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71화 (71/256)

제71화

평범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얀색 반소매 면 티셔츠를 입은 남자. 염색기는 없고 머리는 전혀 튀지 않는 평범한 헤어스타일.

거기에 눈매를 알아보기 힘든 검은색 뿔테 안경은 평범함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어디서나 볼법한 패션. 어딜 가도 비슷하게 입고 있는 사람 한두 명은 찾을 수 있는 옷차림.

최근 한강 에듀케이션 주변을 배회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다.

잘 생겼으면 그 모습이라도 눈에 띌법하지만 키도 평범, 몸매도 평범, 얼굴도 평범해서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딱 한 사람 있긴 하다. 그의 정체를 아는 건우만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지나갈 뿐이었다.

“어라. 이 자식이 오늘은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며칠만 더 지켜보다 슬슬 대화나 나눠보려고 했는데. 설마 눈치를 채고 몸을 뺀 건가?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천하의 나 차지훈이? 아니지! 내가 아무리 몇 달 동안 쉬어 감을 잃었다고 해도, 아마추어 애들에게 들킬 만큼 허술하진 않지. 암!”

남자는 버릇처럼 혼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오호라! 크흐흐. 역시 저기 오네. 꼬라지를 보니까 어디서 놀다가 늦어서 후다닥 뛰어오는 모양인데…. 하여간 아마추어는 이게 문제야. 직업의식이 없어. 직업의식이. 이래서 오히려 아마추어가 상대하기 힘들다니까.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잖아. 에잇! 안 되겠다. 지켜보는 건 이제 그만하고 서로 간의 아름다운 대화나 나눠볼까?”

한강 에듀케이션을 배회하던 남자의 정체는 이번에 건우가 새롭게 영입한 정보팀 팀장인 차지훈이었다.

그가 처음 출근해서 사무실 보안 문제를 해결한 다음 가장 먼저 하고 있는 것이 지금처럼 학원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일이었다.

할 일 없는 백수처럼 돌아다니는 차지훈을 보며 건우도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지만, 일단 믿기로 한 이상 무슨 행동을 하든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정보 분야에 대해 손톱만큼도 모르면서 괜한 선입견으로 시작도 전에 왈가왈부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모든 건 결과로 이야기하면 된다.

그런 건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지훈은 멀리서 허겁지겁 뛰어오는 남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건너편 카페에서 한동안 한강 에듀케이션을 지켜보던 남자가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인적 없는 골목길로 들어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이. 뻥튀기 좀 먹을래?”

“뭐야? 크윽.”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남자는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의 정체가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뒷목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고, 암전이 찾아오면서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고마워. 일부러 이렇게 사람들 없는 곳으로 와줘서. 덕분에 일거리가 줄었네. 아이고야. 그나저나 이 덩치 큰 녀석을 어떻게 창고까지 데려가나.”

평범했던 외모와는 달리 차지훈의 몸놀림은 전광석화처럼 재빨랐다. 손날로 가볍게 뒷목을 내려쳤을 뿐인데, 90kg은 넘어 보이는 덩치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말로는 힘들다며 투덜거렸지만, 솜뭉치 들 듯 가볍게 남자를 들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건물 뒤 담벼락 부근에 내려다 놓았다.

누가 일부러 들어와 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눈치채기 힘든 외진 곳이었다. 차지훈은 주변을 힐끔 돌아본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자동차를 몰고 골목길로 들어온 다음 담벼락 부근에 차를 세웠고, 누워있는 남자를 들어 트렁크에 구겨 놓고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졌다.

서울 근교의 허름한 창고 건물.

“나는야 최고의 사나이. 나는야 멋진 남자. 여자들이 나만 쳐다본다네.”

차지훈은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진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서 말도 안 되는 괴상망측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음……. 뭐…뭐야. 이거 안 풀어? 너 뭐야. 야! 이 새끼야 너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이거 풀어!”

이상한 노랫소리 때문에 정신이 든 남자는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지만 튼튼한 밧줄이 풀릴 리가 없다. 전문가의 솜씨인 것처럼 그러면 그럴수록 밧줄이 더 옥죄였다.

“쯧쯧. 하여간 아마추어들은 안 돼.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가? 넌 묶여 있고, 난 두 손이 자유로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네가 그렇게 지랄발광을 하며 내게 소리를 치면 나 님은 기분이 어떻겠어? 존나게 기분 나쁘겠지?”

“너 이 새끼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딴 짓을 벌여!”

“맙소사! 너 진짜 병신이구나. 대화로는 방법이 없다, 방법이. 그럼 어쩔 수 없지. 일단 맞고 시작해보는 수밖에. 흐흐흐.”

차지훈은 상대가 소리를 치든 화를 내든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보다 좀 더 높은 톤에 경박한 말투를 사용하며 남자를 비웃었다.

평범하지 않은 모습에 남자는 숨을 죽였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판단이었다.

삐거덕하는 소리와 함께 스탠드의 불빛이 남자의 눈에 향했고, 차지훈은 옆에 놓인 몽둥이를 들고 서서히 다가갔다.

“저…저기 왜 이래? 일단 말로 하자고. 응? 마…말로 하자니까?”

“덩치는 곰 같은 놈이 겁은 많아서는. 그런데 말이야. 지금 이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야? 나이도 어린놈의 시키가 어른 앞에서 반말이나 찍찍 내뱉고 말이야. 에휴… 나도 참 많이 죽었네. 이렇게 말이나 앞세우고. 닥치고, 일단 맞자.”

퍽! 퍽! 퍽!

둔중한 몽둥이 소리가 창고 전체에 울러 퍼졌다.

“윽! 크윽. 제…제발 그만이요. 잘못했어요.”

남자는 정면으로 들어오는 스탠드의 불빛 때문에 차지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새하얀 치아가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뭘 잘못했는데?”

“반말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헐. 반말한 것 때문에 맞는 것 같았어? 땡! 틀렸어. 너 진짜 돌대가리구나. 그럼 더 맞자.”

퍽! 퍽! 퍽!

“흐흑. 제발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무조건 잘못했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그래? 그러니 죄송할 짓을 왜 해? 그러니 또 맞아야지?”

퍽! 퍽! 퍽!

“컥컥.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혹시 제가 한강 에듀케이션 감시해서 그런 건가요?”

남자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응? 거긴 또 어디야? 한강 에듀케이션? 미안해서 어쩌지? 난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데. 잘못 짚었으니 또 맞아야지?”

퍽! 퍽! 퍽!

차지훈은 자신이 한강 에듀케이션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또다시 구타를 시작했다.

“으흐흑. 그…그럼 뭐 때문에 이러세요? 제발 뭐가 궁금하신지 말씀을 해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뭐든지 말씀드릴게요. 네?”

“그래? 그런데 어쩌지? 이젠 안 궁금해. 나는 지금 너를 그.냥. 때리는 거거든. 너 은근히 때리는 맛이 있다. 재미있어. 흐흐흐.”

퍽! 퍽! 퍽!

남자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무섭고 두려웠다. 자신을 때리고 있는 인간은 미친놈이 분명했다.

이유도 없이 그냥 때린다니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궁금한 것을 물으면 집에 있는 숟가락 숫자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궁금하다며 그냥 때리기만 하는 눈앞의 남자 때문에 답답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제발 뭐든지 물어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래서 살고 싶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떻게든 살고 싶어졌다.

“제 이름은 김용철이고요. 나이는 28입니다.”

“아, 그 자식 참. 안 궁금하다니까.”

퍽! 퍽! 퍽!

“고등학교는 중퇴했고, 전과 12범입니다. 상해, 사기, 음주운전, 무면허운전, 공무집행방해, 성매매 알선 등등 여러 가지 잡다한 범죄입니다. 혹시 제게 사기를 당하신 분인가요? 아니면 제게 상해를 당한 분이 보내셨나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전과가 12범? 이야! 혹시 지금 전과 있다고 내게 겁주는 거야?”

“아이고!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선생님에게 겁을 주겠습니까?”

“뭐래. 나 선생님 아닌데. 그런 의미에서 또 맞자.”

퍽! 퍽! 퍽!

“끄아악! 나 죽네. 자…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아니 형님. 살려만 주십시오.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누가 네놈 같은 쓰레기의 형님이야. 에이, 기분 나쁘네. 그러니 또 맞자.”

퍽! 퍽! 퍽!

그렇게 폭행을 빙자한 고문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차지훈은 노련한 스파이 출신답게 자신에 대한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다. 그냥 남자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줄줄 불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무지비한 폭력 앞에 남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수많은 나쁜 짓을 전부 털어놨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진짜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땅에 묻어버릴까 잠시 고민도 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살아왔던 환경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살인?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그런 정신이상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국가에서 준 비공식적 살인 면허 덕분에 남들보다 살인이 좀 더 익숙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정부요원이 아니라 민간인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더라도 더는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신분이다. 사람을 죽인 게 발각되면 남들과 똑같이 살인자 취급을 받으며 벌을 받게 된다.

게다가 만에 하나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건우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렇게 되면 건우는 지금까지 겪었던 스캔들은 애들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폭풍이 밀려올 게 분명했다.

차지훈은 이제야 자신이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는 걸 통감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땅에 묻는 건 좀 그래도 때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

차지훈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몽둥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남자는 결국 무자비한 폭력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자신을 김용철이라고 밝힌 남자는 나쁜 머리를 짜내, 심지어 태어나 처음 잤던 여자애의 속옷 색깔까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불었다.

딱히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냥 조무래기였을 뿐이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는 형님의 지시를 받아 한강 에듀케이션과 건우의 행동을 관찰하는 게 전부였다.

왜 지켜봐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오호. 이놈들 꼬리를 안 남기네. 이래야 재미있지. 퍼즐 풀듯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재미도 있고 말이야. 흠. 그럼 이제 어쩐다.”

“여기서 용철이 녀석 형님이라는 놈을 치면, 괜히 타초경사가 될 수도 있겠고. 녀석 혼자 당한 거야 다른 원한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놈 윗선까지 건드리면 우연이 아니게 되니 쉽게 건드릴 수 없네.”

“재미있군. 재미있어. 당분간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청이나 하면서 지켜봐야겠네. 지루한 놈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여자 좋아하는 놈이면 훔쳐보는 재미도 있고 말이야. 후후후. 그럼 이제 우리 대표님에게 보고나 하러 가볼까? 탱자탱자 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중간보고라도 해야지.”

***

“어서 오세요. 차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낮에도 가볍게 눈인사 나눴는데, 이렇게 반겨주시니 민망합니다.”

“반갑죠. 차 팀장님이 저와 가볍게 수다나 나누려고 여기 오셨을 리도 없고. 뭔가 의미 있는 소식이 있으니 저를 만나러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그렇게 말씀하시니 갑자기 부담스러워지는데요. 하하하.”

“아! 제가 너무 부담을 드렸나요? 죄송합니다. 대체 배후가 누군지 그게 너무 궁금해서요. 적을 알아야 대비를 할 텐데, 누군지 모르니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네요.”

건우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예전 삶에서 자신을 나락에 떨어뜨린 세력과 이번 사태의 주범이 어쩌면 같은 세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였다.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앞서기 시작한 게.

생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기억이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조직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닙니다. 대표님의 마음이 이해 갑니다. 낯설겠죠. 누구와 철천지원수를 진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성실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저라도 밤잠을 설칠 것 같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조언을 좀 드리자면 저를 믿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십시오. 자랑처럼 들리시겠지만, 저라는 놈 생각보다 유능합니다. 누가 됐든 꼭 밝혀내겠습니다.”

“그 말씀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간단한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한강 에듀케이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지속적으로 학원과 대표님을 감시하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감시요?”

“네. 프로는 아니었습니다. 지켜본 결과 어설픈 아마추어였는데, 한강 에듀케이션을 꾸준히 관찰하고 보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어봤죠.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자신도 모른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관찰하고 보고만 한다고 그러더군요.”

과정이 많이 생략된 보고였다.

“네? 물어봤다니요? 물어본다고 대답을 순순히 합니까?”

“하하하. 설마 그렇겠습니까? 몸으로 즐거운 대화를 나눈 다음에 알게 된 사실이죠.”

“그러다가 차 팀장님이 노출되는 것 아닙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신분은 완전히 숨겼습니다. 워낙 나쁜 짓을 많이 하며 살아왔던 놈이라, 자신이 누구에게 당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겁니다.”

차지훈은 건우에게 굳이 납치와 고문까지 한 이야기는 밝히지 않았다.

건우 또한 단순히 몇 대 쥐어박은 그런 가벼운 몸의 대화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세력이라면 그 이상의 일은 충분히 감수할 생각이어서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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