈은 인터넷으로 건우와 관련된 기사를 모조리 검색하기 시작했다.
기사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관심을 가지자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오호. 그 노친네 말이 정말이었네. 진짜였어. 이런 정도의 흐름이 있었다면, 그냥 간단한 조직이 아니야. 그런데 대체 왜 저기서 실수를 한 거지? 잘 가다가 삼천포도 아니고 갑자기 학력위조를 왜 들고 나온 거야? 저 정도 일을 꾸밀 세력이면 학력위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저런 실수를 한 거지? 진짜 의도한 건가? 그냥 우연인 건가? 아! 젠장! 궁금하다, 궁금해.”
15년 스파이 생활 동안 생긴 직업병이 나왔다. 중얼중얼 혼자 말하기.
혼자 외로이 임무 수행을 많이 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다.
사건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흥미가 동했다. 여러 가지 호기심도 생겨났다.
그러나 노련한 스파이였던 차지훈 조차도 건우가 학력위조를 일부러 흘렸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궁금한 건 궁금한 거라도…. 내가 도울 일은 아니야. 그래도 한때는 전 세계를 놀이터처럼 누비고 다녔던 나인데, 겨우 학원 일은 너무하잖아. 모양 빠지게 시리. 어! 이건 뭐지? 지금까지 기부한 액수가 40억 원이 넘어? 허이고야. 그래도 좀 대단한 사람이긴 하네. 어린 나이에 저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고.”
처음엔 관심을 안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기사를 검색하면 검색할수록 차지훈은 건우가 마음에 들었다.
“소아암 어린이 기부. 보육원 기부. 장학재단을 설립해서 소년, 소녀 가장과 고아를 지원. 근로 장학생? 이건 좀 특이하네. 어디 보자. 근로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은 학원에서 일하게 하고, 생활비와 학비까지 지원해준다. 그리고 그 지원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된다. 어허. 일을 준 다음, 당당하게 지원을 받게 한다? 이거 괜찮네. 좋은 생각이야.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거지?”
단순히 돈만 지원하는 게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돈만 건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체계적으로 도움을 주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이 기특했다.
차지훈 또한 보육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돕는 건우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냥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며칠 동안 잊으려고 애썼다. 게임도 하고 좋아하던 버라이어티 쇼프로그램도 보고, 영화도 봤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건우가 떠올랐다.
자신이 봐도 암중 조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몇 가지 돌발 변수 때문에 운이 좋게 넘어갔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들은 이번 실패를 계기로 더욱 은밀하고 더욱 치밀해지면서도 더욱 치명적으로 변할 게 분명했다.
운이 따르는 것도 한두 번이다. 아무리 건우라도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파탄이 날 것이 분명했다. 자신과 상관없다고 되뇌었지만, 그는 이미 냉정함을 잃은 전직 스파이였다.
장만복 회장을 만난 지 5일 지난 다음 날,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가득한 차지훈이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가? 실력도 없는 간첩하고는 일없다고 했네만.”
“할게요. 한다고요. 그러니까 그만 좀 하시죠? 그런 유치한 심리전 안 거셔도 같이 일할 테니까요. 이제 사람 그만 긁으시죠?”
“오! 그게 정말인가?”
“네. 제가 내일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시죠.”
그렇게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차지훈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너무 쉬었는지 온몸이 삐걱거렸다.
그래도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일, 어느 정도 몸을 만들고 시작하고 싶었다.
얼마 돌지도 않았는데,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찝찝하지 않고 상쾌해지는 기분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한 줄기 굵은 땀방울이 턱을 타고 목으로 주르륵 내려갔다. 그 땀방울에 햇빛이 비쳐 반짝반짝 빛났지만 차지훈은 그저 몸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우와 초이스 에듀를 노리는 자들의 행동은 더욱 은밀해졌지만, 그렇게 건우에게도 이제 천군만마와도 같은 든든한 지원군이 한 명 더 늘어나게 되었다.
***
세계그룹은 특이하게 출판업으로 시작해서 우리나라 100대 대기업에 들었다. 큰 성장동력이 없는 세계출판사를 기반으로 100대 대기업까지 성장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세계그룹의 창업주는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이루어낸 신화적 인물이다.
창업주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 중 넷째 아들의 혼외 자식이 바로 박유하이다.
박유하 이사가 맡은 세계교육은 사설학원이다. 세계그룹 계열사 중 가장 천덕꾸러기 취급이다.
100대 대기업 안에 드는 큰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가 사설학원이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임원들이 많았다.
세계그룹의 전신이 되는 세계출판사. 그 세계출판사에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세계교육. 창업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애착이 가는 곳이었겠지만, 그가 죽은 이후 순식간에 찬밥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룹 내에서 별다른 힘이 없던 창업주의 넷째 아들. 그런 사람의 혼외자식인 박유하에게는, 어쩌면 세계교육 이사직도 감지덕지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야망이 큰 그에게 세계교육 따위는 전혀 성에 차지 않지만, 그걸 내색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세계교육을 발판으로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모기업의 워낙 규모가 커서 그렇지, 세계교육 자체는 그리 나쁜 곳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상당히 알짜배기 기업(학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매출은 다른 계열사에 비해 낮지만, 영업 이익은 굉장히 높다. 우리나라 학원 중 순위로 따지면 최소 2~3위를 다툴 정도의 실력과 인지도를 갖추고 있다.
인터넷을 포함한 스마트 시장의 경우 최근 과감한 투자 덕분에 대한민국 최고의 학원이라고 불리는 기가 싱크빅을 위협할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습지나 홈스쿨 사업의 경우는 창업자 사후 1위 자리를 내줬으나, 박유하 이사의 이사 취임 이후 빠르게 최고의 자리를 탈환했다.
특히 홈스쿨 사업의(사실상 방문학습) 경우 그 대상이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층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굉장히 넓어 순수 학원 사업보다 더 짭짤한 수익을 올릴 때가 많았다.
한 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존재가 홈스쿨 사업이다.
스마트 사업이나 학습지 및 홈스쿨 사업이 지금처럼 성장한 것은 전부 박유하 이사의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빠른 성장 덕분에 그룹 본사에서도 점점 더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박유하 이사는 여기서 만족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관여하는 모든 사업에서 독보적인 1위가 되고 싶었다. 당연히 그럴 자신도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5년 안에 학원 인지도에서 기가 싱크빅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만 되면 세계교육은 세계그룹의 당당한 자회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고, 그걸 발판으로 세계그룹에 입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찬란했던 그의 장밋빛 계획들이 어느 순간 모두 일그러져버렸다.
어디선가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 최건우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오프라인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온라인이었다.
건우가 현재 소속된 한강 에듀케이션은 이미 세계교육의 턱밑까지 추격할 만큼 빨리 성장했고,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인터넷 강의는 세계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 학원 인터넷 강의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세계교육의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선진국을 참고해 참고서 이북도 준비 중이었는데 선수(先手)를 빼앗겨 버렸다.
다른 포털사이트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꽤 큰 투자를 한 게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세계교육이 자체 플랫폼을 만드느라 전력을 다하는 사이, 건우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바나나와 협력하여 참고서 이북 시장을 선도해버린 것이다.
박유하 이사는 한마디로 닭 쫓던 개가 되어버렸다.
스마트기기 판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유명 태블릿 회사와 기기 공급 계약을 맺고 이제 막 판매를 시작하려던 와중에, ‘학교 가기 싫어’라는 드라마를 앞세워 시장을 선점해버렸다.
건우의 선택은 그렇게 계속 박유하 이사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대기업의 풍부한 자본금을 이용해 데려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장만복 회장과 밀접한 관계인 걸 보면 돈을 이용한 스카우트도 불가능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전초제근. 문제가 보이면 뿌리까지 뽑아줘야 한다는 것이 박유하 이사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의 야비한 술수에 휘말려 한방에 훅 가버린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인지 양심의 가책은커녕 술수 부리는 일이 점점 즐거워지기만 했다. 당연히 실패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멋지게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라는 작전명까지 세웠는데,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성공에 취해 마음이 너무 풀어져 있었던 것 같아 스스로에게 실망도 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세계교육을 발판으로 세계그룹을 먹고 진짜 세계로 진출하려던 그의 원대한 계획을 생각하면, 이번 일은 정말 좋은 교훈이자 채찍질이 되었다.
그러면서 다음번에는 어떤 변수도 작용할 수 없도록 완벽한 계획을 짜 건우를 반드시 몰락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